그림자 연극을 본 적이 있는가? 하얀 막에 조명을 쏘이고 빛의 길목 위에 무언가를 두면 모양 그대로 그림자가 생긴다. 빛은 직진하기에 정직하다. 그러나 그림자 연극에서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인물의 표정이다. 그래서 대개 그림자 연극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고의로 움직임을 크게 하거나 목소리와 행동에 변화를 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인물의 표정은 알 수 없다. 관람객은 단지 보이는 실루엣으로 표정과 감정을 추측할 뿐 무대 뒤 편에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옆구리가 터져 솜이 다 빠진 누더기 인형일지라도 그림자 연극 무대에 오르는 데는 지장이 없다. 옆구리의 작은 상처는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으며, 관객들은 그가 얼마나 야위었는지 따위는 관심이 없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테이프로 대충 붙인 동물 인형도 관객들에게는 그저 귀엽고 발랄하게 보인다. 그렇게 몸이 여기저기 상한 환자들은 오늘도 즐거이 노래를 부르면서 지극히 정상적인 그림자를 만든다.
백화점이나 옷가게에 가면 한 칸짜리 작은 탈의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탈의실은 상식적으로 반드시 홀로 들어가야 하니 누군가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다면 문을 열어달라고 강요하면 안 된다. 사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누군가도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기 때문에 웬만한 힘으로 문을 여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무에게나 민망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도록 프라이빗한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보장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제 아무리 유능한 상담사일지라도 누군가의 감정을 정확하게 공감할 수 없다. 제 아무리 신묘한 독심술사라 한들 누군가가 꽁꽁 숨기기로 마음먹은 소중한 것들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고, 그렇기에 감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감정변화와 생각의 흐름이 마치 탈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감히 문을 열어서는 안 되는, 아니 아무리 두드려도 열 수 없는 탈의실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탈의실 문을 함부로 열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사람도 탈의실을 함부로 열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감정도 꽤나 민감하고 소중한 부분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감추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감정을 입고 벗는다.
겉으로는 참으로 멀쩡한 탈의실이지만 그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밖에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화답하는 밝고 상냥한 목소리 뒤의 눈물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탈의실에 갇힌 사람들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는 새벽 정적에 가려진 숨은 고통들이 많다. 다 찢어진 인형이 매우 정상적인 그림자를 만들어내듯이. 알 수 없는 벽 뒤의 습하고 진한 그림자 사이에 쓰러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조차 그저 지극히 동그랗고 평범한 원으로 보이는 현실을 떠들기 위해 조명을 그들의 머리 위로 향하도록 옮기고 싶다. 그제야 보이는 붉은 고통의 색채를 모두가 알 수 있게 말이다.
미약한 우리의 팔로 감싸 안을 수 없는 넓은 마음들이 있고, 여전히 무능력한 학문과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깊고 진한 감정이 있다. 빛은 한편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가장 암울하고 강력한 어둠을 만들어낸다. 결코 꺾이지 않는 빛의 당돌함이 누군가에게는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인 듯하다. 그림자에 갇힌 사람들이 수많은 감정을 갈아입으며 아무런 내색 없이 하루를 살아낸다. 그러나 줄로 몸이 묶이고 여기저기 상처가 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인한 우리네 세상 사람들은 몸부림을 치며 자신만의 그림자를 만들더니 감히 상상할 수 없이 아름다운 해결책을 제시하며 꿋꿋이 삶의 의미를 조성한다. 그 쓸쓸한 예술적 면모는 시대를 거듭하며 최고로 우뚝 선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며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가장 안타까운 상황에서조차 가장 영화로운 가치를 찾아내며 산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법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