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른 채 태어난 우리의 삶이 참 재밌다. 실패 하나 겪지 않는 삶은 없다지만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삶은 존재하며, 성공했다고 불리는 삶 또한 존재한다. 감히 누군가의 삶을 논할 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기엔 격조 있는 세상이 못되지만, 정말로 모두가 그만큼 뛰어나지 못하기에 서로를 향한 정제되지 못한 평가가 마구 오가는 것이 우리네 세상이다.
서로를 향한 냉철한 평가를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앞뒤 맞지 않는 언질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의 어리숙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이를 통해 오만을 깨닫고 자중하면서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마이웨이'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다. 나만의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교양 있는 현대인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보편적 통념을 벗어남에도 소신이라는 품격 넘치는 단어로 포장하여 자신의 그릇된 사고와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정신이 농후해질수록 성숙해져야 한다. 주사를 맞고 떠나갈 듯 우는 어른을 곱게 보는 시선이 많지 않은 이유다. 어른은 '날카로운 바늘은 많이 아플 테니 주사 맞기 싫다'는 어린아이 같은 사고를 더는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의 주사 경험으로부터 저 바늘이 눈물을 터뜨릴 만큼 극심한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것과, 주사가 자신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일차원적 날카로움 너머의 깊은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정신적 성숙과 그에 뒤따르는 깊은 행복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미래라는 불안정한 시간에 겁도 없이 발을 내디딘다. 조금만 둘러봐도 느낄 수 있는 한 사람의 치열한 심장박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성숙한 행복을 맛보기 위해 삶을 이어나간다. 끔찍한 고통과 끝없는 좌절 속에서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근본적 쾌락 중 하나이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 행복을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피가 사방으로 튀기는 경쟁의 장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근처에 성숙한 행복 따위는 없었다. 매일 똑같은 알람음, 풍경, 장소, 분위기. 똑같은 나. 어느 순간 똑같은 거리를 걸어가다 문득 든 생각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너무도 흔하고 가벼운 생각이었다.
쳇바퀴 같았다. 영문을 모른 채 달린다. 이유는 모르겠다. 모두가 달려야만 한대서, 어떤 표지판 위에도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는 없어서 마냥 달려왔다. 지금 내가 선 자리가 올바른지는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도 알 길이 없었다.
우리 가족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하셨고 역시 나 또한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도록 강요(?) 받았다. 부모님이 현관문을 출입할 때면 반드시 '다녀오세요', '다녀오셨습니까'라는 인사와 함께 포옹을 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다. 어머니는 항상 우리는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셨고,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 물음을 그치지 않으셨다.
혹독한 세뇌 덕분이었을까. 사랑한다는 말을 지금까지도 습관처럼 읊조리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 가족이 어떠한 어려움과 불화에도 최소한의 화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로서의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러나 반복에는 필연적으로 진부함이 뒤따른다.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이 전적으로 사랑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저 상투적인 인사말이 되어버렸다. 사랑한다는 말이 더는 간질거리는 설렘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반복은 불가피하게 지루함을 낳고, 의도치 않게 그 의미를 퇴색시킨다.
요즘 나의 하루가 그렇다. 지극히 재미없는 일들의 반복이다. 무언가 뚜렷한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다. 불행한 일 또한 전혀 생기지 않는다. 오르막도 없고 내리막도 없다. 그렇게 매일 지루한 데자뷔를 맞이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시곗바늘 속도에 맞추어 걷고 있는데 나 혼자 아무도 모르게 멈춘 것만 같다. 나 혼자 아직도 러닝머신 위에 있는 것 같다. 나만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러닝머신을 타는 이유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앞으로 발을 내디뎌보지만 얄미운 바닥은 자꾸만 우리를 뒤로 내몬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도 서러운데 뜀박질을 멈추는 순간 즉시 낙오된다. 결국 진부한 걸음을 끝내지 못한 채 또 달린다. 숨은 점점 가빠오고 더 이상 한걸음도 내딛지 못할 만큼 힘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러닝머신 위를 달리지 않는다. 그저 가삐 숨을 쉬면서 우리의 몸을 더욱 건강하게 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달린다. 그렇다. 나아가지 않는 걸음은 그만큼 의미를 지닌다. 반복과 꾸준함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줄넘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높게 뛰어봤자 그대로 떨어질 뿐 어떠한 변화도 없다. 변화를 바라는 것이 더 웃긴 일이다. 겨우 몇 번 줄을 넘으면서 무슨 진전을 바랄까. 이단뛰기, 삼단뛰기를 하는 것이 줄넘기의 목적이 아니다. 그저 가볍게, 그러나 절대 그 줄 돌림을 끝내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반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줄넘기를 온전히 즐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더욱 건강해진다.
언제까지 지루한 줄넘기를 반복해야 하는지,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왜 어떠한 발전도 없는 것인지 따위의 나약한 의문은 품지 말자. 우리의 카운트는 지금도 올라간다. 숫자가 쌓일수록 아무도 모르게 발전한다.
일상의 지루함을 불평하면서, 나아지지 않는 나의 삶을 자책하면서 살아간다. 오늘도 똑같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똑같은 거리를 걸어 똑같은 집에 들어간다. 달라지지 않는 나의 하루에 답 없는 의문을 던진다.
그럴 때면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몇십 년 넘게 같은 똑같은 출근길, 똑같은 직장, 똑같은 업무, 똑같은 퇴근길. 세월의 흐름은 우리 주위의 것들의 발전을 불러일으켰지만 한 사람의 삶의 풍경은 어느 무엇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몸을 일으켜 조그만 나를 위해 발을 옮기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무엇보다 위대한,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존재로 내 삶을 변함없이 지켜주기를 감히 소원한다.
지금도 반복의 삶을 살아내는 세상 모든 '아버지'들을 떠올린다. 오늘 아침도 같은 태양이 뜨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우리의 반복은 세상을 든든히 세워나가기에. 우리의 반복이 밋밋한 흑백 세상에 아름다운 색을 입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