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초록 Mar 21. 2021

멸치볶음

멸치볶음의 맛을 아는가?
아차! 멸치볶음에 함께 첨가되는 재료에 의하여 멸치볶음의 전체적인 맛이 결정되므로 질문을 조금 수정하겠다.

멸치의 맛을 아는가?
대충 '고소하다', '짭짤하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크기가 매우 작은 멸치부터 시작해 국물을 내는 데 쓰이는 큰 멸치까지.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멸치를 접할 수 있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겠지만 오늘 우리 집 저녁 상에도 멸치 수백 마리가 등장했다. 조금 과장해서 밥도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맛이 좋았다. 아직 간장게장과 같은 레벨의 칭호를 받기는 여간 아쉬운 면이 있으니 세미 밥도둑이라고 하자.

이렇게 맛 좋고 영양만점인 멸치는 아쉽게도 크기가 작다. 그래서 밋밋한 쌀밥 한 숟가락을 맛있게 꾸며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 여 마리의 멸치가 필요하다. 한 마리가 그리 두드러지지 못하는 것 같다. 두 어 번만 질겅질겅 씹어도 손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가녀린 멸치 한 마리다.

대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작은 것들은 외면받기 십상이다. 가끔 '작고 소중해!' 따위의 반응을 부르는 뽀시래기들은 그들만이 소유한 '특수적 뽀짝성'(방금 지어낸 말이다.) 때문에 애정 어린 시선과 관심을 듬뿍 받지만 그것은 예외에 불과하다. 반찬통 가득 담긴 멸치 따위를 보고 "너무 귀엽고 깜찍하니 인스타그램에 올려야겠어."라는 생각을 하거나 바닷가 동네 도로변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멸치 무리를 보고 "너무 소중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은 소장욕구가 샘솟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작은 것들은 그 능력과 존재감 또한 크기에 비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름의 쓸모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양이 많아야 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양이 많아질수록 그 개인 하나하나의 가치는 하락한다.

작긴한데 소중하지는 않은 타입

멸치도 그렇다. 작고 가녀린 하나의 개체로는 인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젓가락 한 번에 힘없이 딸려오는 멸치 한 마리의 뒤엉킴이 지칠대로 지쳐 밥상에 앉은 누군가의 시선에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다.


몇 달 전 학교에서 멸치 해부 실험을 했다. 아무래도 실험 대상이 멸치여서 그런지 과정이 간단했고 뒤처리도 어렵지 않았다. 실험을 하면서 신기했던 것은 멸치의 가녀린 몸에서 뇌도, 간도, 척추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멸치 또한 동물이고 생태계 내에서 나름의 분류 또한 가지고 있으니 딱히 신기하다고 할 것은 없지만 살면서 그리 궁금하지 않았던 멸치의 내부를 처음 접해서인지 꽤 흥미로웠던 것 같다. 징그럽고 무시무시한 기생충도 장에서 찾았다. 다른 친구들의 멸치에는 없었는데, 내가 유독 아픈 멸치의 배를 갈랐던 모양이다. 유감이다. 멸치에게 조의를 표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멸치도 생명이다. 한 마리 한 마리의 히스토리를 책에 써넣으려면 충분히 써넣을 수 있다. 나름 가족이나 친구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멸치 무리 내에서도 제 구실을 하는 어떤 사회가 존재할지 모른다. 어쩌면 위인전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위인 멸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험한 바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교육을 받는 어린이 멸치도 있을 것이고, 사춘기에 접어들어 존재와 진로에 관하여 깊은 고민을 하는 청소년 멸치도 있을 것이고, 가족과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어디든 헤엄치며 치열하게 살아내는 성인 멸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엄청난 멸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잠드는 멸치도 있을 것이다.

멸치도 꿈 하나쯤 가져도 되잖아? [출처 : 본인이 아까 급하게 그림]

그런 멸치를 우적우적 씹어먹다니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그런 소중한 하나의 생명을 우적우적 씹어먹다니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이전 문단을 읽고 무슨 개소리냐는 생각을 했다면 당신은 정상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을 했다면 역시 당신은 정상이다.

"암세포들도 어쨌든 생명이에요"라는 유명한 드라마의 대사가 있다. 당시 그 장면이 방영된 직후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꽤나 무리수였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지금도 암으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들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암세포들을 지켜주자는 뉘앙스의 대사는 누군가에게 충분히 불편하다. 우리가 모기를 잔인하게 찢고 불사르는 모기 고문 영상을 보고 죄책감이나 생명 존중에 대한 경각심 따위보다는 통쾌함이 드는 이유다.

그러나 멸치는 죄가 없다. 죄 없는 생명이 날카로운 그물에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시체가 되어 바싹 말라 형체가 온전한 채로 씹히는데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러면 고기는 왜 먹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 또한 뜬금없이 멸치가 불쌍하다는 주장을 들으면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육류는 나름의 손질 과정을 거쳐 가공한 뒤 조리하여 섭취하는 반면 멸치는 그 모습 그대로 인간이 섭취한다. 심지어 눈까지 말이다. 멸치의 시체를 온전히 씹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잔인한 방식으로 멸치를 섭취하고도 우리가 여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사실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러한 관점으로 과장하고 부정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길가 도로변의 가로수를 보고 도시의 매연에 찌든 볼품없고 쓸쓸한 나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떨어지는 낙엽이나 꽃잎을 보면서 계절이 부르는 쓰레기라고 여길 수도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세상에 올바른 것은 존재하지 못한다. 분명 꼬이고 꼬인 생각이다. 멸치를 통째로 먹는 것이 불쌍하다고 멸치를 손질해서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반찬 접시 가득 쌓인 멸치들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여 다음 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다면 다음 생에는 멸치로 태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멸치로 태어나 넓은 바다를 누비겠다는 꿈을 가지다가 어느 날 그물에 딸려 올라와서, 숨이 막혀 움직일 수 없는 고통 속에 쓰러진 뒤 햇빛에 타들어가다, 뜨거운 불 위에서 노릇하게 볶아져서 누군가의 밥상에 오르고, 많고 많은 멸치 사이에서 젓가락질의 선택도 받지 못하고 홀로 끈적하게 남아, 차가운 물에 씻겨 버려지는 멸치의 삶은 비참하지 않으려나.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정말 바보 같고 쓸데없는 생각 말이다.

누군가의 삶을 주제 넘게 동정하는 사치를 부려보았다.

나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해서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다 그렇게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해서 말이다. 눈을 말똥히 뜨고 누운 멸치의 모습이 유달리 측은했다. 그의 눈에 어린 슬픔과, 사투와, 그간의 치열한 몸부림이 보였다. 힘겨움 끝에 생을 마감한 멸치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몰랐겠지만, 아니 모르는 게 더 나아서 다행이지만.


멸치 한 마리의 몸뚱이가 유달리 비참해 보였던 비참한 오늘의 끝을 맞으며, 나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턱없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인간과 멸치의 상대적 위치를 다시 상기하던 중 떠올린 의미 없고 수준 낮은 고찰이었다. 정말 잡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반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