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
“우리 사진 한 장만 찍어줄래요?”
베트남 호치민 관광 첫 날, 팜응라오 거리 앞 한 공원에서 말쑥한 차림에 올백머리를 한 40대 남자가 사진을 부탁한다며 말을 걸어왔다.
“사진 찍어줘서 고마워요.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어요.”
남자는 바로 대답한다. “정말 잘됐네요! 제 이름은 제리, 말레이시아인이고 건축설계일을 해요. 지금은 휴가차 베트남 여행 중이고요.”
옆에 있던 여동생이라는 사람도 덧붙인다.
“전 마리라고 해요. 매년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일하는 중인데 마침 이번에 한국에서 근무하게 됐어요. 회사에서 한글로 된 서류를 몇 개 작성하라고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있나요? 이 것도 인연인데 같이 점심 식사도 하고 호치민 시내도 둘러봐요!”
현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다. 근처에 큰언니가 산다고 했다. 그 집에 초대해서 같이 점심식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같이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어찌나 친절한지. 내 옆에 붙어 앉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관광 정보를 수첩에 지도까지 그려가면서 설명해주었다. 말레이시아에 놀러오면 꼭 연락하라고 자기들 연락처를 적어주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좋은 현지 친구를 만나다니!
어딘지 모를 주택가 골목을 한참 들어가다 하얀색 페인트칠이 된 이층집 앞에서 내렸다. 낯선 집이다보니 들어갈 땐 나도 모르게 다시 경계심이 들었다. 큰 언니라는 사람은 어색한 미소로 짧게 인사한 뒤 베트남 가정식으로 보이는 식사를 내왔다. 먹물오징어 요리와 닭볶음탕과 비슷한 빨간색 닭 요리였다. 만일을 대비해 친구들이 먼저 먹는 걸 보고 나도 숟가락을 들었고, 물도 생수병을 앞에서 따는 걸 확인하고서야 마셨다. 아무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올백머리에 금목걸이를 두르고 정장차림을 한 남자가 2층에서 내려왔다. 이름은 알렉스, 이 남매의 사촌이자 집 주인이라고 했다. 쉐라톤호텔 카지노 딜러라고 했는데 원어민 같이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에 더 믿음이 갔다. 모처럼 대화가 잘 통하는 현지친구를 만나 들떴는지 내 여행 일정과 NBA, 카지노에 대해 30분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알렉스는 최근에 자기가 일하는 카지노에서 새로운 룰의 블랙잭을 프로모션 하고 있으니 한 번 배워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왔다. 작년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에서도 카지노에 빠져 본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많이 봐 왔고, 뭔가에 빠지면 끝없이 빠져드는 내 성향을 잘 알았기에 고맙지만 사양한다는 뜻을 표했다. 알렉스는 이 것도 좋은 경험이고, 어차피 나도 경험하려고 여행하는게 아니냐며 몇 번이고 게임을 해보자고 권했지만 난 한사코 거절하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결국 알렉스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제리와 마리는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날 내려준다며 택시를 불렀다. 어머니는 신장병과 백혈병을 같이 앓고 계신데 희귀혈액형이라 한 번 수혈에 60만원이 든다고 말했다. 목적지인 통일궁이 가까워오자 마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이렇게 사정이 어려우니 택시비라도 도와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친절하고 여유 넘쳐보이던 친구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당황스러웠다. 지갑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5천원 정도를 꺼내서 내줬다. 조금 더 달라고 재촉해서 얼떨결에 5천원을 더 꺼내줬다. 저녁에 다시 보자고 약속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하루 여행 예산이 2만원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만원을 지출하니 타격이 크기도 했지만, 좋은 친구들을 만나 들뜬 기분에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이 날 더 찜찜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들이 좋은 친구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반 정도는 남아있었다.
통일궁에 들어가서도 방금 전까지의 상황을 곱씹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남녀가 또 말을 걸어왔다.
“오 비틀즈! 비틀즈 좋아해요?” 마침 비틀즈 멤버가 그려진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 네.” 얼떨결에 대답했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나도 정말 좋아하는데 이 것도 정말 인연이네요.”
‘사실 비틀즈 멤버는 잘 모르는데, 이 남자는 막힘 없이 얘기하는구나. 비틀즈 정말 좋아하나보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남매이고 베트남에는 휴가차 왔어요.”
‘말레이시아? 남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까 제리와 마리를 만난 상황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그제서야 이게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사기수법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여행기간은 얼마나 오래 잡고 있나요?” 역시나 내 여행에 관심을 가진다.
“내일 한국 돌아가요~”
“여행 예산은 얼마나 잡았어요?”
“남은 돈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어서 포기하고 그냥 보내달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내 비협조적인 태도에 남자는 전략을 수정하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자기 아버지라며 날 바꿔준다.
“내일이 내 생일이라 생일파티를 할거에요. 초대하고 싶지만 내일 베트남을 떠난다니 케이크를 사게 만원만 주세요.” 아버지란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얘기한다.
“미안해요. 저도 학생이고 지금 남은 돈도 없어요.” 아까 경험 덕분에 두 번째는 이렇게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루종일 시달렸더니 씁쓸한데다 기운도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통일궁을 나와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에 또 한 중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비틀즈 티셔츠 멋지네요! 어디 사람이에요?”
자신의 딸이 이번에 서울대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했다. 내게 한국 생활이 어떤지 조언을 구하고 싶다며 내일 점심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마침 자기 아들이 옆에 있다며 내게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그 아들이라는 청년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가로수에 등을 기댄채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해 왔다. 더 시간 낭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문득 이놈의 비틀즈 티셔츠를 버려야하나 잠깐이나마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선 스스로에게 ‘열린 사람’ 이 되자는 미션을 주었다. 낯선 여행길에서 누구를 만나든 반갑게 인사하고 사소한 대화라도 정성을 다하는 사람, 그래서 작게나마 그 인연을 영글게하려는 그런 사람. 베트남 여행 첫 날 만난 이 세 팀의 사기꾼들은 내게 좋은 예방주사가 되어주었다. 덕분에 친절한 미소로 다가오는 현지인 앞에서 마음을 움츠리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양팔을 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되니 오히려 더 좋은 점이 많다. 현지인 친구를 사귀면서 이방인이 아닌 그들의 삶을 보고 들을 수 있는 행운도 가질 수 있었고, 행여나 누군가에게 속는 일이 있더라도 전처럼 깊게 상처받지 않고 금방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맷집도 생겼다.
베트남의 이런 첫인상을 핑계로 현지 친구들과의 인연을 외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호치민이 졸업했다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배드민턴 시합도 못해봤을거고, 훼로 이사온지 얼마되지 않아 친구가 없던 니나도 만나지 못했을거다.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던 라오바오 국경에서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훼로 돌아오기까지 큰 곤란을 겪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베트남 음식인 분짜를 영영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난 이 때와 같은 '열린 사람' 이면 좋겠다. 내가 지향하는 바를 어려움을 핑계로 같이 묻어버리지 않길 바란다. 어떤 불쾌하고 분한 일을 겪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그런 상황쯤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현지인 친구를 사귀기 위해 더 많은 사기꾼을 기꺼이 겪은 것처럼, 보석 하나를 찾기 위해 수많은 돌멩이를 걷어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