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밖에서 중력 안으로

by 풀빛

삶에도 중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구가 우리 몸을 끌어당기고 있어

지금도 이렇게 땅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삶의 중력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 당연한 감각이리라.


하지만 우주 정거장에서 오랜 기간 생활하다 지구로 귀환한 사람은 어떨까?

그 사람은 지구의 중력이 온몸으로 새로이 느껴질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나는 오래도록 내 삶과 연결되지 못한 채

어딘가를 둥둥 떠다니는 존재처럼 살아왔다.

그러다 가족과 단절한 뒤 처음으로 삶과 나 사이에 분명한 중력이 생겼다.

마치 지구와 몸 사이에 작용하는 그 거스를 수 없는 힘처럼.

단절 이후 흥미로운 변화 중 하나는

늘 똑같은 집안 풍경도 다르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가족과의 단절 이후 어느 아침 출근 준비를 위해 화장대에 앉아있는데

파운데이션, 붓, 립스틱 같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물건이 '내 물건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공간도 '내 집이다'라는 자각이 찾아와

집을 딛고 있는 내 발에 닿는 바닥의 단단한 감각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그저 사물은 사물, 공간은 공간,

나는 나로 별개의 존재들로 분리되어 각각 존재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원가족과의 단절 이후에는 나와 사물,

나와 공간 간에 어떤 연결감이 생겨났다.

나아가 나와 타인, 나와 나 사이에도 연결감이 생겼다.

이제는,

'나의' 아이들과 더 눈을 자주 맞추고, '나의' 아이들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묻는 삶을 산다.

원가족 문제에 매여 있는 '나'일 때는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학교 보내는 것 중심으로

아이를 대했던 나였다.

이제 나는 나의 관심사가 현재의 삶에 더 초점이 맞춰졌고,

그러다 보니 '나의' 아이들의 '마음 돌봄'에 소홀했던 시간들이 미안했다.


내 삶의 지표면으로부터 느껴지는 중력,

그것이 부재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오늘날의 연결감을 더 소중히 여기고 싶다.


지난날, 나는 나의 삶과는 분리된 감각에 지배당했다.

이러한 나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 악몽을 하나 소개하자면,

몇몇 반복해서 꾸는 악몽 중 가장 지독한 꿈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붕- 하고 뜨는 꿈이다.


꿈속에서 나는 원치 않는 순간에 갑자기 몸이 붕 떠버린다.

방 안이기도 하고, 야외이기도 했다.

나는 뜨고 싶지 않고, 간절히 내려가고 싶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특히 야외에서 몸이 뜰 때는

헬리콥터 높이만큼 떠오르곤 했는데,

그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이런 나를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나 혼자 공포에 질려 있음에도 세상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꿈뿐만 아니라,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분리된 감각을 느낄 때가 많았다.

마치 소설에서 1인칭이 아닌, 3인칭 시점의 화자가 되어 상황을 바라보는 듯했다.

대화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 대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어떤 주제로 흘러가는지, 모두를 관찰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관찰 대상이었다. 내 발화를 계속 점검했고,

대화 자체에 1인칭 시점으로 참여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어떨 때에는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을 마치 영상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기도 했다.


나의 이러한 문제는 '해리(dissociation)'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아의 중심에서 물러나 감정적 거리를 확보하는 방식을 일컫는

자기 보호 기제에 해당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해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기억, 현실을 마주했을 때

자아의 중심에서 잠시 물러나는 현상이다.

‘나’라는 존재가 감정적 고통이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심리적으로 거리 두기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해리 기제는 특히 어린 시절, 반복적인 정서적 무시나 거부,

혹은 불안정하고 위협적인 관계 속에서 자란 아이에게서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스스로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대신,

그 상황에서 버티는 생존 전략으로 해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감정을 차단하고, 스스로를 ‘관찰자’처럼 분리시키는 방식은

과거의 나에게는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었을 수 있다. 이제는 필요 없는.


지금은 몸이 뜨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

정말 수백 번은 꾼 반복된 꿈인데 거짓말처럼 꾸지 않는다.

낯가림은 있지만,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온전히 1인칭으로 대화에 몰입한다.

적어도 내가 카메라 같은 입장에서 이 대화를 관찰하는 불편한 감각은 느끼지 않는다.

나와 관련된 사람, 공간, 물건 앞에 '나의'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붙는다.


아마 '나'라는 존재는

그동안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고 유령처럼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그 망토는 내가 날 지키기 위해 뒤집어썼던 것이지만)


지금은 일정한 부피와 질량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간다.

마음이 편안하다.

나의 삶의 중력이 닿지 않는 깜깜한 우주, 그 암담한 허공에서 벗어나 삶의

지표면에 두 발을 디디고 산다.


나는 나일 수 없었는데, 이제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깜깜하고 아득한 우주 속을 헤매며

당신의 삶과 연결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나는 이제 당신도

당신의 아름다운 행성에 두 발을 딛고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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