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 1

part 1. 외부에서 날아오는 화살

by 풀빛

가족과 단절을 했다고 이야기하면

보기에는 대단한 절연이라도 한 사람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단칼에 천륜을 끊어낸 냉혈안처럼 보일지도.


물리적 단절은 선명하다.

마지막 통화 기록 시간과 마지막 문자의 시간은

나의 휴대폰 기록에 정확히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 또한 특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별 중이다.

겉보기와 달리 심리적 단절은 좀처럼 쉽지 않다.

너무 어렵다.


아직도 어떤 날은

눈물이 나고, 심장이 뛰고, 손이 떨린다.

'나의 남은 삶 전체가 고통으로 점철될 것이 분명해'

마음 속에는 이런 소리가 웅웅거리고

아득한 슬픔이 날 삼킨다.


끝나지 않을 거야. 아마.


어쩌면 남은 생애는

심리적 단절의 긴 여정일 수 있다.

지금은 그 여정의 출발 지점일 수도.


이 삶만이 내게 주어졌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런 삶은 아마 다중우주론에나 등장하는 가설일 뿐

다른 삶은 없다.

이 고통을 수용하기로 했다.

이 고통을 감내하기로 했다.

슬픔을 친구 삼기로 했다.


나는 아마 한쪽 발을 절뚝거리며 걷겠지만,

그 길의 방향은 ‘나답게 사는 삶’을 향해

나있는 길이리라.



심리적 단절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두 가지 장애 요인을 짚어보자 한다.

나는 이 장애 요인이 모두 '화살'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심리적 단절의 과정은 일종의 '투쟁'이나 '전쟁'과도 매우 비슷한데,

그 과정에서 내가 맞서야 하는 대상이며,

적절한 방패를 마련하지 않으면

이미 아픈 상처위에 다시 상처가 생기기 때문이다.


나 역시 물리적 단절 이후

외부에서, 또 내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때로는 정신을 못차리고 비틀거렸다.


단단한 방패를 만들어야 한다.

'방패 만들기'의 시작은 화살에 관한 분명한 '인지'에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는 가족 중심 주의 문화가 매우 강하다.

그렇다보니, 가족 안에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문제를 겪고 있어도

쉽사리 가족과 거리를 두는 것을 결정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결정을 존중받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다.


나 같은 경우도

‘도저히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불가피하게 물리적 단절을 선택했다.

하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결정한

물리적 단절도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직접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가족은 밖에서 볼때

단합이 잘 되는 가족처럼 보였지만

내부는 곪아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종종 가족여행도 다니고

아무리 아빠의 폭력적 주사가

도를 넘는 밤이 있었어도

다음날 아침 밥상은 평화로웠다.

아니 평화로워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위선이 괴로웠다.

밖에서 보면 평범한 가족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내부는 여러 문제들도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

나는 평화로운 척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진정으로' 평화롭기 바랐다.

그래서 나를 던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자신들의 열등감에서 기인한 비뚤어진 비난이었다.

결국 정신적 한계에 다다르자

그간의 바람들이 헛된 꿈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과거의 나처럼 '괜찮은 가족의 일원'인척 하느라

애쓰고 있을 것이다.

‘가족 중심 주의'나 '효'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정신 건강이 위험 신호를 보낼 때까지

참고 참고 참는 사람이 비단 나뿐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가 가족 중심 주의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곪아 있는 가족내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심각한 정도의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개인이 건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 어렵다.


우리 사회의 지나친 ‘가족 중심 주의’ 문화는

오히려 가족의 문제를 덮고 모른척하는 것이

‘효’라고 착각하게 한다.

나아가 개인의 인내를 무리하게 요구한다.


나는 나의 이 작은 글이

조금씩 이러한 사회 문화적 관습이 바뀌는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나의 경험을 소개하자면,

가족과의 단절을 결심할때 즈음,

나는 나의 결정을 존중해 줄 것이라

기대할만한 몇몇 주변 사람들에게

결정의 배경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

나로서는 정말 큰 용기를 냈던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힘들었다는 건 알겠는데 단절은 과하지 않나’라는

표정을 지으며 갸우뚱해 했다.

(사실 원가족이 나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이 싫어 내가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한 측면도 있다.)


그래도 선뜻 '그 결정은 너무 한 거 같아'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정도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 중 몇몇은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자세한 배경을 일일히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나'라는 사람을 알아봐 준 이들이다.

‘그래 네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이 힘들었겠네. 오죽했으면 그런 결심을 다 했을까’

하며. 나에게 그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원가족 내에서도 나는 나를 '어디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원가족 밖으로 나온 그 시점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더 강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어려운 결정을 수용해준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나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 결정을 내가 인정하는 것은 더없이 강인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지금은 마음에 그러한 힘이 생기는 중이다.

하지만 물리적 이별을 결정한 직후에는

내 마음에 아무런 힘이 없었고, 나는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낭떨어지 앞에 선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물리적 단절 넘어의 아픔을 헤아려준 이들의 작은 한마디는

나를 살린 말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나의 결정을 비난했다.

내 이 결정이 나중에 부모님 돌아가시면

아주 후회할 일이라는.


그래도 나를 이해해주리라 기대했던 사람에게서

그런 비난을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자리에서 나는 온 힘을 다해

나를 변호했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내 목소리를 낸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예전 같으면 한마디도 못했을 텐데 상담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배워가던 시기였다.

배운 대로 잘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 앞에서 펑펑 울며 말했다.

“나는 당장 내일 부모님과 내가

모두 죽는다고 가정하면

나는 나에게 제일 미안할거 같아.

나는 엄마, 아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는데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못해줬고

나를 짓밟도록 나를 너무 내어줬어.

내가 불행해도 엄마, 아빠가 행복하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하루라도 내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도 당신 말처럼

너무 힘들어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

나를 갈아서라도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어.

그런데 지금은 엄마 아빠보다 내가 더 불쌍하고

나에게 더 미안해.

엄마 아빠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행동을 하고 살았지만

나는 엄마 아빠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만 했어

이제 그렇게 못 살겠겠어.

안 하는 게 아니고 못하겠어.“

이 이야기를 하며 바들바들 몸이 떨렸지만

나는 기어이 내뱉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까지 말하는 나에게

그 사람은 차갑게 반응했다.

(그 반응이 너무나 엄마 같았다.)

듣기 싫다는 말투로 알았어 알았어 하면서

자리를 피하기 급급했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을 못하겠다고!!!"

악을 쓰며 울었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이가 이 글을 본다면,

나도 이런 일을 겪었으니

그 힘든 마음을 내가 안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고

진심으로 지지해준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혹시 그 사람의 결정이

‘너무한 거 아니야? 가족과 단절이라니.'라는 생각이

스치더라도,

'오죽하면 그럴까.'라는 생각도

한번은 떠올려 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절대 '비난'이나 '훈계'는 하지 말아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이미 그 사람은 절벽끝까지 가서

겨우 버티고 있는 사람이다.

그 비난과 훈계가 절벽에서

그 사람을 밀어버리는 말이 될 수도 있으니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가족 중심 주의’에 사로 잡혀

형식적 단합, 겉치레식 효도만 중시하고

각 개인의 내면의 건강성 회복에는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돌아봐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현재 우리 사회는

나와 같은 결정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또한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 차원에서

심리적 방패를 마련하는 것이

더 우선적 대응 방안일 수 있다.


‘외부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내부의 죄책감이라는 또다른 화살을 촉발시킨다.

외부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잘 막을 수 있는

방패는 내부의 화살을 잘 막는 방패와

결국 일맥 상통한다.

'죄책감'보다는 원가족 구조에 관한 정확하고

냉철한 판단에 기인한 '인식'이

화살로 부터 나를 지키는 출발점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음글에서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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