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단절 이후 가족이 가진 본질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심리학 관련 영상과 도서를 탐색했다.
그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원은수 선생님께서 쓰신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라는 책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원가족이 어떠한 나르시시스트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잘 설명해 준다.
나르시시스트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다른 사람의 기분과 필요를 인식하는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감정 이입이 잘 되지 않는다.
2.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믿으며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 과대한 느낌을 가져서 자신의 성취와 능력에 대해 과장하고 적절한 성취도 없이 자신이 우월하다고 인정받기를 기대한다.
3. 자기중심적이다.
4. 과도한 존경과 감탄을 요구한다.
5. 성공 권력 탁월한 재능 아름다움에 몰두한다.
6.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것은 자신인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질투한다고 말하고 믿는다.
7.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적고 개인적 이익이 더 중요하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주된 이유는 그들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8. 다른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
이 특징을 보며 나는 우리 가족과 너무 맞아떨어져서 깜짝 놀랐다.
하나하나의 특징에서 연상되는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나르시시시스트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특징을 나타내지만
세부적으로는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나르시시스트를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과대형 나르시시스트, 취약한 나르시시스트,
악성 나르시시스트,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 독선적 나르시시스트이다.
이 책을 읽고, 엄마와 동생은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심리학 교수 요헨 제바우어에 의해 새롭게 대두된 나르시시스트 유형이다.
이 유형은 다른 나르시시스트와 같은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과대성을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의 찬사를 추구한다.
그래서 이들은 기부나 봉사, 선행이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정해 주는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엄마와 동생은 나의 감정이나 생각엔 공감을 표현한 적 없다.
내가 울면서 진심을 호소해도 뚱한 표정으로 보거나
"너만 힘들었어? 나도 힘들었어. 왜 너만 힘들었던 것처럼 울어?"라고 말한다.
늘 가족의 필요를 채우느라 애쓰는 나를 쉽게 비난하면서
교회 사람들에게는 지극 정성으로 반찬을 만들어 준다거나
인스타그램에 정성 어린 따뜻한 댓글을 단다든가 한다.
동생이 이민을 목표로 외국에 취업을 하러 가기로 한 적이 있다.
나는 언제 볼 지도 모르고 외국에 나가면 고생할 텐데 걱정도 되고 해서
만나서 저녁이라도 사주고 싶어 만나자고 했더니 차갑게 거절을 하며
다음날 공항에서 볼 건데 뭐 하러 만나느냐고 했다. 귀찮아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송별회 모임을 만들어 참석한다.
내가 평소 아빠의 술주정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매일 그냥 넘어가고 심지어 아침에 해장국을 끓여 대접했다.
또 아빠는 술주정을 해서 우리는 잠을 못 자는 일이 반복되었고
나는 분명히 그런 행동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에는 나에게
"아빠를 사랑해야지 왜 너는 왜 아빠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냐"라고
비난했던 이들이 정작 아빠와 엄마가 이혼하는 과정에서는
아빠의 마지막 목숨줄 같은 사업자금을 뺏으려 했다.
나는 그걸 말렸다. 그러자 엄마와 동생은 이구동성으로
아빠가 잘못했으니 길거리에 나 앉아도 상관없지 않으냐고 나에게 반문한다.
나도 크리스천이고, 엄마와 동생도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행동을 보면 정말 안 믿는 사람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 나온 '상한 갈대를 꺾지 말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말아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
교회에서는 '드러나는' 봉사에 매진하면서
정작 금전적 이익 앞에서는 가족도 가차 없이
짓밟는 그 위선이 나는 너무너무 싫었다. 아니 끔찍했다.
그런 잔인함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아빠를 사랑하고 위하는 건 세상에 자신 밖에 없으며
나를 아빠를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몰아세웠다.
나를 아빠의 나쁜 면만 들추는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애로 취급했다.
나는 늘 가정의 평화를 깨는 사람, 따져대길 좋아하는 사람,
까다롭고 예민해서 가정의 분란을 조장하는 사람으로 몰아갔다.
정작 금전적 이익 앞에서는 적나라하게 탐심을 드러냈다.
아빠가 노숙자로 전락했을 때 겪을 고통에
눈하나 깜짝 안 하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울면서 인간이라면 그렇게 쉽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아무리 아빠가 잘못했어도 나가 죽으라고
내모는 건 정말 인간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고……
결국 나는 평화로운 이혼을 위해 두 분의
거처를 마련하는데 내 자금을 많이
들이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했지만
고마움은커녕 매우 심각한 인신공격성 비난을 들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은 관계를 이어갈 정신적 여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야말로 '끝'을 실감했다.
원가족과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시로 나를 비난하며 자신들의 열등감을
감추려 하는 태도,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내 의견에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태도 때문에
그 어떤 평범한 대화도 불가능한
그들이 나는 늘 너무 버거웠다.
그러면서 큰 결정을 앞두고는 늘 나의 조언을 구했다.
자신 필요에 따라서 나를 수단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면 자기 일처럼 내가 헌신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이를 이용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스스로도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막연한 인식은 있는 듯하다.)
내가 엄마나 동생을 도와줘도 진심으로 나에게 고마워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의 의견에 시비를 걸거나
비아냥 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도와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도와주면 또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가끔
"그럼 알아서 결정하세요. 그럼 알아서 찾아보세요."
라는 말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갑작스럽게 몸을 낮추며 "그래도 네가 얼마나 나에게 큰 도움이 되는데,
너는 그릇이 참 커"와 같은 부자연스러운 칭찬을 미끼 삼아 던질 뿐이었다.
원은수 선생님의 책을 보니 이러한 행동 또한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인 "빵 부스러기"전략이었다.
엄마나 동생은 나의 생각, 감정,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물리적 거리를 둔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정말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있고, 미성숙에 관한 더 심한 예시가 많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추는 것이 독자에게 큰 유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일화를 일부만 소개한다.)
이 유형의 나르시시스트에서 정서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타인과 나누기가 매우 어렵고 고립되기 쉬운데
대외적으로 그 사람은 사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
이타적 태도를 가지고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사람 등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중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나의 고통을 더 숨기게 만들었다.
나의 고통을 잘못 말했다가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거나
또 다른 비난을 받을 일을 자처하는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나르시시스트가 떠오른다면
"아!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라고 속이 시원할 수도 있고
당장 그 사람에게 "당신은 나르시시스트야.
책이나 영상을 좀 봐봐 네 이야기인지 분명히 알 거야."라고 말하며
당사자의 문제를 직면시키고자 하는 충동이 들 수 있다.
먼저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 역시 그랬기에 먼저 당신의 자각을 응원해 주고 싶다.
그런데 그 시원함 뒤에 곧 슬픔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말도 해주고 싶다.
그 사람과 이제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인가라는
관계 설정에 관한 고민이 뒤따라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이 사실을 빨리 받아들여야 당신이 지혜로운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물리적, 심리적 거리 두기가 현실적으로
가장 당신의 정신 건강에 가장 이로운,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거리 두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당신을 화나게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감정적으로 화를 드러내는 것은 그 사람의 우월감을 자극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화를 내는 나를 가해자로,
화를 듣는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기 좋은 계기를 마련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명백한 사실을 왜곡하여 거짓말을 하고, 아무리 서로가 아는 자명한 사실을 이야기해도 사실조차 부인하며
선을 넘는 인신공격성 비난으로 나를 몰아가는 이유가 뭘까? 나는 상대를 위해 헌신하기만 했는데 왜 이런 나를 막대할까? 내가 화를 내도록 심한 말을 서슴없이 뱉는 이유가 대체 뭘까 궁금했는데 그 궁금증이 해소되어 정말 속 시원한 내용이었다.)
원은수 선생님은 나르시시스트에게 감정의 동요 없이
무미건조한 무반응으로 일관되게 대처하기를 권한다.
이름도 '회색돌 기법'이다. 회색의 조약돌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최근 엄마는 단절을 선언한 나에게 다시 접근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였다.
엄마는 미안한 척도 하고 아픈 척도 했다.
나는 속지 않았고, 냉정하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두 얼굴의 나르시시스트에게 더 이상
내 삶을 제물로 줄 수는 없다는 절박함이
냉정한 태도로 말할 수 있게 했다.
사실 마음은 냉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마음이 무너졌다.
일상이 흔들렸다. 분노와 불안이 커졌고
처음으로 아이들 앞에서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이렇게 화가 느껴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단절 이후 화가 나기 시작했고, 가끔은 조절이 어려울 때가 있다.
조절 능력을 키워가는 것 또한 나의 성장 과정일 것이다.)
분노조절에 실패한 모습을 보여 우울감과 패배감에 지배당했다.
어떻게 얻은 평화로운 일상인데 다시 다 잃는 건 아닌지 아득했다.
혼자 여행도 몇 번 다녀오고, 이렇게 글도 쓰고,
현가족, 나의 아픔을 이해하는 지인과 대화도 나누며
일상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나를 살리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번 일을 겪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는 절대 그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나의 남은 삶은
반드시 소중하게 다루며 살 것이라고.
좋은 추억을 스스로 만들어 채워갈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