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j, 대학원 졸업기념 40일 유럽여행 11
찡그리며 눈을 뜬다.
으스스하게 추운 것이, 초봄 같지 않고 한겨울만 같다.
아 맞다, 여기 베를린이지.
새삼 여행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p로부터 온 영상 하나가 도착해있다.
한국엔 눈이 온다고 한다. 너와 함께 보면 좋았을 것 같다며.
작은 알갱이들이 정신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찍혀있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유독 눈을 좋아한다.
영상을 한참 바라보다, 나도 보고 싶다는 답장을 보냈다. 너도 눈도 보고 싶다는 뜻이다.
옆에 누워있는 j는 아직도 꿈나라다.
아침부터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고, 화장도 해야한다며 고집을 부려 준비시간이 그녀에 비해 곱절은 걸리는 것은 나기에, 깨우지 않고 둔다.
먼저 준비를 시작했음에도, 나는 j가 잠에서 일어나 샤워를 한 후, 모든 준비를 끝낸 후까지도 준비를 마치지 못했다.
예상한 광경이다.
허겁지겁 아침을 해먹고 노란색 컨버스를 신은 후 도쿄에서 산 랄프로렌 빈티지 자켓을 입었다.
이제 나가야지 하며 밖을 본 순간 깨닫는다. 한국에 눈이 온다면 베를린에는 비가 온다.
어느 유럽의 쿨한 누군가처럼 비를 맞고 다니다, 온 몸에서 쉰내가 나는 비극만큼은 막아야 하기에, 절박한 심정으로 호텔 로비에 읍소해 우산을 빌렸다.
호텔에선 당연하다는 듯 한국 마트에서 5000원이면 주고 살 것 같은 비닐 우산 두 개를 제공해준다.
행복하다. 바람만 안불면 거의 다 막을 수 있어.
우리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베를린에서 유명한 브런치 카페인 '커먼 그라운드'다.
인기가 많아 점심 즈음가면 웨이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후기를 봤었는데, 웬걸, 웨이팅이 전혀 없다.
심지어 좋은 자리로 보이는 소파 자리까지 있었다.
비의 영향인가 보다.
유럽만 오면 국밥마냥 땡기는 카페라테를 시켜 차가워진 몸을 데우고, 달달한 프렌치 토스트를 먹어치우고는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했다.
휴대폰을 하다가도 j와 수다를 떨었는데, 그녀와 있다가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이 때 j가 찍어준 사진 속의 내 표정이 지금 보아도 신기하다.
한국에서는 이런 표정을, 이런 기분을 그리고 이런 순간을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이제부터 어디 갈까 하다, 파리에서 만났던 s가 추천해준 베를린의 박물관 투어를 해보기로 했다.
남들이 다 가는 곳 말고, 온 김에 가보면 특별할 곳 위주로 추천받아 간 것이었는데,
망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미술관 문이 닫혀 있다.
비는 오지, 바람은 불지 날씨는 으슬으슬하지 한껏 기분이 우울해진 우리는 미술관 근처 따뜻해보이는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다.
커먼그라운드에서 브런치를 먹은 것은 언제냐는 듯, 커피에 디저트까지 시켜 야무지게 수다를 떨며 다시금 다른 장소로 향할 체력을 얻는다.
구글 지도 어플을 통해 열려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확인한 끝에, 우리가 다다른 곳은 사진전이 한창인 'gropius bau'라는 미술관이다.
아프리카계 흑인 사진작가의 사진전이 한창이었는데, 우린 그가 누구인지도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도 모른채 전시가 너무 좋아 그대로 순간 빠져버렸다.
내 나이 곱절은 되는 것 같은 연식의 카메라를 들고, 온 거리를 누비며 찍은 거리사진들도 좋았고 흑인인권 해방 운동 메세지가 담겨 있는 작품들도 정말 좋았다.
그가 사진을 찍는 순간들을 기록한 영상물을 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기록이란 건 이렇게나 중요한 거구나.
나도 돌아가 꼭 오늘의 일기를,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남겨야지.
전시를 다 보고난 후, 고양된 기분을 정리하러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하다 서울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카페의 본점이 베를린에 있다며 그 곳에 가보기로 한다.
미술관과 카페가 꽤 거리가 멀다. 서둘러야겠다.
지하철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걷는다. 베를린은 을씨년스러운 귀신의 집에 힙한 디제이 음악을 틀어놓은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으스스하고 메마른 것 같은 거리풍경 사이로, 갑자기 어디선가 멋쟁이들이 툭 하고 튀어나오고 절대 카페라고는 없을 것 같은 장소에 떡하니 세상 제일 힙한 카페가 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걷다가, 과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경계에 있던 연합군과 소련군의 검문소라는 체크포인트 찰리를 지났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곳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지금 이렇게나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인파 속, 어디가 검문소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념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과거 이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생과 사를 갈랐겠는가.
한껏 꾸민 관광객들 속에 떡하니 놓인 검문소를 보며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누군가 와서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사진을 찍는 날이 오기는 할까.
걷고 또 걷던 우리는, 리스본에서 타 보고 너무 좋았다고 자랑한 전동킥보드를 타보기로 했다.
발이 너무 아프다며, 보도블럭이 이렇게나 깔끔하게 정리된 베를린이야말로 전동킥보드를 타기에 딱이라고 j를 설득한 결과다.
바람을 가르며 킥보드를 타니, 카페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어둑한 밤이 나렸다.
이놈의 도시, 정말이지 대단하다. 아니 5시에도 밤이 온다고?
어렵게 도착한 카페 보난자에 들어섰다.
분명 밖의 풍경 속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내부는 어찌나 번쩍번쩍한지 인테리어도 예쁘고 사람도 많아 발디딜 틈이 없다.
학교와 한남동이 가깝단 핑계로, mtl이라는 서울의 카페를 얼마나 많이 들렀었는지를 생각하면 새삼 출세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분점에서만 먹던 커피 맛이 본점은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이나 가?
솔직히 한국이랑 맛 차이 거의 없다.
추억이 있어서 그런지 한국이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친절한 직원들과, 기분좋게 매끄러운 음악과 무엇보다 내 앞에 앉아 무슨 말을 하든 크게 웃어주고, 그만큼 나를 웃겨주는 j와 있으니 더 바랄 건 없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것만 같다며,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길, j에게 오늘은 한식이 먹고 싶으니 한국에서 가져온 강된장 보리밥과 미역국 컵밥을 뜯지 않으면 자는 내내 괴롭히겠다고 겁박하여 한식을 먹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숙소에 돌아와 미리 사 둔 소고기를 굽고 한식을 먹으며 와인까지 곁들여 마신 후 여느 때와 같이 소설 읽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j는 오늘도 자고 일어날테니 10시에 깨워달라고 한다.
'야 일어나. 그만 자 나 심심해.'
웬일인지 오늘은 j가 먼저 눈을 뜬 모양새다.
어젯밤 늦게까지 소설책을 읽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든 탓인지, 눈 뜨기가 정말로 쉽지 않다.
남은 여행 일정을 위해 여기까지만 보고 자야지, 여기까지만 봐야지를 반복하길 여러번,
결국 소설 한 권을 다 읽고서야 잠에 들었다.
퉁퉁 부은 채로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조차 하고 싶지 않아, j가 새로 산 모헤어 니트 목도리를 빼앗아 둘렀다.
그 사이 이미 준비를 마친 j는 숙소 근처 유명 베이글 집이 있다며, 걸어서 7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먹고 가지 않겠냐고 한다.
그렇게 숙소 근처에 위치한 한 베이글 집에 들러 늦은 아침을 먹는다.
입과 옷에 묻혀가며 베이글과 함께 한 게걸스러운 아침을 먹었다. 맛이 정말로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니, 곧바로 친구에게 연락이 온다.
'너 간 베이글 집 혹시 어디 아니니?'
야 성공이다. 여기 유명 맛집 맞나 보다.
어제의 전시가 정말로 좋았던 탓에, j와 나는 오늘도 새로운 미술관에 가보기로 했다. C/O라는 미술관인데, s는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ren hang'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을 때부터, 작품이 범상치 않을 것임은 알았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압도적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전시였다.
'다른 사람들이 중국인을 성기가 없는 로봇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면 한다.'는 작가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전시장 곳곳에 인간의 신체를 이용한 각종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도산의 탬버린즈 같은 상업제품을 파는 샵만 가도 이와 비슷한 화보를 쉽게 만날 수 있지만,
몇년 전 전시를 보았던 나로서는 충격적이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이 이런 나를 검열한다면, 나는 더욱 나답게 세상을 표현하겠다'는 그의 말이었다.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미술관을 빠져 나와, j와 어떻게 찍히는 지도 알 수 없는 스티커사진을 기념으로 남겼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사야 한다.
첫 번째 타자는 엄마다.
엄마를 위해 취직기념으로 명품 가방이라는 것을 하나 사가고 싶어, 카데베 백화점에 들러 루이비통 가방을 하나 샀다.
사는 과정에서 어찌나 문제가 많던지, 한국에서 가져온 체크카드의 결제 한도가 풀리지 않아 잔액이 멀쩡히 있음에도 물건을 살 수 없어 정말이지 성질이 났다.
얼른 가방 사고 돌아가 저녁이라도 근사한 곳에서 먹고 자고 싶은데, 시티은행 왜 안도와주냐?
옆에서 벅벅 성질을 내고 있으니 j가 한국 카드사로 직접 전화해 해결하라고 한다.
그게 쉬우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여긴 베를린인데 어떻게 전화를 하냐고 국제전화로 애초에 콜센터 전화가 되기는 하...한가 보다.
j는 침착한 어투로 자신의 전화를 이용, 카드사에 전화도 시켜주고(그렇다. 나는 한국에서 넘어올 때 한국 통신사와의 계약을 일시정지해버렸다) 나로 하여금 엄마 선물도 못 사가는 불효녀가 되는 것도 방지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산 선물들을 숙소에 두고 나와, 우리는 밤의 베를린을 즐겨보자며 s가 추천해준 라멘을 먹으러 나선다.
거리의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을 밝힌 닫힌 상점을 바라보는 것도 그 끝에 사람이 장사진으로 늘어서 있는 라멘가게에서 라멘에 교자까지 시켜먹은 것도 모두, 너무나 좋았다.
이 여행,
아직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