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간의 대학원 졸업기념 유럽여행 8
'언니, 뭐해? 지금 술 안먹으려고 그러는거야?
왜 이래? 빼면 안돼. 우리 그런거 없어. 얼른 마셔. 오늘도 취해야 되니까.'
밝히자면, 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자리의 왁자지껄함을 즐기지 않고, 술을 잘 못마시기 때문이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니, 술을 즐길 이유가 없다. 유럽에 와서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마셔도 밥 먹을 때 맥주 한 잔을 시켜 반 정도를 마신 후 남긴게 다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고 하면,
리스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우버이츠로 배달음식만 섭취하며 잠만자던 어느 때,
가성비병이라는 것이 나를 찾아왔다.
'비싼 비행기표에, 비싼 돈을 들여 잠만 자려고 온게 아닌데...
아무리 베를린을 갈 예정이라도 그렇지
나 혹시 좀 이상한 애 아닌가?
이거 좀 잘못된건가?'
그래서 글을 올려보기로 했다.
나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안녕하세요.
오늘 밤 리스본 어느 맥주집에서 맥주 한 잔 하실 분을 찾아요.
저희 동네에 있는 힙한 펍인데, 한잔하면서 수다떨고 싶네요.
전 여자고, 꼭 여자분이셨으면 좋겠고, 나이도 좀 있으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나 까다로운 조건이라니.
프로필 사진을 보고 젊어보이면 답도 안해야지. 20대면 절대 대답도 하지 않겠어. 마음 먹었어.
그리고, 어차피 이 비수기에, 여기 누가 있겠어. 여기가 파리나 런던도 아닌데, 나같은 놈팽이가 또 있겠어?
난 최선을 다했다. 나 이자식 아주 능동적이고, 진취적이야.
답 없으면 냉큼 다시 자야지.
했는데, 왔다.
그것도 무려 두 명이나.
아니...왜 왔어요?
애초에 왜 여기 있어요?
그리고 내가 누구일줄 알고 덥썩 맥주를 마시러 왔어요?
그렇다. 내가 이 날 만나게 된 여성은 30대 hs양과 a양으로, 첫 느낌부터가 아주 범상치 않은 작자들이었다.
심지어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둘 모두 버젓한 직업까지 있는 시대의 여성으로, a는 휴가를 써 외국인 남자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하고, hs는 회사를 때려칠지 말지 고민하다 1달 휴가를 써서 포르투갈에 왔다고 한다.
그렇게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한 밤의 맥주가 불러온, 우리의 동행이 시작됐다.
동행인들과 처음으로 향한 곳은, 이전에 홀로 가보았으나 큰 감흥은 얻지 못했던 LX팩토리다.
이번에도 큰 감흥이 없을 것 같아, 그다지 큰 희망은 가지지 않았다.
매일의 감흥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인지, 그 곳에 늘어진 가판대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림을 샀다.
stay stupid, 라고 적힌 그 그림이 늘어진 가판대 주변을 이리 저리 서성거리며 살지 말지 고민하는 나를 hs언니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뭔데? 왜 그러는데? 이거 마음에 들어?"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사지 않겠노라 다짐하던 차였음에도, 돌아가던 발걸음을 돌려세울 정도로 마음에 들만큼 좋았다.
고민하고 있으니, 옆에서 언니가 말한다.
"야, 언니 곧 한국 가는데 그냥 사. 언니가 가지고 갈게. 너 뭐 짐 얼마나 많은데? 언니 가방에 담아. 서울에서 줄게. 걱정하지마."
어제 맥주를 안마셨으면 어쩔 뻔 했나.
난 지금 가지고 온 짐도 버릴 판인데. 이렇게 선뜻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을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만나나.
그리고 그 그림은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지루해지지 않는 기념품이 됐다.
마음에 드는 동행을 구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그렇게 말해버리면, 지금의 이 기분이 날아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가 가져온 사진기가 아주 좋은 것이라고 그리고 내 특기 중 하나가 사진찍기라는 말을 반복하며 사진을 찍었다.
hs언니는 희한한 사람이다.
인간에게 두 쪽의 귀가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쉴새없이 나와 떠들다가도 카메라만 들면 갑자기 포즈를 잡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창피해하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웃으며 깔깔대다가도 포즈를 잡고, 내가 다 찍었다고 할 때까지 계속 포즈를 바꾼다.
다 찍었다고 말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사뭇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곤 하는 것이다.
'이제 내려가자. 너 전망 다 봤어? 너 보고 싶은거 다 봐. 여기는 관광객이랑 현지인 구분이 안되네.'
어버버하면서 도착한 다음 장소는 한 호텔의 루프탑 카페다.
맥주 마시자는 연락에 응답한 사람은 hs와 a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는데(그렇다. 나의 글에 무슨 꿀이 발라져 있었던 것인지 무려 3명이나 연락이 왔다.), 그 중 한명이 이제서야 리스본에 도착한다며 우리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카페를 찾다가 가장 가까워 보이는 아무 곳에나 들어온 것인데, 사람은 없고 풍경은 예쁘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며 긴장한 내 앞에서도 언니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오우, 야 이 여기 왜이렇게 좋니? 이 루프탑 우연히 발견했는데 되게 마음에 든다. 초콜릿 꾸덕한 거 봐. 저기 종 치는 것 같은데 소리 들리니? 저기 풍경좀 봐 예쁘네.'
마침내, y양이 왔다.
그녀는 방학을 맞아 유럽을 여행중이라며, 생물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세비야에서 넘어온 그녀는, 여행도 질리고 유럽 건물들도 다 비슷하다며 여행이 권태롭다고 한다. 아무렇지 않게 미리 시켜둔 초콜릿을 집어 먹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오히려 내가 오늘 처음 온 동행같아 보이는 것이, 별일이다.
곧이어 y양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몇 살이에요? 여기 언제부터 있었어요? 근데, 재밌어요? 와 나 재밌으려고 해. 나 다른 직역의 사람들 만나는 거 좋아해요.'
리스본엔 큰 기대가 없이 온 것이라며, 근데 우리의 만남은 재밌을 것 같다고 하는 그녀와, 이미 그녀와 일심동체가 되어 즐겁게 수다를 떠는 hs를 보며 생각한다.
아주 신기한 동행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신기한 동행인이 와 이제 진짜 기묘해졌구나.
이상한거야, 좋은거야?
일단은, 이 동행인들과 내가 어디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루기로 한다.
hs언니가 나와 김치찌개를 먹으러 가줬기 때문이다.
며칠전 다녀간 아시안마트에 한식당이 있다며, 제발 한식을 먹어달라는 내 요청에 흔쾌히 응한 그녀는, 여전히 불평불만 하나 없이 뭐든지 그러자고만 한다.
와중에도, y는 한식이 싫다며 다른 동행을 구해 저녁을 먹으러 떠났고 말이다.
그리하여 오게 된 와인바.
그 이름은 'by the wine'으로, 친절한 직원들과 갖가지 종류의 맛있는 포르투갈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장소다.
당연히 내가 찾아낸 것은 아니고, 포르투에서 넘어온 hs언니가 와인투어를 하며 귀동냥으로 알아낸 장소라고 한다.
이 때는 몰랐다.
내가 매일 밤 이 곳을 오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거나하게 취해 자꾸만 술을 강권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나는 이 곳에서 hs와 y와 내 글을 늦게나마 보고 연락이 온 또 다른 여성(너무 신기하다, 왜 연락하는거야?)과 넷이서 밤 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며 놀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간 것이 기억나지 않고, 다음날 수도원을 놀러가기로 한 것도 기억나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휴대폰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생각 없이 올린 글 하나로 만난 사람들과의 기묘한 동행이, 다시 시작됐다.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리스본 벨링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인데,
는 개뿔.
제대로 휴일도 검색하지 않고 갔더니 구글 지도는 우리에게 이런 표시를 준다.
'It's closed.'
미안하다며, 머쓱해하는 나와는 달리 hs언니나 y는 아무 불평도 불만도 없다.
오히려 그 주변을 돌아보며 사진이나 찍자고 한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그 뒤편 정원이 예쁘다며.
밝게 웃었지만,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절대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때마침 날씨 운도 어찌나 환상적인지, 하늘에서는 대형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 같은 비가 나리고 있다.
축축 처지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다가 다른 스팟을 찾아가자 하고 길을 다시 나선다.
그러고 향한 곳은 벨렝탑이다.
벨렝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먼 허공에 중세시대 탑이 떡하니 서 있는 관광지로, 수 많은 사람들이 벨렝탑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고 하는데...
비록 작긴 하지만 섬세하고 아름답고 유려하며...
사실 맞다. 바라보기만 해도 너무 고독하고 공허해서 그 주변을 희마리 없이 걸어다니기만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마침내 우리도 쉴 곳을 찾았다.
그 대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동킥보드라는 것으로서, 타기만 해도 나의 비루한 육체를 다른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시키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덕에 잘 닦아놓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드리프트할 수 있게 하여 비 오는 벨렝지구에서 속도감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였고, 더불어 벨렝탑 주변의 잘 빠진 도로를 선사해 준 리스본 시의 행정행위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느끼게 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렝탑?
행복의 열쇠는 전동킥보드에 있다.
많이 놀았으면 이제 먹어야 한다고, 벨렝지구에는 포르투갈 사람이면 다 안다는 유명 에그타르트 가게가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웨이팅을 한 끝에 입장할 수가 있었는데, 맛이야 당연히 유명세만큼이나 좋았다.
시나몬 가루를 뿌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에그타르트에다가 매캐하고 쾌쾌한 맛의 블랙커피를 곁들이면, 비오는 하루의 고독이 씻겨내려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집중된 대상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유럽여행을 떠난 동양인 여행자라면 한 번 쯤은 경험한다는 '안와요, 안와 웨이터'현상에 대한 우리의 걱정이다.
이 현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동양인 주변에 작은 불투명 그림자가 드리운 것 마냥 웨이터가 우리 쪽으로는 주문을 받으러도 오지 않고, 계산서를 가져다 주지도 않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가르키는데, 유럽 등지에서 속출한다고 알려진 인공재해에 해당한다.
유럽의 숱한 인종차별을 겪어온 우리로서는, 이 곳에서도 안와요 안와 현상을 또 겪을까 노심초사하기 바빴는데, 그 결과로서 동양인만 앉아 있는 우리 테이블의 주문은 늦게 받고 거스름돈 계산도 틀릴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어찌저찌 주문을 다 받고 거스름돈을 돌려줄 때까지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수도원까지 문을 닫은 마당에 인종차별까지 당하고 싶지 않아 두 눈 크게 뜨고 거스름돈 계산을 하고, 생물선생님 y양에게는 이과머리를 좀 사용해보라며 이차로 계산을 맡기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돈을 돌려줬구나.
리스본은 정직한 곳으로 기억에 남겠다.
비 오는 리스본의 전경을 지난다.
우버를 타고 내리길 반복하며,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 창 밖 풍경을 본다.
이 곳에 내가 왜 왔는지 옆자리에 앉아 나와는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수다를 떠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채로 리스본의 전경을 구경한다.
기분이 정말로, 나쁘지 않다.
내가 우버비를 다 계산하더라도, 이 우버비를 혹시 돌려받지 못하게 될지라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올린 글의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심지어 우리는 리스본 성당 근처의 한 전망대에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됐다.
jk는 내일부터 이어질 리스본 근교여행을 함께 하기로 한 사람인데, 낯가림이라고는 고국을 떠날 때 두고 온 사람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전망대 근처에는 마치 원래부터 이 자리에 존재했던 사람만 같은 악사들이 연거푸 음악 연주에 한창이다.
흐린 날, 들려오는 노래는 구성지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피해주지 않고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 서서 단차가 큰 리스본 시내의 전경을 보고 말이다.
나는 악사에게 동전으로 팁을 주고 싶은데 현금이 거의 없다며 두리번거리고, 언니는 자기가 주겠다며 주머니에서 남은 잔돈을 꺼낸다.
돈까지 줬으니 이제 마음껏 노래를 들을 자격이 생겼다며 그 곳에 앉아 노래를 듣고, 함께 온 그녀들과는 주변 사진을 찍으며 관광객으로서 덕목을 지킨다.
지금부터는 아무런 계획도 없고, 솔직히 무엇을 해도 상관이 없다.
실컷 사진을 찍고 내려가는 길, jk는 리스본에서 유명한 독주를 마시자고 한다. 한 잔에 몇 유로 하지 않는다며, 그걸 마시고 2차로 다른 곳에 가지 않겠느냐는 거다.
그 술이 무엇인지, 어디서 파는지조차 모르는 나로서는 일단 그녀들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멕시코에 데킬라가 있다면, 포르투갈에는 진지냐가 있다.
체리주라고 불리는 포르투갈 전통주로, 한 잔만 마셔도 술에 약한 나같은 사람은 거의 기억을 잃을 정도로 독하다.
리스본 길거리 어드메에서 그렇게 별안간 진지냐를 한 잔 마신 나는,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는지 한잔 더 마시자며, 내가 묵고 있던 숙소로 모두를 끌고 가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동행인을 모은 사람으로서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나보다.
빠에야에 와인을 사들고 가는 길, 관광객이 많이들 머무르는 번화가를 한참이나 벗어난 곳으로 모두를 끌고 가려니 괜히 긴장이 된다. 왜인지 집 앞 골목에 다다르기 전에는 심지어 마약을 파는 젊은 남성들도 줄지어 서 있고, 혼자 갈 때는 가깝게 느껴졌던 집 골목길이 오늘은 유독 더 가파르게만 느껴진다.
이윽고 집에 도착해 다시 한번 만취해버리는 저녁을 보냈다.
얼마나 술을 많이 먹었는지, 이 날 역시 내가 어떻게 복층으로 올라가 잠에 들었는지, 그 와중에 세수는 언제 하고 잔 것인지에 대한 기억도 '물론'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 기묘하고도 왁자지껄한 밤이, 싫지는 않다.
자고 일어나도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면 좋겠고 말이다.
내일은 팔자에도 없는 리스본 근교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춰 나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밤의 기억을 붙잡고 쓴다.
새로운 사람들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상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내일도 얼른 일어나 그 신비함을 구경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