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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Jun 24. 2022

리스본에서 만나요. 산책하다, 낮잠자며 기다릴테니

40일간의 대학원 졸업기념 유럽여행7

엄마, 내가 말했나?

이번주는 쉬는 주간이야 나.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쉴거야.

관광지도 박물관도 안갈거야.

엄마 딸 신라면 끓여먹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베를린 갈게.

오고야 말았다.

g가 리스본을 떠나는 날이 말이다.

떠나는 날이 되니 더욱 부산스러워진 그녀를 두고, 점심이나 먹겠다며 홀로 밖으로 나왔다.


난 리스본에 왜 왔을까?

포르투갈을 잘 알아서 온 것도 아니고,

포르투갈로의 여정을 동경한 것도 아닌데


몰라서 왔다.

정말 잘 모르고, 해가 드는 밝은 도시라고 해서.

그러니 지금부터는 g가 떠난 이 곳에 나 홀로 남아 내가 왜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나의 이유가 될 터다.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G는 한국에 돌아가기 위한 채비에 한창이다.

나는 그 옆에 삐딱하게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뭐가 저리 좋은지, 짐을 싸는 몸놀림이 아주 가벼워 보인다.

사실 나도 이렇게 늦장부릴 여유는 없다.

G의 한국행에 맞춰, 새로운 숙소로 체크인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짐 다 때려넣고 가방만 닫을 건데 뭐, 하면서 늦장을 부리다 나오니 택시아저씨는 숙소가 너무 높은 언덕에 위치에 있다며 끝까지 데려다주기는 어렵다고 한다.


망했네. 내 캐리어 어쩌지?

첩첩산중이다.

망연자실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g는 정신을 차리라며 자기가 있을 때 짐을 다 올려버리라고 한다.

굽이굽이 진 도로를 따라 마침내 숙소 계단을 오르고 나니, 숨도 차고 덥기도 하다.


새로운 숙소의 아래층에는 친절한 노부부가 사시는 것 같다.

나를 보더니 엄청나게 밝은 미소로 말을 시키신다.

포르투갈어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게 만나서 반갑다는 뜻임은 본능으로 알았다.

그래서 나도, 아는 유일한 단어로 인사를 건넨다.

오브리가도.


그 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위이이이이잉. 지지지지지지이이잉.'


뭐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사방을 둘러본다.

찰나에, 복층 창문에 붙은 벌이 보인다.

진짜 어떡하냐고...벌을 그것도 이 좁은 다락방에서 어떻게 잡냐고...


그 때, g가 말한다.

'언니, 나와.'


저벅저벅, 2층으로 올라간 g는 금세 창문을 열고 벌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작은 두루마리 휴지 하나로 그 어려운 걸 해내다니.

잘가. 그리울거야 정말로.

다시, 혼자가 되었다.


허한 마음을 달래고 주변을 둘러보니, 새로 고른 숙소가 마음에 차는 건 큰 행복이다.

아늑한 복층이 있는 주택인데, 화장실도 깔끔하고 식탁에 소파 식기도구까지 모두 구비가 되어 있다.

무엇보다, 부엌 발코니에서 보이는 리스본 시내 풍경이 압도적인 것이 한 몫을 한다.

한눈에, 리스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고저 차이가 얼마나 큰 도시인지를 알게 해준다.

하는 찰나, 생각하게 된다.

아! 여기서 이렇게 여유부릴 시간이 없다.

쉬러 온 일주일동안 먹을 장을 봐야 하는데.


오늘의 목적지는, 리스본에서 가장 큰 아시아마트다.이미 지칠대로 지친 다른 나라 음식 말고, 당분간은 한국음식이 먹고 싶어 선택한 결정이다.

결국 택시비를 2만원이나 내고 아시아마트에 당도한 나다.


한국 야채에 반찬, 쌈장, 간장부터 한국식 레토르트 식품과 라면을 쓸어담는다.

가만? 그런데 김치는 어딨지? 다들 김치는 한 팩씩 담은 것 같은데 왜 안보이지?

그 때 묘수를 썼다. 계산대 앞에 서서 김치를 들고 오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where did you find this one?


그러니 옆에서 직원이 답한다.

hey, it's just behind your back.


아 진작 직원에게 물어볼걸. 나는 바보다.

머쓱해진 나는 머쓱해진 김에 김치를 꼭 샀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받기라도 한 것처럼 김치를 많이 샀다.

돼지고기에 볶아먹을 깍두기까지 샀다. 이 정도면 한국에도 들고가야 할 정도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와 신라면에 깍두기를 곁들여 저녁을 먹는다.

아, 오늘 밤은 참 맛이 좋아.

다음날, g가 없어진 나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11시쯤 일어나 밖을 보다, 헐레벌떡 달려 약속장소로 향한다.


오늘은 리스본에서 구한 동행과의 만남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랬던 것 같기도 하다.

막상 누우니 일어나기 싫고, 좀 더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별 수 없지. 조르주 성을 보러 가기로 했으니까.

어색하게 건넨 인사를 시작으로, 기묘한 조르주 성까지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회사로의 이직 전, 리스본으로 여행을 떠나왔다는 그녀는 여행 자체를 원했다기 보다는 한국에서 잠시 떠나있고 싶었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천천히 조르주 성이 준다는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끊임없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리스본의 작열하는 햇살이, 마치 조금만 더 참고 오르면 정말로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소문만큼 풍경은 아름답고, 우리는 말이 없다.

중세시대 모습위로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느낌의 성을 바라보다, 내려오는 길.

나는 말을 건넸다.


식사 하고 가실래요?

결국 리스본의 명물이라는 '타임아웃 마켓'에 왔다.

백화점 푸드코트처럼 온갖 점포들이 늘어선 먹거리 타운인데, 사람도 많고 가게는 그 사람보다 더 많다.


우리는 요리조리 둘러보다, 줄이 가장 많이 서 있는 부스를 찾아 아무 요리나 시켜먹으며 수다를 떨곤, 각자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 없이 지나간 이틀이었다.

조르주 성에 다녀온 이후로는 병든 닭마냥 잠을 자다, 해가 지면 집에 있는 음식들을 먹어치우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귀하던지, 이대로 리스본에서 계속 외출하지 않아도 좋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럴 수 없다.

오늘은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다 떨어진 올리브유를 사고 휴대폰 유심칩 기간을 연장하는 것.

야채나 고기를 볶아 먹고, 소파에 누워 유튜브를 보기 위해선 당장 너무나 필수적인 것들이다.


툭툭 털고 일어나 이틀만에 밖으로 나와 장을 봤다.

여행의 모든 순간이 다 좋을 수는 없지만,

어떤 순간은 내 안에 영원히 남는다.

장을 보고,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알았다.

이 순간은 영원할 것이라는 걸.


파도치는 강변을 따라 걸으니,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고, 사람들은 앉아 거리 공연을 구경한다.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걷고 또 걸으며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것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 이 길의 끝이 없기를 바랄 정도로.

그렇게 걸어 걸어 결국 숙소까지 걸어오는 길,

휘영청 달은 밝고 거리에 사람은 별로 없다.

날씨는 이렇게나 좋은데, 다들 어디서 뭘하며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얼른 집에 가서 p에게 전화를 해야지, 오늘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말해줘야지.

리스본에서 또 다른 동행, jy를 만났다.

저번과 같이, 우연히 구한 동행인데 리스본에서는 이틀간 머무른다고 한다.

동갑인데다 웃는 모습이 예뻐 첫 눈에 마음에 들었다.

오늘 왠지 즐거울 것만 같아.

우리는 직장인들이 런치메뉴로 먹는 스시집에서 밥을 먹고, 온 거리를 쏘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미주알 고주알 말하며 리스본을 걷다보니, 다리가 그다지 아프지도 않고 오히려 이 도시가 참 작게만 느껴진다.


나는 지긋지긋한 공부를 막 끝냈노라고, 이 공부의 끝이 이 여행이어서 참 좋다고 하고,

그녀는 지긋지긋한 회사를 막 나왔노라고, 유럽에서의 시간이 너무 좋다고 한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좋은 기분을 주고 싶어, 어제의 그 강가로 그녀를 안내했다.

강을 따라 걷다가, 이 즈음까지 오면 정말 기분이 좋을 거라고.


그녀도 좋다며, 선뜻 함께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강을 따라 걸으며 또 이야기를 나누고, 결국에는 강 앞의 해먹에 앉아 순간을 즐긴다.

강에 낀 이끼에서는 물에 젖은 풀 내음이 풍겨오고, 강 근처 어드메에서는 사람들이 피우는 마리화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들을 다 붙잡고, 커피를 시켜 마시면서 생각했다.

무엇을 찾아 리스본에 온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당연히 오늘을, 지금을 보내기 위해 여기 있어야 하는 거였다고.

리스본에 온 이유를 찾았다.

다음 날, 일어나니 벌써 저녁이다.

밤새 티비를 보고, 영화를 보다 동네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을 들으며 끊임없이 쏘다니다 잠에 들어 그런지, 일어나니 너무 어두워 아직도 꿈 속인줄만 알았다.


jy가 시간되면 오늘도 보자고 했는데, 개뿔 늦잠자다 그냥 보내게 생겼다.

결국 동네에서 가보고 싶었던 피자집으로 향한다.

가게에는 화덕피자를 구우는 연기 냄새가 진동을 하고, 나는 내 앞에 앉은 아기가 내는 옹알이 소리를 작게 따라하고 있다.


하, 피자까지 너무 맛있네 진짜.

g가 리스본을 떠나기 전,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리스본에도 서울의 성수, 합정과 같은 동네가 있다고.

뭐? 그런 곳이 있다고?

가야지. 안가볼 수 없지.

오늘은 그 LX 팩토리에 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바지런히 삼겹살을 구워먹겠다며, 돼지고기에 붙은 뼈를 낑낑거리며 제거하고는(우리나라 정육기술은 세계 최고다. 어떻게 뼈를 제거하니 먹을게 없어?) 양파에 마늘까지 볶아먹고 밖으로 나섰다.


뭔가 힙한 동네가 보이는 것도 같고, 그냥 아기자기한 마을 같기도 하다.

근데 동네는 힙한데 사람은 없네?

역시 도시의 시끌벅적함으로는 서울을 이길 데가 없다고 혀를 찼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대신 이번에는 걸어서 숙소까지 가보기에 도전한다.

아니 근데요?

걸어오는 길이 더 예쁜 것 같은데요?

철길을 따라 끊임없이 걷고 또 걸으니,

우버 안에서는 보지 못했을 풍경을 담게 된다.


분명 구글지도에서는 1시간이면 집이라고 했는데, 1시간 30분 넘게 걸어도 집까지 2/3밖에 오지 않은 것 같다.


아마 두리번거리며 주변 사진을 찍으니, 시간이 지체된 것일 테지.

모든 것이 노란 리스본에는, 광고까지 노란색으로 가득하다.

그러고보니 내 신발도.

이 낡으면서도 고즈넉하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도시를 어떡하면 좋지?

여행은 그런 것이다.

안 좋아! 하면, 이내 좋고

내가 여기 왜 왔지? 하면 당연히 왔어야지 한다.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침대에만 있고 싶은 나를 끝내 밖으로 나오게 만든다.


모두 리스본에서 만나요.

산책하다, 낮잠 자며 기다릴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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