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트서퍼 May 16. 2022

포르투갈의 마법, 향수병을 치료하네

40일간의 대학원 졸업기념 유럽여행 6

응 엄마 나 집에 갈래. 호텔 다 취소할래.

그냥 다 싫어.

유럽 질려. 한식 먹고 싶어. 건물들 다 비슷해. 이제 집에서 푹 쉬면서 나 잠이나 자고 싶어.


그러니까 이것은 파리를 떠나 포르투로 향하며 시작된 이야기다.

"언니, 일어나.

우리 오늘 포르투갈 가야돼.

오늘 포르투 가기로 했잖아. 빨리 눈 떠."

g가 아침부터 성화다.

일어나야 되는데 알고는 있는데...

눈을 뜰 수가 없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뒤로 한 채 포르투로 떠나는 오늘, 비까지 와서 그런가 유난히 몸이 무겁다.

최후통첩이라는 듯 g의 말이 이어진다.

"언니, 11시 넘으면 요금 문다고 하는데. 그래도 좋아?"


벌떡.

정신 없이 일어나 짐을 챙긴다.

장기여행을 시작하면 깨닫게 된다.

캐리어는 말 그대로 짐을 쑤셔넣을 공간이어서 캐리어인 것이다. 한국에서부터 숙지해 온 정리법같은 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


최대한 늦게까지 누워 있겠다며 농성을 부리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넣어버린 후 포르투갈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한다.


"우리 일단 맥도날드 좀 먹자.

도저히 당이 떨어져서 뭐가 안돼."

g는 아침 먹는 것은 대찬성이라며 얼른 사먹자고 한다.


이상한 기분.

공항에 들어서면서부터 사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이상하고도 공포스러운 코로나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검역대를 통과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나야 입사가 한참 남았다 쳐도, g는 돌아가자마자 입사인데, 우리 여기서 고립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도 우리를 잡지 않고, 아무도 우리를 핍박하지는 않는다.

물론 어디의 누군가야 우리를 힐끗 바라보고 있을성 싶지만은,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나와 g에게 직접적인 위해만 끼치지 않는다면야, 이제 애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 파리를 행복하게 떠나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티비에서는 브렉시트가 통과되어 영국이 EU를 탈퇴했다는 속보가 한창이다.

우리는 공항 한켠에 앉아 새로운 나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며, 나조차도 한 번 가보지 못한 나라로의 출발이 어떨지 몰라 무서워했다.


그렇게 우리는 포르투갈 여행의 첫 번째 도시, 작고 조용한 도시 포르투에 내렸다.

"언니 여기 어디야?

우리 숙소 도대체 어디야?

나 도저히 못 찾겠어. 전화 한 번 해봐."


무사히 공항에 내렸다, 포르투는 작은 도시다 싶어 크게 걱정하지 않았건만.

우버 기사아저씨가 내려준 자리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가 예약한 숙소의 주소가 보이지 않는다.


비도 오고, 이미 힘든 우리는 짜증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데 확인하는 주소마다 연신 헛발질이다.


결국 연결된 통화 끝, 코 앞에 두고도 찾지 못한 숙소의 문이 열렸다.

숙소 리셉션 담당자는 우리의 짐을 보며 묻는다.

"It's gonna be hard. There is no elevator."


알고 있다. 이 대단한 유럽 어디에도 숙소에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이 없었으니, 당연히 26인치 캐리어를 들고 올라갈 것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역시나 하는 슬픔으로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른다.

도대체 이놈의 유럽 건물 계단들은 폭도 왜 이렇게나 좁은 것인지 정말 황망하기가 그지없다.


힘겹게 올라간 숙소가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오늘의 작은 위안이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뭐 하나 낑낑대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짐은 무겁고, 비는 내리는데.

떠나려 하니 괜히 파리는 아쉽고, 포르투갈을 괜히 온 건가? 싶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하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옛말은 틀린게 하나 없다.

너무 배가 고팠던 나는, 포르투의 한 식당에서 보이는 메뉴 중 괜찮아 보이는 것을 아무거나 시켜 먹으며 그런 말을 했다.


"어우, 이거 무슨 맛이야? 야 이거 맛있는 거야 맛 없는 거야? 니가 한 번 평가해봐. 여기 구글 평점이 거의 4.7인데."


g가 말한다.

"언니, 여기는 짜. 이 맛은 짠 맛이야."


킥킥킥킥. 웃고 나니 괜시리 이 도시에 온 우리에게 다시 낭만이 깃든 것만 같다.


어디 한 번 힘을 내보자며 g를 데리고 한 카페로 향했다.

난간에 기대면 포르투 전체가 보인다는데, 야경으로 유명한 도시니 얼마나 예쁘겠는가?

겨우겨우 온갖 계단을 올라 도착한 카페에는 걱정이 무색하게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왜 이렇게 한가하지? 원래 이렇게 도시에 사람이 없나?

하는 찰나, 뒤에서 g가 말한다.

"언니, 비와."


돌아보니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분명 계단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작은 물방울이 머리에 떨어지는 정도였는데, 언제부터 이런 비가 내렸던 거지?

충격받은 얼굴로 g를 바라보니, g는 이김에 앉아 밖이나 보다가 가자고 한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에겐 우산이 없는데.

이 비 다 그치면 가자.


창 밖을 내려다보니, 물 안개에 흐려진 세상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인다.

좋게 말하자면 그렇다.


나쁘게 말하자면, 그러니까 오늘 여행은 그른 것 같다.

아무것도 본 게 없는데, 장대비만 내린다. 풍경조차 흐릿해서 눈에 담기 어려운데.


결국 두 손 두 발 나는 말한다.

"야 숙소로 가자. 우리 그냥 일찍 자자."

숙소에 도착하기 전, 아무리 불러도 우버가 잡히질 않았다.

이렇게나 비가 오는데, 급하게 우버를 부르는 것이 우리만 있었겠는가.

다른 사람도 다 불렀겠지 싶어 비를 맞고 서 있으니, 괜히 비가 별로 안올 것 같다며 숙소에 우산을 두고 와도 된다고 했던 것이 미안해진다.


비가 정말 너무 많이, 그러니까 비가 정말로 비처럼 내린다.

겨우 잡은 우버를 타니, g가 말한다.

"아 이런 낭만은 남자친구랑 겪어야 하는데. 좀 낭만적이었어 언니. 비 오는 날 같이 맞다가 택시에 타다니 말이야."


낭만이었어? 이게 낭만이야?

낭만이었나 보다. g의 그 말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돌아온 숙소, 우버를 탔으니 우버이츠도 사용해보라며 볶음면을 시켜먹고는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다음날이 밝았다.

포르투에서는 하루만 묵고 바로 리스본으로 향하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제대로 포르투를 구경하지도 못한 채 포르투 중앙역에서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며 자란 나는, 리스본행 열차를 타면 어떤 대단한 낭만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현실은 폭소와 분노의 연속이다.


떠나기 전 커피라도 한 잔 할까 싶어 앉아 있던 카페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우리를 피하는 백인을 만났다.

우리를 힐끔거리며 코로나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는다.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다며, 기분 나쁜 눈빛이라는 g의 말에 욱한 나는 누가 쳐다보냐며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마침내 누구인지 알아낸 시점, 나는 쫄지 않고 째려보기를 시전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째려보면 무섭기로는 일등이다 이거에요.

내 삼백안 맛좀 봐라.


열심히 째려보니, 그 여자도 당황했는지 고개를 돌린다.

g는 옆에서 그러다 위험한 일 당하면 어떡하냐며, 조심하라고 걱정하는 말을 덧붙인다.

혼자였으면 안 그랬을거야, 근데 누가 너를 괴롭게 쳐다봐? 그건 용서 못하지. 내가 너 유럽오라고 꼬신건데.


찝찝하게 도착한 플랫폼, 기차 안에서는 아무도 자기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g와 내가 일찌감치 예약해 둔 좌석번호에 앉아 있기를 몇 십분, 기차는 잘못 앉은 사람들을 서로 밀어내느나 야단법석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잘못된 자리에 앉아 있고, 제대로 된 자리에 앉고 싶은 사람들은 여기가 내 자리 맞다며 화를 낸다.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서 우월감에 젖어 역시 뭐니뭐니 해도 우리가 똑똑은 하다며 한마디씩 거든다.

우리가~어? 대학원 씩이나 졸업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우리 g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나라 일등 대학교를 졸업했단 이 말씀이에요.

우리는 유럽 사람들은 왜 이러나며, 자기 자리를 왜 못 찾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킥킥댔다.


우리도 잘못된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머쓱하게 옆 칸으로 짐을 옮기며, 아무 말도 없는 우리다.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2시간이 걸린다는 표의 설명은, 사실 6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g는 옆에서 풍경이 움직이는 속도가 시속 30km정도 될 것 같다며, 이 정도면 시내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 않았겠냐고 투덜댄다.


"야 그냥 선글라스 끼고 자. 자고 일어나면 리스본이니까."라고 연신 달래던 나조차, 나중에는 너무 연착이 심해 목 끝까지 차오른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와중에 씩씩대던 나는 한국이었으면 지연보상금을 청구했을 거라며, 여기는 그런 법이 없냐고, 외국인에게는 원고적격이 없냐고 물으니 g가 말한다.


"언니 선글라스 끼고 자. 자고 일어나면 리스본이야."


그렇게 도착한 리스본의 밤,

일단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 저녁을 먹고, 전망이 좋다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가자.


자갈이 수놓아진 거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아, 이 도시는 아주 까끌거리는구나.

까끌거리는 도시에서의 둘째날이 밝았다.

그리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향수병이 찾아왔다.


g는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며, 가기 전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마스크를 사서 가야겠다고 말하고 있다.


건성건성 들으며 g 떠날 내일을 생각하니 모든 것에 아무런 흥미도 들지 않는다.


고요히 침대에 누워, 이 자갈이 가득하고 빈티지 필터를 온 풍경에 끼얹은 것만 같은 도시를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야, 나도 집에 갈까? 나 솔직히 런던도 갔고, 파리도 갔고 포르투도 봤는데 그냥 집에 가서 아빠가 해준 오이소박이 먹으면서 쉬고 싶어."


뜻밖의 생떼에 g는 말한다.

"언니 여행 재미없지 지금? 마음대로 해."


그러나 알고 있다.

g와의 지금이 끝나면, 이 때즈음 아무것도 하기 싫을 것 같아 나만의 시간으로 안배한 일주일이 있고, 지금의 이 기회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안 올 절호의 시간이며, 무엇보다 이 고단한 여정의 끝자락에는 나의 그녀 j양이 오랫동안 아껴둔 연차를 꺼내 나를 만나러 베를린으로 온다는 사실을.


아 돌아갈 수가 없구나.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엄마한테 전화를 해 징징대니, 엄마는 그럴거면 돌아오라고 한다.

아빠도 너를 너무 보고 싶어 한다며, 그냥 돌아와서 우리랑 소고기나 먹으러 가자고.


응, 일단 생각해볼게.

g와 함께 나온 숙소 근처에서, 우연히 볕이 잘 드는 카페를 만났다.

g는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

나는 커피에 데니쉬를 시켜 지금을 좀 보내고 싶다고 대답했다.

와...

도시가 뭐 이래?

구 지구인 알파마 지구를 걸으며, 생각한다.

이 도시는 뭐 이렇게나 노랗고 빨갛고 파란 것이냐고.

뭐 이렇게 따뜻하고 시원하고 상쾌한 것이냐고도.

길거리에는 전차가 지나다니고, 도시는 햇살 아래에서 다채로운 색깔을 자랑하며 내게 묻는다.

너, 집에 갈거니?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니?

일단 밥이나 먹고, 진정 좀 하자며 앉은 식당,

잘 차린 밥 한끼에 맥주를 곁들여 마시며 이 도시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포기의 마음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 햇살이 밝아서인지, 이 바람이 좋아서인지는 몰라도 얼어붙은 여행에 대한 열정이 녹아내려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은 따로 보내겠다며 도시를 둘러보고 있는 g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야, 리스본 완전 좋아. 언니 너 가고도 혼자 잘 지내볼게."

g가 말한다.

"언니 어디야? 우리 사진찍자. 이리로 와."

그녀를 만나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따로 다니기로 하고 얼떨결에 다시 만난 우리는, 별 말이 없이도 서로의 기분이 좋아졌음을 알았다.


나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바꿔주겠다며 연신 포즈를 잡고, g는 언니 이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것 같다며 웃는다.

이렇게 된 이상, 아껴두었던 원피스도 꺼내입고 사진을 찍어야겠다.

g는 내가 치마입은 모습은 처음 본 것 같다며, 바지 입고 다니기 협회의 장 쯤 되는 줄 알았다는 듯이 놀려댔다.


나는 머쓱해하며 예쁘게 좀 찍어보라고 툴툴대고, 그녀는 자기가 사진 하나는 잘 찍지 않냐며 확인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찍은 사진은 현재까지도 내 휴대폰 사진첩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 있다.

완연히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마지막 저녁을 기념하자며 리스본의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그녀는 비싼 것 다 시켜도 된다며, 본인이 한 턱 쏘겠다고 한다.


그럴 필요 없어, 언니 아까 코스에서 사려던 옷 안샀어.

따로 따로 내자.

그냥 가지마.

그녀는 웃으며 대답이 없다.

회사에 출근은 누가 하겠어? 그래 잘가.

그녀와 함께 후식으로 에그타르트도 먹고, 광장을 지나쳐 걸으며 다시금 생각한다.


포르투갈의 마법, 향수병을 치료하네.

이전 05화 루브르는 재즈, 몽생미셸은 바람 그리고 파리는 이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