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트서퍼 Aug 29. 2022

이번 내리실 역은 베를린입니다.

with j, 대학원 졸업기념 40일 유럽여행 10

왁자지껄한 공항의 소음이  순간 고요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베를린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쭈그려 앉아 있으려니,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들 속에서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 된다. 도리어 평온하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항공사로 선택한 것은 라이언 에어인데, 기상악화 때문인지 예고 없는 2시간 연착고지를 받았다.

저가항공사인데다, 여행에서 이런 연착은 비일비재한 것이다 보니 이제 쉽게 받아들일만 한데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앉을 자리도 없고, 추울 것이라는 베를린에 대비해 온 옷을 다 껴입은 상태가 되고 보니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못참겠다 싶어, 이어폰을 꼽은 상태로 앉을 자리 사냥에 나섰다. 어차피 지금부터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면 어디 앉아 커피라도 마시고 싶다.


겨우겨우 혼자 온 이점을 발휘하여 작고 좁은 테이블 하나를 건졌다. 거의 만원 돈을 주고 맛 없는 커피를 사 마시고 보니 오히려 이런게 여행이구나 싶다.

한국이었다면 온갖 최저가 검색을 통해 물건을 샀을 것이고, 비싼 커피를 마신다면 최고로 좋은 가게가 어디인지를 검색해서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조건에 쉽게 순응하게 되다니, 바로 이것이 여행이 주는 과업 중 하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때다. 사람들이 왜인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분명 라이언에어는 2시간 연착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유럽의 다른 도시로 향하는 다른 항공사 게이트가 열린 것일까?

휴대폰으로 체크인한 라이언에어 표에는 아무런 변동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 아직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금 게이트 근처로 나선 지금,

아뿔싸! 라이언에어의 베를린행 비행기 게이트 전광판에는 이런 표시가 떠 있다.


'Final Call'.

제길, 욕이 절로 나온다.


2시간 연착도 고지가 없더니, 당겨서 출발한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는구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카페에 둔 짐을 찾으러 전속력으로 달린 후 다시 게이트 쪽으로 달리기를 반복해 겨우 베를린행 라이언에어를 탔다.


이번 비행기에는 빈자리가 단 한자리도 없다.

과장이 아니다. 직접 확인해봤다.

그 중 겨우 잡은 자리를 찾아 앉고 나니, 마침내 코에서 단내가 난다. 그만큼 힘들었을 터일 것이다.


마침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이자, 대학교 재학 시절 한번 밖에 와보지 못했던 도시, 유럽에서 일명 '힙과 쿨'을 뜻하는 도시라는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는 까만 밤이 내린 후다.

그리고 라이언에어가 날 데리고 도착한 공항은 도심과는 먼 쇠네펠트 공항이다. 공항의 규모가 어찌나 작은지, 도대체 여기가 국제공항은 맞나 싶을 정도로 작고, 여기서 숙소가 위치한 티비타워 근처까지는 어떻게 가야할지 답도 없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한 터널로 들어가니 왠지 여기가 역으로 향하는 길은 맞는 것 같은데 에스칼레이터가 없다.

그럴 수가 있나? 이 행정강국 독일에, 그것도 공항 옆 지하철 역에 에스칼레이터가 없다고? 나 잘못 들어왔나?

낑낑대며 용기내 계단을 내려가니, 출구로 나오던 한 사람이 나를 보며 말한다.

'옆에 가면 경사진 길이 있어. 거기로 가라. 캐리어 용 길은 거기야.'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남긴 후, 겨우 역에서 도심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녹초가 된 채로, 베를린에 먼저 도착해 있던 j에게 연락을 보냈다.

'나 너무 힘들어, 알렉산더 플라츠역으로 나 좀 데리러 와주라.'

알렉산더 플라츠역으로 향하는 길, 널찍한 자리에 앉아 이제서야 사진도 찍고, 베를린에 왔음을 실감했다.

저 멀리, j가 보인다.

그녀와 함께 베를린에 오기로 약속한 것이 언제였던가.

리스본에서 한 번, 여행을 그만두고 싶다던 내게 원하면 그래도 좋다고 했던 그녀다.

심지어는 오늘밤 나를 데리러 와줬는데, 그게 얼마나 고맙고 또 반갑던지 j를 보자마자 식은땀이 다 났다.


그녀와 역 근처에 위치한 슈퍼마켓에 들러, 간단하게나마 물과 초콜릿 정도만 산 후 체크인을 했다.


취식이 가능한 호텔인데, 카페나 즐길거리가 많은 미테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와! 숙소 너무 좋다'

싱크대까지 빌트인으로 채워진 아주 특이한 느낌의 레지던스형 호텔이었는데, 한 켠엔 욕조도 있고, 밖이 보이는 탁 트인 창문도 있었다.

이제 정말 베를린이라고, 대학원을 졸업했단 핑계로 떠나온 이 긴 여정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기분이 이상하다.


짐을 풀고 서로가 가져온 옷들을 구경하다, j와 내가 가져온 신발들이 색깔만 다를 뿐 세 켤레 모두 정확히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곤 놀래고 말았다.

너무 오래 친구로 지내서 그런지, 취향마저 비슷해진 걸까?

그 와중에도 색에서는 확실한 차이가 났다.

이렇게나 다르면서도 비슷하다니.

그래? 넌 어떻게 지냈어?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진 않았니?


뚝.

기억이 없다.

그야말로 기절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날 점심 즈음이 되어서야 온 몸이 퉁퉁 부은 채로, 쌀국수를 먹으러 외출할 수 있었다.

이 쌀국수집에는 두 번째 방문이다.

들어가면 수령님 얼굴마냥 사장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어디 육회전문점처럼 '사장 얼굴이 박제된 곳 중 맛집 아닌 곳이 없다'는 진리는 전세계 공통으로 통용되는 말임을 느끼게 한다.

정말 너무나 맛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백종원 아저씨가 가보고 극찬한 하노이 쌀국수집보다 여기가 더 맛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또 너무 오랜 사이라 밥을 먹으면서 그녀와 어떤 말을 해도 킬킬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던 나는 실로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베를린을 선택한 것이,

그리고 그녀와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 크나큰 축복이라 여겼다.

밥을 먹은 후 나는 힙플레이스라면 사족을 못쓰는 조용한 관종답게 온 주변을 힐끔거리며 어떤 카페를 들어갈지 물색했다.

여기도 별로, 저기도 별로, 아 저기 예쁜 곳은 카페가 아니구나 하던 찰나.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외관은 허름하나 내관은 깔끔하게 꾸며진 카페를 찾아 홀린듯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실패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탠딩 바 좌석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거의 기대어 서 있는 느낌으로 그곳에 머물며 나와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친구 이야기, 그녀에게 호감을 표한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내 친구 아무한테도 못준다며 혼자 어떻게 생긴 작자냐며 광분했다)를 나누고 서로의 가족은 잘 지내는지 새롭게 들어간 회사는 어떤지 물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순간을 보냈다.

커피도 마셨으니 이제 돌아다니자며, 주변 샵을 구경하며 쇼핑을 하던 찰나, 엄마들이 싫어하는 브랜드 5위 내에는 들 것 같은 프라이탁에 들르기로 한다.

프라이탁은 버려진 낙하산을 재사용하여 가방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브랜드인데, 그냥 보았을 땐 정말이지 쓰레기(?)처럼 생긴 것들을 무지막지하게 비싼 값에 판다.

그래도 없어서 못살 정도로 인기가 많고, 하나하나 수제로 만드는 것인데다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이다보니 매장엔 너도나도 기웃대며 걸쳐보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물론 나도, j도 그 중 하나다.

j는 프라이탁에서 메신저백을 하나 사고 싶었다며, 이리저리 뒤지기 바쁘다. 그러다 어디서 가방을 하나 찾아왔는데, 생각보다 귀엽고 깨끗해서 괜히 나도 무언가 사보겠다는 욕망의 불을 지피게 됐다.

근데 보수적이기로는 전세계 1등이 아니라 0등쯤 할 것 같은 우리 회사에서 이런 가방이 가당키나 할까?

난 그녀에게 어떠냐며 묻고 또 묻고, 한국에 있는 p에게까지 사고 싶다며 억지를 부린다.

결국 j도 p도 백팩은 사지 말라고 한다.

이내 휴대폰케이스만 하나 사서 돌아가는 길, 숙소 근처의 번화가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이리저리 돌다가 들어간 한 옷가게에서 j는 누가 봐도 예쁜 항공점퍼와 모헤어 소재 목도리를 샀다.

오늘은 그녀의 날인가 보다.

물론 며칠이 지나서는, 너무 마음에 들어 나도 입고 다녔다.

겨울의 베를린에는 어찌나 이리도 밤이 빠르게 찾아오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분임에도 벌써 세상은 어둑해져 이제는 숙소에 돌아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먹을 것은 필요하기에, 독일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 마트나 물건에 빠삭한 그녀를 믿고 주변 대형마트에서 파스타 재료와 소시지 그리고 맥주를 샀다.

낑낑거리며 봉지를 들고 돌아가는 길, 밤하늘 공기는 차지만 이유 없이 정말로 기분이 좋다.


열심히 불을 피우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다.

만든다고 만든 것인데, 파스타가 너무 싱거워 괜히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요리는 좀 하지 않냐며, 니가 설거지하면 된다 큰소리를 쳤건만.

그녀는 불평도 않고 맛있다며 밥을 먹는다. 내일은 사먹어야지, 하고 생각하며 맥주를 마시곤 한국에 연락을 돌렸다.

사실 오늘 내내 목구멍의 가시처럼 걸리는 걱정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연수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10년을 머물렀던 동네에서 방을 뺐고,

연수원에서는 기숙사를 신청도 하지 않은 터라, 새로운 도시에서 터전을 잡고 살기 위해 집과 자동차를 구해야만 했다.

사고 싶은 자동차를 오빠에게 전하니, 부모님은 나같은 장롱면허가 그런 좋은 차를 구매하긴 이르다며 말리기 바쁘고, 한국에서 구하려는 방은 단기임대를 목표로 하다보니 부르는 게 값이다.

옆에서 J는 잠시 자고 일어날테니 10시에 깨워달라고 한다.

잘자네, 하며 바라보다 이내 나도 모든 것을 잠깐 내려놓기로 한다.

한국에서 해야될 고민들은 잠시 시차라는 여유에 미뤄버리자, 엄마와 p가 일어날 시간까지만 놀자고 하면서.


결국 여행의 막바지에 읽으려고 아껴뒀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라는 책을 꺼내들고,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긴다.

읽다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감동적이라며 혼자 원맨쇼를 찍고 있으니 잠을 자던 j가 일어나 나를 보고 대차게 비웃고 있다.

야 아니야, 이 책 얼마나 감동적인데.

응?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잘하자.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자는 교훈이 담긴 필독서라고.


그래, 엄마에게 잘하자.

그래, p에게 잘하자.

그리고 내 곁에서 잠을 자는 j에게도 여행 내내 더욱 잘하자.


결국 엄마에게 연락해 내 운전수준에 맞는 차를 구매하겠다는 답장을 남기고, p가 한국에서 전해준 방들에 대한 의견을 적어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만으로도 왠지 모를 마음이 붕 뜨는 밤,

이상한 베를린의 두 번째 밤이 깊어간다.





이전 09화 A rainy day in Lisbon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