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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Aug 01. 2022

A rainy day in Lisbon

근교여행으로 마무리한 리스본, 대학원 졸업기념 40일 유럽여행9

'오늘 근교여행 꼭 가야하는 거야?

가지말자.

나 숙취 너무 심해. 머리 너무 아파.

오늘도 리스본 근처에서 놀다가 밤에 또 술이나 마시러 가면 안돼?'


철 없는 동생의 말에 언니들은 답이 없다.

평소같았으면 뭐든지 너 원하는대로 하라는 hs언니도,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며 밥이나 먹고 수다만 떨어도 좋겠다는 jk언니도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


근데 리스본 근교가 뭔데? 그게 어딘데?


솔직히 말하자면, 리스본 근교여행을 제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hs언니와 나, y가 함께 만취해 있던 어느 밤,

y는 우리들의 걱정에 불을 지폈다.

'아니...지금 진짜 재밌는데 내일은 재미 없으면 어떻게 해요? 나 새로운 사람 계속 만나고 싶어. 야 글 또 올려봐.'

y는 생물선생님이란 직업에 걸맞게 여행에는 도파민과 엔돌핀 분비가 계속되어야 하는 거라며, 도파민 분비가 여기서 끝이면 어떡하냐고 묻는다.


근데, 글을 올리면 대체 누가 오겠니?

그것도 심지어 리스본 여행도 아니고 근교여행을...

리스본 여행하고 싶지, 근교는 관심도 없지 않을까?


이번에도 또, 있다.

아니 대체 왜 있는거야? 어떻게 있는거야?


jk언니는 무려 나와 같은 과목의 공부를 마치고, 대학원 졸업을 기념하며 살기 위해 여행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우리 어제 좋았잖아 언니.

어젯밤, 거나하게 술에 절여진 채로 집에 돌아가니 얼마나 좋았어?

리스본 근교? 그게 뭔데? 어떻게 해야 안갈 수 있는건데?


그리고 그들은 답이 없다.

이렇게 된 거 우버를 타고 근교여행을 나서야 할 판이다.


결국 네 명이서 돈을 모아 우버를 탔다. 어느 왕가의 여름 별장이 위치한 곳이라며, 신비하고도 화려한 동화 같은 성이 있다는 '신트라의 페냐 성'이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다.

이게 뭐죠?

신비하고 화려하고 동화같은 성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신트라 중앙역에서 내린 우버를 뒤로 하고, 434번 버스를 타고 어느 굽이진 산길을 오르면, 멀미가 너무 심해 자칫하면 아침에 먹었던 크로와상을 다 토할 수도 있겠다는 자각이 들 때 즈음에 페냐 성에 내릴 수 있다.

예쁘고 신비하고 아라비안 나이트의 현존이라는 기대를 했었건만,

현실은 뿌연 빗 속을 걷느라 아름다운 건물은 볼 새가 없다.

힘내서 위를 한 번 쳐다보고, 만듦새와 화려한 색채를 눈에 담아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노력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때, 누군가 크게 폭소를 터뜨린다.

"아니, 대체 이게 뭐야~페냐 성 뭐냐고요. 오늘 비 안온다면서, 구글 왜 우리한테 그짓말 했냐고 하나도 안 이뻐보이잖아."


위태로운 이 분위기 속에서, 누구 하나 불평하면 안될 것 같은 금기를 깨니 저마다 한 마디씩 속 시원한 불평이 이어진다.


"야 여기서 사진좀 찍어봐. 세상에서 내가 제일 고독하게 나오겠다. 너무 웃기다. 페냐 성 구경왔는데, 성은 어디 있냐고 묻겠는데 사람들이?"


근교여행이라며 첼시부츠에 원피스, 베레모까지 쓰고 온 나도 그제서야 다 내려놓았다는 듯이 모자를 벗는다.


비 맞고 걷지 뭐.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제서야 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노랗고, 빨갛고 신비하네. 레고로 만든 것만 같은 모습이네. 예쁘다.


완벽해야 하고, 멋있어야 하며, 최고의 순간을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는다.

그제서야, 페냐 성의 진짜 모습을 본다.

근교 여행도 식후경이라고.

으슬으슬 비도 쏟아지는 이 마당에 밥을 안 먹을 수는 없다.

페냐 성에서 내려와 신트라 번화가의 어느 식당에 들러 시킬 수 있는 메뉴는 죄다 시켜 먹는다.

절대 맛 없을 수 없는 메뉴만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먹을만은 하지만 음식이 전반적으로 너무 짰다.

너무 짜서 맥주를 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을 만큼 말이다.

동화같고 신비로운 곳은 따로 있었다.

이름도 모른 채 언니들과 y를 따라 온 헤갈레이라 성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고 한다.

들어선 입구부터 우리를 반기는 것은 성벽을 가득히 채운 이끼다.

이끼가 자욱한 헤갈레이라를 걷다 보면, 사방을 둘러싼 갖가지의 나무와 꽃이 보이고, 위로는 뾰족하게 첨탑이 솟아 있으면서 아래로는 깊은 땅 끝까지 자욱하게 뻗은 우물을 만날 수 있다.


꽃과 나무에서는 내린 비 덕분인지 깊은 풀 냄새가 났다.

이 곳엔 초록과 빨강과 회색의 자리 밖에는 없다.

꽃은 빨갛고, 풀은 흐드러지게 푸르르고, 첨탑이 드리운 건물은 학부시절 내가 사랑했던 본관 건물을 닮았다.


아! 너무 좋고, 또 좋았다.

사람들이 연신 우물 밑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에도, 그런건 필요 없다며 위를 바라보고 있을 만큼.

물론 나도 우물에서 사진은 찍었다.

밥도 먹었겠다, 비에 쫄딱 젖어 더 무서운 것도 없겠다, 그 이후로 들른 헤갈레이라 성도 너무 좋았던 우리는 조금 더 용기를 내 유럽 최서단에 위치한 절벽인 카보 다 로카를 가보기로 한다.


헤갈레이라에서부터 타고 온 우버 기사는, 여기서 돌아가는 우버를 잡는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며, 관광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테니 리스본으로 돌아갈 때에도 자기 차를 타고 가자고 한다.


온갖 종류의 셈법을 이용해 계산해보고 싶은 마음은 일찌감치 내려놓고, 그가 건넨 제안을 덥썩 베어문다.

아저씨도 그냥 여기 서서, 절벽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실컷 맞고 우리랑 돌아가요.

하며 호기롭게 내렸는데,

정말이지 너무 춥다.

바람이 얼마나 많이 부는지 그냥 서 있기만 하는데도 온 몸에 한기가 드는 것 같다.

유럽의 최서단은 원래 이렇게 추운 거냐며, 도대체 이렇게 춥다는 이야기는 왜 사람들의 후기에 없는 것인지 툴툴대기에 바빴다.

고독한 마음으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니,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레코딩된 소리도 아니고, 무려 진짜 악사의 진짜 연주다.

음악이란 바닷가에 부는 바람마저도 물들인다.

세차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서정적인 노래를 들으니 새삼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cabo da loca에 왔음을 실감한다.

바닷 바람이 실어나르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y와 절벽 근처 끝 없이 이어진 잔디밭을 걸었다.

왜인지 피아노 소리는 이렇게나 선명하게 귓가를 울리는데,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나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기분이다.

고요한 절벽 근처를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또 걷는다.


어디서 저런 체력을 끄집어냈는지, hs언니와 jk언니는 이미 절벽의 저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나와 y는 아예 저 곳으로 내려갈 생각이 없고 말이다.

기도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볼 때, 덩달아 함께 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돌아가기 전 잠시 십자가 아래에 멈춰, 가족과 p 그리고 내 건강을, 우리의 계속된 행복을 염원했다.


물론 대학원 자격시험 합격도 빌었고 말이다.

근교여행을 끝냈으니 이제는 놀아야 한다.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by the wine'에 들러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옷까지 갈아입고, y에겐 같은 숙소에서 만난 다른 나이 많은 언니까지 모시고 오라는 지령을 내렸다.


모두 모여 팔자에도 없는 비싼 안주를 시켜놓고 또 다시 수다를 떤다.

직원들은 우리 얼굴을 보자마자, 너네 또 왔냐는 듯한 표정이다.

리스본에 여행 와 술만 마시다가 가는 거냐는 듯이.

하지만 우리만큼 매너 좋은 손님이 또 없고, 우리는 비싼 안주와 비싼 술을 마신 후 넉넉한 팁을 주고는 쉽게 취해 금새 사라지기 때문에 갈 때마다 가장 좋은 자리를 받았다.


술집에서는 어떤 여성의 파티가 열린 것 같다. 얼마나 옆 테이블이 시끄러운지 동방의 예의바른 손님인 우리들조차 인내심이 극한에 다다를 정도다.

그러던 와중 옆 테이블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와 말을 시킨다.

너네 누구냐고. 어디서 온 것이냐고.

우리도 묻는다. 니네는 뭐니? 왜 이렇게 거나하게 시끄러워요?

옆 테이블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한 중년 여성이 말한다. 자신은 항공사의 직원으로 몇십년간 일을 했고, 오늘은 그런 자신의 생일이자 퇴직 기념 파티라고.


퇴직이요? 생일이요?

아...더욱 시끄러우소서.

나는 아예 생일을 축하한다며, 노래를 불러주고 사진까지 남겼다.

이날, 우리까지 시끄러우니 직원들이 일하기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옆에서 언니들은 시끄러울 때마다, 일행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라고 한다.

한국 망신을 더 이상은 시킬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여긴 이제 안와야겠어 언니.

다른 곳 물색하자.


정말이지 술에 정신을 담근 듯 많이 마신 밤,

내일이 출국인 hs언니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본인도 술에 어지간히 취한 것 같은데, 어른인 척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대로 헤어지면 언제볼지 기약이 없는 우리는 헤어지기 아쉬워 집 앞을 부러 천천히 걸었다.

결국 우리는 리스본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집 앞 돌담에 앉아, 남은 주제가 없어질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어스름한 새벽이 오도록 말이다.

결국, 날이 밝았다.

리스본을 떠나는 날이 말이다.

마지막이라고 리스본을 머물며 내가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던 장소들을 다시 찾아가봤다.


코메르시우 광장, 그 옆 강변, 집 근처 에그타르트 가게와 쇼핑몰로 가는 언덕길들을 눈에 담고 또 담는다.

리스본에 머물기를 완전히 결정하고부터는, 내내 날이 흐렸다.

이제 머물기로 했으니, 햇살이 아닌 비도 뿌려주겠다는 듯이.

나는 쨍한 햇살이 드는 리스본이 좋아 머물기로 했으면서도, 비가 오는 리스본도 결국은 사랑했다.


그런데 너털웃음이 나올 정도로 신기한 것은, 돌아가는 날이 되니 이윽고 해가 떴다는 점이다.

캐리어를 끌고 터덜터덜 공항가는 길, 도심에서 멀어질 수록 오히려 해는 높게 뜬다.

마침내 리스본 공항에 도착하니,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기줄이 정말이지 장사진이다.

마치 리스본 사람들은 베를린으로 모이기로 했다는 모종의 지시가 있었던 것 같다.

맥도날드는 물론이고 간이의자에도 앉을 자리가 없어, 다 포기하고서 땅바닥에 앉아 공항대기의 시간을 보냈다.

정말 힘든 순간에 읽기 위해 아껴둔, '여행의 이유'라는 책도 꺼냈고 말이다.

리스본과 달리 베를린은 바람이 매섭다고 하여, 니트에 왁스자켓까지 껴입은 상태로 앉아 있으려니 정말이지 고역 그 자체다.

심지어 베를린행 비행기는 연착으로 2시간이 지나서야 출발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예상 없이 정차한 리스본행 여정에서의 추억은 지금을 견디게 만든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나를 만나기 위해 소중한 연차를 쓰고 바다를 건너온 J를 마침내 만날 수 있다.


바람이 부는 베를린으로 갑니다.

리스본 햇살 아래에서의 추억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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