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떠나는 걸까, 떠나온 걸까. 대학원 졸업기념 40일 유럽여행 12
머리를 묶었다.
근데 어쩌라고 싶기도 하지만, 단발로 떠나온 한국에서부터 한달 반이 지나 벌써 머리를 묶게 된 것이 퍽 신기하다.
밤새 p에게 남긴 연락에는 이런 답장이 와 있다.
'너무 많이 샀다고 자책하지마. 많은 걸 산만큼 많은 걸 버리는 여행이었어.'
많이 버리는 것이, 많이 사는 것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을 두고 가는 여행임은 맞았다.
여행을 오기 전 치고 온 대학원 졸업 자격시험을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버렸고,
서울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잊었고,
오랜 시간 계속된 공부로 헛된 시간을 쓰면 안된다는 강박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런던에서 시작한 이 여행에서, 시간은 금이고 허투루 보내는 순간은 낭비라는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내 삶에서 이 여행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그러니 괜찮다, 다시 떠나오기 위해 돌아가 또 돈을 모으면 되지.
아침부터 준비하고 나선 곳은 베를린의 유명 서점인 'do you read me?'다.
여행을 마무리할 책을 한 권 정도는 반드시 사오고 싶어서 간 곳이었는데, 지금은 드럼세탁기의 탈수모드를 이기지 못하고 운명해버렸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마음에 들었던 에코백도 사고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영어로 된 시집도 한 권 장만했다.
j에게 유럽에 있는 동안 어디를 들르고 싶냐고 물었다.
j는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가고 싶다며, 거기서 목걸이나 반지를 사고 싶다고 한다.
나는 비비안웨스트우드를 좋아하는 그녀가 좋다.
비비안 이자벨 웨스트우드로 말할 것 같으면, '난 일단 내 맘대로 만들거니까 마음에 들면 사라'는 생각이 담뿍 담긴 옷을 만드는 사람인데, 십 몇년을 지켜본 j역시 남의 눈치보단 본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둘이 딱 들어맞는 것만 같다.
오랜만에 유럽에서 들른 비비안웨스트우드인데, 별로 원하는 제품이 없었나보다. j는 선뜻 사고 싶은 것이 없다며 그만 나가자고 한다.
그 때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맑은 오후의 베를린 거리에 작은 물방울들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탁, 타탁, 타타타탁.
지금 비오는 거야? 예보엔 그런 말 전혀 없었는데?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만 웃고 말았다.
너무나 기분이 상쾌했기 때문일 터다.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는 베를린이라니,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는가.
베를린은 맑아도 늘 비가 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햇빛 사이로 비가 오니 오히려 베를린다운 모습이었다.
비도 다 맞았겠다, 으슬으슬 춥다고 하니 그녀는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카페인 zeit fur brot에 들러 빵이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한 번 간 후로 너무 맛있다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추천한 시나몬 롤 맛집인데, 어느새 너무 유명해져 이제는 앉을 자리도 구하기 힘든 맛집이 됐다.
전세계 공통, 맛있는 곳은 누군가 발견하기 마련인가보다.
카페에 앉아 체력을 비축한 후, 엄마 가방만 사고 끝내 돈이 아깝다며 사지 못했던 내 가방을 사러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어차피 비싼 가방 한 개 정도 구매할 거라면, 그나마 한국보다는 유럽이 쌌고, 일단 출근용 정장도 한 벌밖에 그것도 검은색 한 벌 밖에 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쇼핑하러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미테에서 카데베 백화점으로 가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데다 어제 돌아오는 길 내내 베를린 지하철에 낑겨 멀미를 해서다.
가방사러 그 먼길을 또 돌아갈 기분이 정말로 들지 않는다.
결국 j는 사기로 했으면 사야 되는 것이라며, 어제 셀린느 가방 정말 괜찮았다고 함께 백화점까지 가주겠다고 한다. 무슨 복을 타고나 내 출근가방 사는데 j까지 끼고 가는지, 가는 내내 미안하면서도 니가 아니었다면 안 왔을 것 같다고 연신 고마워했다.
홀린 듯이 셀린느 매장으로 개선장군처럼 걸어가 5분 안에 결제를 완료한 후, 다시 동네로 돌아와 결국 코스에서 남색 양복도 한 벌 구매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잘 입고 다닐 줄 알았다면 한 세벌 사올걸 그랬나싶다.
그리고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j는 베를린에 오면 사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마샬 스피커를 사러 전자제품 몰로 떠나고, 나도 쿠담거리에 들러 카데베 백화점 방문 첫 날 신어본 생로랑 신발을 결국 샀다. 당시 사려고 했지만 사이즈가 없어 못산 것인데, 직원이 쿠담거리에 있는 생로랑에는 니 사이즈가 있으니 살거면 그리로 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 그 때 살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지 않도록 욕망에 충실하기로 한다.
숙소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어디에 갈 것인지 토의하다, 베를린에 왔으니 베를린 돔을 한 번은 보고 가기로 했다.
그래도 베를린인데, 티비타워 앞에서 찍은 사진 하나 없는 것은 좀 민망하지 않냐며.
j는 어딜 가든 상관이 없다고 한다. 다 좋다고.
결국 j가 둘째날 산 점퍼를 뺏어 입고, 새로 산 양복에 신발, 가방까지 다 챙기고는 제대로 관광객 모드로 찍어보겠다며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베를린 돔에 도착하니, 한 쪽 귀퉁이 전부가 공사중이다.
멀쩡한 베를린 돔을 언제쯤 볼 수 있는 것이냐며, 왜 내가 가면 문을 닫고 나머지 한 쪽은 공사중인 것이냐 억울해했다.
사실 알고 있다.
영업시간을 알아보지 않았고, 베를린 돔을 검색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그래도 예쁘고 웅장하다며, 기껏 가져온 디지털카메라로 남겨보겠노라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간 지 30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앙아아아아아악!!! 비 왜이렇게 많이 와?'
'야 어디 숨을 데 없어? 비 잠시만 피하고 있자.'
소리를 지르면서도 나는 새로 산 가방이 비에 젖을까 싶어 꼭 끌어안고 거리를 달렸는데, j는 그런 내가 웃기다며 연신 그 모습만 카메라에 담는다.
그녀에게 멀쩡한 모습을 담는 것은 가짜 우정인가보다.
비에 쫄딱 젖은 생쥐같은 꼴을 찍을 때 그녀는 가장 행복해했다.
결국 관광은 이쯤 하라는 신의 계시가 있는 것 같다며, 그녀는 독일에 왔으니 슈바인학센이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슈바인학센에 맥주까지 곁들여 먹자며, 비오는 거리를 나몰라라 하고 걸어 근처 한 식당에 들렀다.
사람도 별로 없고, 동굴 한 가운데에 지어진 가게 같이, 우리의 대화가 온 식당을 울린다.
웨이터는 무심한 듯 친절하고, 맥주 한 잔에 금방 취한 나는 온 몸이 빨갛게 변하고 나서도 내일이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함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리고 밖에는 어느새 비가 그친 후다.
그녀와 집까지 걸어가는 길, 돌아가면 짐도 싸야 하고 그 무거운 짐을 들고 공항까지 돌아가야 하는데 정말이지 모든 것이 귀찮아 미칠 지경이라며 진상을 부렸다.
그녀는 남은 돈을 다 털어서라도 우버를 타라며, 새벽에 가는데 지하철을 타고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다른 모든 조언은 무시해도, 이런 꿀같은 조언은 무시할 수 없지.
'띠기기디기띡. 띠기디기딕.'
잠깐 눈만 붙인 것 같은데도, 벌써 알림이 울리는 새벽이다.
하, 이제 돌아가야 하는구나.
침대에 누워 그냥 잠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했다.
결국 어기적 거리며 짐을 싸고 우버를 부른다.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처럼, j는 새벽같이 일어나 우버에 오르는 나를 배웅해준다.
바람이 부는 새벽길을 바라보며, 창문 밖 풍경을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비행기에 올라야만 한다.
나는 떠나온 걸까, 떠나가는 걸까.
내가 가는 곳이 집이라면, 내 집은 지금 여기다.
내가 오래 머물렀던 곳이 집이라면,
내 집은 서울도, 고향도 아니다.
집은 어쩌면 내가 있을 때에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가 아닐까.
그렇게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마음으로, 서울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