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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Feb 24. 2022

취업 이후의 삶: 본격 미아

월급이 생겼는데, 왜 그 이후의 삶도 노력해야 되나요?



거창하고 싶지는 않은데 궁금할 때가 있다.


취직 이후의 삶은 목표가 뭘까?

왜 세상이 그건 알려주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때까지, 나에게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좋은 대학에, 웬만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서울이 고향이 아닌 내게 서울은 그랬다.

서울로 간다는 것은 인생의 성취를 의미하고,

멋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서울에 사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역사가 증거다. 입신양명의 뜻을 품은 선비들도 당연한 듯이 한양으로 향하지 않았나.


그래서 나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다니면 삶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했고, 확실해야만 했다.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갔다.


근데? 그 이후에는?

그럴리가.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온 사람들, 큰 생각과 고민 없이 선택한 학과공부(정확히 말하면 큰 생각과 고민을 했더라도 그 때에는 알 수 없었을 테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자취생활


뿌연 먼지 속을 걷는 기분.


누구나 자면서 이불킥하는 기억 하나쯤 있겠지만 나에게는 유독 많았고,

다른 사람한테는 쉽게 따라오는 '것 처럼 보이는'  꿈도 정말로 생기지가 않았다.


아니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선생님.

알아주는 대학 가면 인생 끝이라면서요.

인생...완전 시작이던데요?


대학교에 진학하고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는 성적에 맞추어서 온 학과를 기준으로 빨리 꿈도 정해야 하고(아무도 도움 안줌, 빨리 정할수록 유리)

그 기준이 절대적이 될 확률이 높으며

나한텐 없는 온갖 스펙들이 남들에게는 신기하게도 있고(아니 많고),

나는 여전히 그 상황에도 꿈이 없다는 것이다.


와 너무해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돌파구는 취직이었다.

인생에 목표가 없으니 남들이 가지는 목표를 내 것으로 하자.

이게 '나의' 꿈인지는 모르겠으나

월급을 받고, 신용카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이거다. 이번엔 진짜다.


나는 다시 노력의 쳇바퀴에 섰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정말 각고로 노력했다. 취직하려고 공부를 10년 했다) 월 몇 백만원은 주는 회사에 입사를 했다(물론 정규직은 여전히 아니다. 계약직 공무원이라고 들어는 봤는지).


이번엔 무언가 있을줄 알았지.

9시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야근 후 퇴근을 하면 11시가 찾아온다.

필라테스도 다니고, 가끔 요리도 한다. 집 청소도 양심껏 열심히 하고, 분리수거도 하면서 산다(물론 p가).

주말에는 p와 밥을 먹고 카페도 가며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내겐 그토록 앙망하던 월급도 있고, 심지어는 미래를 약속한 배우자도 있다(그렇다. 그 긴 세월을 버텨줬다).

나름 성실하고 정도에 맞는 인생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엄마조차 전화로 너 이제 뭐 해야 된다, 뭐 공부해야 된다, 어떻게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난 밥도 너무 잘 먹어서 탈이고, 어른의 상징인 커피도 하루 기본 두 잔은 마시며, (내 기준)부의 상징인 거위털 이불도 덮고 자는데 왜일까?


삶에 무한한 허기가 찾아오는 기분.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관찰하며 비슷하게 살아야 할까? 혼란하다 혼란해.

아 부처님 알려주세요. 저 진짜 공부 열심히 했어요. 엄마 말을 잘 듣지는 않았는데...

혹시 제가 넷플릭스 너무 많이 봐서 그런건 아닐까요? 아니면 남 험담을 해서? 불경하게 고기를 너무 많이 먹나요?


생각해 낸 가설1은 다음과 같다.


나의 삶이 언제나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좋은 고등학교를,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교를, 대학교 때는 대학원을, 대학원 때는 취직과 변호사시험을.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대비하는데 이미 도래한 현재를 흥청망청 썼다.

양쪽 주머니에 불안을 가득 채워 다니니 가진 것을 아무리 꺼내봐도 행복하지 않았고

부끄럽지만 지금에 와서 내가 무엇을 정말로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가끔 내가 티비에 출연하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소개할까에 대해서 고민하곤 하는데,

그 때 제일 먼저 튀어나올 것 같은 말도 이것이다.

나, 31세, 여성, 무슨 직업으로 일한다. 이하 직업소개. 끝.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재를 기록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래서 정말로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에는, 내가 돈을 벌기 위해 가지게 된 이 직장 말고 나를 표현할 다른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서.


그것이 내가 취직 이후에 가지게 된 나의 꿈이다.


그러니 일단 현재를 기준으로 쓴다.

나, 31세, 여성, 모닥불 asmr 영상에 집착함. 가습기 틀어놓은 침실에 누워 있을 때 행복함. 샤워할 때 뜨거운 물 끊임 없이 콸콸콸 나올때를 좋아함. 부장님들이 점심에 약속 있다고 미안해하실 때 너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홀로 사무실에서 그릭요거트 시켜먹는 순간을 신봉함. 산미 없는 아메리카노 마실 때 각성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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