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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유영 Oct 31. 2020

퇴사기4. 대리가 경험한 매운맛

처음부터 그렇게 끔찍했던 것은 아니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실증과 일탈에 대한 욕구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큰 프로젝트는 물론 하루의 작은 과업들을 마무리하며 얻는 만족감 또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동력이었기에 회사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대상었다.


평범했던 회사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부서 내 인사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2년 전부터였다. 커리어가 걱정될 정도로 부서원의 업무가 크게 변화다. 기존 팀장이 사업부서로 보직을 변경한 후, 홍보에 대해서는 전무한 총무 팀장이 우리 업무의 중간 컨펌자가 됐다. 이 시기에는 엉망이 된 프로세스로 곤욕을 많이 겪었다. 반년 뒤 나와 함께 홍보팀을 이끌었던 내 사수는 인사 담당자가 됐다. 그리고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맡고 있던 내가 뜬금없이 홍보 업무 전반을 맡게 된 것이다. 이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쪼렙의 대리'에게 새로 주어 업무에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 문제없이 하루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만큼 사회생활의 매운맛을 호되게 경험했던 이 시기.


가장 처음 맛봤던 매운맛은 업무 스케줄을 모두 내가 계획하고, 컨트롤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상사가 업무를 지시하고 일정을 정해주면 그 일을 해내는 것이 전부였던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새롭게 맡게 된 업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었던 내게는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두 번째 매운맛은 사업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며 쉬운 일이 아님을 이미 조금은 경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급급해 홍보는 뒷전인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받고, 일정을 조율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일은 생각보다 더 까다로다. 쪼렙의 대리가 사업부서의 수장들에게 대표님의 지시를 전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거니와, 만족스럽지 못한 진행 상황과 결과물을 대표님을 포함한 모든 컨펌자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상사들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세 번째는 보고에 대한 부담이었다. 책임자가 된 이후 회사의 최고 결정자인 대표님에게 직접 대면 보고를 해야 했다. 순순히 잘 처리됐다 하더라도 그대로 진행하라는 지시가 전부였고, 문제가 발생하면 실제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날카로운 부정의 피드백은 내게 꽂혔다. 


서른 하나, 어쩌면 이 과정은 시킨 일을 곧잘 해내는 대리에게 포상으로 주어진 성장의 촉매제였다. 나 역시 할 줄 아는 일을 왔던 지난 2년보다 불닭볶음면처럼 짜릿했던 이 매운맛 시기(?) 가장 많이 성장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당근보다 채찍이 잦아지면서, 잘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더 잘 해내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나를 잠식해 갔다. 막상 닥친 일은 큰 문제없이 해내고 있었지만, 수 시간 고민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대표님에게 내밀 때마다 나는 늘 부족한 죄인 같았다. 이런 하루가 계속되니 어느새 회사는 도망가고 싶은, 내 영혼을 갉아먹는 곳이 되어 있었다.


퇴사를 말하고 대표님은 그제야 예의상으로나마 그동안의 내 노력에 당근을 주었다. 그동안 잘해왔다. 며 이제야 손발이 겨우 맞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위치가 됐는데 왜 떠나냐. 말하는 대표님에게 왜 그걸 이제야 말해주냐.며 원망하고 싶었다.


매운맛에 온몸과 정신이 혼미해져 길을 잃은 대리는 번아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휴식을 택했다. 것은 곧 포기를 의미했지만 그때는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었다. 그곳을 탈출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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