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래유영 Oct 31. 2020

퇴사기4. 대리가 경험한 매운맛

처음부터 그렇게 끔찍했던 것은 아니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실증과 일탈에 대한 욕구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큰 프로젝트는 물론 하루의 작은 과업들을 마무리하며 얻는 만족감 또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동력이었기에 회사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대상었다.


평범했던 회사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부서 내 인사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2년 전부터였다. 커리어가 걱정될 정도로 부서원의 업무가 크게 변화다. 기존 팀장이 사업부서로 보직을 변경한 후, 홍보에 대해서는 전무한 총무 팀장이 우리 업무의 중간 컨펌자가 됐다. 이 시기에는 엉망이 된 프로세스로 곤욕을 많이 겪었다. 반년 뒤 나와 함께 홍보팀을 이끌었던 내 사수는 인사 담당자가 됐다. 그리고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맡고 있던 내가 뜬금없이 홍보 업무 전반을 맡게 된 것이다. 이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쪼렙의 대리'에게 새로 주어 업무에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 문제없이 하루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만큼 사회생활의 매운맛을 호되게 경험했던 이 시기.


가장 처음 맛봤던 매운맛은 업무 스케줄을 모두 내가 계획하고, 컨트롤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상사가 업무를 지시하고 일정을 정해주면 그 일을 해내는 것이 전부였던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새롭게 맡게 된 업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었던 내게는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두 번째 매운맛은 사업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며 쉬운 일이 아님을 이미 조금은 경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급급해 홍보는 뒷전인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받고, 일정을 조율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일은 생각보다 더 까다로다. 쪼렙의 대리가 사업부서의 수장들에게 대표님의 지시를 전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거니와, 만족스럽지 못한 진행 상황과 결과물을 대표님을 포함한 모든 컨펌자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상사들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세 번째는 보고에 대한 부담이었다. 책임자가 된 이후 회사의 최고 결정자인 대표님에게 직접 대면 보고를 해야 했다. 순순히 잘 처리됐다 하더라도 그대로 진행하라는 지시가 전부였고, 문제가 발생하면 실제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날카로운 부정의 피드백은 내게 꽂혔다. 


서른 하나, 어쩌면 이 과정은 시킨 일을 곧잘 해내는 대리에게 포상으로 주어진 성장의 촉매제였다. 나 역시 할 줄 아는 일을 왔던 지난 2년보다 불닭볶음면처럼 짜릿했던 이 매운맛 시기(?) 가장 많이 성장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당근보다 채찍이 잦아지면서, 잘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더 잘 해내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나를 잠식해 갔다. 막상 닥친 일은 큰 문제없이 해내고 있었지만, 수 시간 고민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대표님에게 내밀 때마다 나는 늘 부족한 죄인 같았다. 이런 하루가 계속되니 어느새 회사는 도망가고 싶은, 내 영혼을 갉아먹는 곳이 되어 있었다.


퇴사를 말하고 대표님은 그제야 예의상으로나마 그동안의 내 노력에 당근을 주었다. 그동안 잘해왔다. 며 이제야 손발이 겨우 맞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위치가 됐는데 왜 떠나냐. 말하는 대표님에게 왜 그걸 이제야 말해주냐.며 원망하고 싶었다.


매운맛에 온몸과 정신이 혼미해져 길을 잃은 대리는 번아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휴식을 택했다. 것은 곧 포기를 의미했지만 그때는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었다. 그곳을 탈출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용기였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기3. 면접을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