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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유영 Nov 19. 2020

어쩌다 사랑하게 된 사람이 가난하다면.

사랑하지만, 그의 가난까지는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사랑하게 된 사람이 가난하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가난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처음 봤을 때 그 사람은 마치 저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 있을 법한 러브러브 행성에서 온 외계인 같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뱉는 달콤한 말들. 내가 만나온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질감의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사탕 발린 말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 속에 녹여진 어쩐지 애잔하면서도 솔직한 진심이 서른을 넘겨 연애와 결혼이 현실임을 충분히 알 법한 나의 이성을 잠시 고장냈다. 그리고 거리낌 없는 감정 표현과 나를 웃게 해주려고 애쓰는 그의 장난들에 녹아 나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오빠가 가진 것은 없지만 널 행복하게 해줄 거야."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얼마나 '가지지 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내 인생에도 못 가져서 당당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서 그 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나보다 못 가진 사람과 사랑을 해본 적도, 양껏 가진 사람과 부족함 없이 연애를 한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가진 게 없어서 못할 연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귀머거리가 되는 것처럼 나 역시 앞에 수식어는 무시한 채로 그저 '널 행복하게 해줄 거야'라는 말만 듣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처음 연애의 시작이 그렇듯 우리 역시 우리만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보낸 달콤한 시는 일로 지친 나를 웃게 만들었고, 정성스레 만든 반찬과 갑작스럽게 준비한 꽃다발은 나를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가 시기 어린 질투를 해 다툼이 벌어질 때도 그저 '아, 이게 살아있는 연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상대방과 그 사람의 가족, 살아온 배경, 현재 가진 것들에 대해서도 하나씩 알게 됐다. 그 사람이 넉넉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도, 애써 독립해 제 몸 하나는 건사할 만큼 벌고 있지만 가족의 가난을 두고 볼 수 없어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사람에게서 느꼈던 겸손함이 어릴 적부터 겪어온 어려움과 곤경을 통해 내성화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에 대한 애틋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 사람이 어렵게 자라왔으며 남들보다 조금 덜 버는 것만큼은 어떤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끼면 충분했고, 서로 의지가 되는 존재로써 함께 하나씩 작은 행복을 쌓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넉넉하지 않은 그가 가족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현실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와 막 연애를 시작한 내가 그와의 미래를 그린다고 가정했을 때 이런 사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끝을 알 수 없는 비극같이 느껴졌다. 


내가 도망 나온 '가난'이란 수렁에 다시 갇히게 될까 두러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가 얼마나 가지지 못했는지 자세히 묻지 못했다.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알게 돼서 느끼게 될 부담감과 거북함이 너무나 큰 나머지 그가 현재 무엇을 가졌으며, 앞으로 무얼 채워나갈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늘 달콤한 말만 해왔던 그가 가족의 일로 앞뒤 설명 없이 가끔 '힘들다'는 말을 내뱉었을 때, 이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무엇 때문에 힘든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더 알게 되면 그 사람의 가난이라는 짐이 내게 곧 옮겨올 것만 같았다. 나 역시 가진 것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닌지, 인간의 치졸하고 한심한 본능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의 가난을 알게 된 후로 신은 그 사람의 가난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나의 진심을 빈번하게 시험에 들게 하곤 했다. 나는 그가 힘들다는 말 다음 무슨 이야기를 할까 두려워했고, 마음속에서는 그와의 미래를 가능한 한 멀리, 아주 멀리 미뤄두었다. 그래서 그가 가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리는 행복한 미래에 명확히 동조하지 못했다. 그를 보며 느끼는 벅찬 감동과 사랑의 감정들이 나의 세속적인 셈하기로 인해 변질되고 퇴색되는 것 같아 괴로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자꾸만 가난한 사람과의 결혼으로 한 평생을 후회로 살았던 엄마의 그림자가 내게 겹쳐 보여 덜컥 겁이 났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의심 혹은 다짐을 이유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그를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난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수반하는 죄책감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가난에 대한 자신의 허용 범위를 확정 짓게 되면 결국 '사랑'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 이 둘 중 하나가 탈각된다. 나의 허용 범위는 어디일까? 가정의 우울한 역사를 연인에게 말하기 어려워 고민하는 친구를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너를 사랑하니까 이해해 줄 거야."라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신 너의 가족이 그 사람에게 짐이 될 거란 부담을 주지는 마."라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3자의 입장에서 했던 말을 돌아보니 나의 허용 범위는 '충분하지 못한 그 사람 하나'까지 였나 보다.


가난한 누군가와의 사랑은 영화나 드라마 속 흔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대부분 해피엔딩을 맞는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에 우리가 더 간절히 바라는 엔딩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현실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가난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사뭇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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