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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골 쥐 뉴욕 구경

내 로망 센트럴 파크 & 비 맞은 생쥐 꼴로 뉴욕 활보기

by 여행하듯 살고
- 시골 쥐 도시 구경 -

화려함에 넋을 놓아
영혼까지 팔려했지만

내 마음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결국 익숙한 그곳
내가 놓고 온 그곳
그 사람들

파랑새를 찾아 멀리
헤매었지만

결국 내가
그 새를 발견한 건
여기 이 시간

돌아 돌아 내 마음 쉬이 놓을 곳
지금 너와 나와 함께 있는 이곳


카풀 짝짓기를 마치자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 진짜 홀로 떠나온 여행을 즐길 테다.

핸드폰 방해금지 모드를 켰다.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말아라.

아니 방해해 봐라, 난 당최 반응을 안 할 거니까.


몸이 가벼워지고는 망설임 없이 걸어서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숙소를 구할 때 제일 먼저 고려한 게 센트럴 파크까지 도보로 가깝냐는 것이었다. 센트럴 파크에서 러닝을 꼭 해보고 말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온 여행이니 말이다. "엄마 그냥 우버타자~" 방해하는 아이들이 없다. "여기만 이렇게 여유롭게 있기는 아깝잖아? 다른데 또 보러 가야지" 재촉하는 남편도 없다. 진짜 내 세상이다.



처음 뉴욕 여행을 할 때는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타임스퀘어, MoMA, 브로드웨이공연, 소호 거리, 리틀 이태리, 9/11 메모리얼 박물관, 월스트리트 황소 등 꼭 봐야 하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나만 느낀 의무감인가? 암튼 그런 의무감을 누가 대체 왜 지워준 건지 몰라도, 어쨌건 받아 든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난 성실한 한국인이니까.


그래서 내 첫 뉴욕 여행은 의무 수행 관광쯤이었다.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구석구석 다녔다. 사람들이 이래서 뉴욕뉴욕 하는구나, 눈이 호강했다. 역시 와 볼만했다. 그런데 그렇게 유명한 곳들을 하나씩 정복하고 다니는데 불편한 감정이 고개를 내민다. 자유의 여신상, MoMA, 타임스퀘어 등은 사람들이 심하게 많았다. 그 자체를 누리는 것보다 사람에 치인다는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다.




그래서 그곳 눈도장 찍고 돌아오면 여행을 했다는 느낌보다는, 맡겨진 임무를 낙오하지 않고 마쳤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이게 내가 원하던 여행일까?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웬만한 유명한 곳을 다 봤으니 또 놓치면 안 되는 곳이 있다고 해서 마지막에 잠깐 들른 곳이 있다. 바로 센트럴 파크.

화려한 빌딩들을 뒤로하고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아직도 나에겐 뉴욕의 제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미국 구석구석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는, 큰 공원들을 가보기 전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서울에서 도시 구경만 하다가 처음 몽촌토성에 갔을 때 신선한 자극을 받았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깊고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 몽촌토성처럼 푸른 잔디와 탁 트인 전망은 기본이고, 울창한 나무들까지 가세해 자연을 완벽하게 보호한 느낌이 든다.


이런 바쁘고 빽빽한 도시에 요렇게 큰 규모의 땅을 신성하게 낭비할 수 있다니, 그들의 여유가 부러웠다. 개발의 유혹이 얼마나 많았을까? 부동산에 해박한 지식이 없는 나에게도 단번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혹을 뿌리치고 자연을 지켜낸 그들의 대담함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뉴욕은 센트럴 파크가 있어서 더 멋있다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후에 센트럴 파크는 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뉴욕에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다. 센트럴 파크. 그곳에서 조깅하는 사람들, 피크닉매트 깔고 종일 누워있는 사람들, 그 일상을 누리는 그들이 부럽다. 아니다, 안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어쩌면 뉴요커들은 너무 바빠서 그렇게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안 될지도 모른다고, 정신 승리를 하려 해 보지만, 여러 이벤트가 연중 끊이지 않는다는 것도 떠오른다. 한 여름밤 언젠가는 필하모닉 야외 공연도 무료로 열린다고도 한다. 솔직히 너무 부럽다.




엄청난 기대를 하고 왔는데도, 이 공원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광대한 어머니품,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어디도 심하게 북적대지 않는다. 이번에 자세히 구석구석 보면서 알게 된 건, 첫인상 보다 더 대단한 공원이었다는 거다. 큰 바위가 꽤 많이 있고, 언덕도 많다. 큰 호수가 중간에 박혀있고, 깊은 산속을 연상시키는 지형과 구불구불 산책코스도 있다. 그래, 정말 4일 내내 여기만 있어도 좋겠다.


흠뻑 들이 마신 숨이 그곳의 공기를 데려와 내 폐를 간지럽힌다. 그 느낌 때문일까, 비행기 놓치까 전전 긍긍하면서 쪼그라들었던 세포들이 보송보송 펴지는 듯한다. 길 찾느라 정신없는데, 아이들 카풀 스케줄 때문에 인도아줌마들이랑 긴장하며 연락하다가 생긴, 목의 묵직함도 풀어져버리고 만다.

센트럴 파크는 남쪽 59번부터 북쪽 110번까지 길게 이어진 공원이다. 중간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도 두 개나 있다. 북쪽에서 걷기 시작해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는데 확 달라지는 풍경들 덕분에 지겹울 틈이 없다. 중간쯤 가니까 아담한 호수가 나오고 저 멀리 성 같은 것도 보인다. 갑자기 어떤 깊은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흐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이 먼저 움직였다.


홀린다는 게 이런 걸까?


세련된 음악 방송을 틀어 놓은 줄 알았다. 무언가를 제대로 건드린, 바람에 흩어지는 소리를 따라가 본 곳에는 첼리스트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깜깜한 다리 밑에서. 보통 실력이 아니다.


난 음악을 잘 모른다. 하지만 전 세계 최고의 공연들을 유튜브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요즘, 난 듣는 귀가 생겼다. 세상에. 너무 쓸쓸하게, 어둑한 다리 밑에서 연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게 깊은 곳을 건드린다. 동양인 여자 연주자 같은데 빤히 쳐다볼 수가 없다. 어두컴컴한 작은 다리 밑에서 숨어서 하듯 하는 연주가 관객을 위한 것인지 본인을 위한 것인지 확신이 없어서 이다.


선율이 너무 매혹적이라 계속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공간은 좁고 협소했으며 어두웠다. 소리에 끌려간 건 맞지만 내가 거기에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게 맞나 모르겠다. 무엇보다 그 음악은 조금 슬픈 듯하여 연주자의 마음을 괜히 내가 훔쳐보는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저 첼리스트는 줄리어드에서 공부하고
한때 날리던 연주다.
저 실력자가 여기서 왜 이렇고 있을까.
대단한 사연이 있음이 틀림없다.
사랑하는 이가 죽음을 맞이한 걸까?
복잡한 가정사로 속세를 떠나고 싶은데
음악을 떠날 보낼 순 없어서일까?

행색이 깔끔하지는 않다.
버스킹을 위해 첼로를 들고 와서
공원에 잠깐 머물다 가는 분위기가 아니다.

사실 그녀는 한때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0.3초 만에 소설이 쓰여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듯했던 내가 멈추어 서서 연주를 감상하면 연주자를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멈추지 못하고 계속 걸어갔다. 진짜 제대로 감상해 보고 싶은데... 잠깐 멈추어 설까?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늦었다. 되 돌아가기에는 타이밍을 놓쳤다. 더 듣고 싶은데. 비디오로도 남기고 싶은데...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예술가를 방해해선 안된다. 근처의 괜한 아이비 사진만 찍었다. 그 사진 덕분에, 잊을 뻔 한 그 정확한 지점을 찾아냈다. 사진이 찍힌 곳의 지도와 시간등 여러 정보들을 알려주는 핸드폰의 첨단 기술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기술에도 불구하고 왜 풀지 못한 슬픔들은 이리 많은지 호기심도 따라온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뒤쪽 East Dr 아래 다리 작은 터널 (빨간원) 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소리에 뭐에 홀린듯 끌려갔다.


저 풍성한 소리는 어쩌면 그냥 슬픈 소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신비함이 서려있는 사람을 마음을 끄는 소리니, 분명 단순한 슬픔은 아니다. 다 해석하지 못할 그 연주를 온전히 즐기지 못한 것이, 글 쓰는 지금까지 다 아쉽다.


다시 그때를 복기하니, 용기 내서 자발적으로 돈 내고 당당히 감상하지 못했던 내 모습에 후회만 커져 간다. 다음 뉴욕여행 목표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건물 뒤 작은 다리 아래서 행해지는 그녀의 연주회를 온전히 즐기는 걸로 정했다.



그래, 나는 혼자 여행 왔다. 벌써 나를 찾은 것 같다. 이런 충만한 느낌이 집에 돌아가서 얼마나 지속될까?


아니, 지금 그런 걱정은 그만.


북쪽에서 쭉쭉 내려와 베데스다 연못에 다다랐다. 한 방울씩 간간이 내리던 빗줄기가 굵어졌다. 후둑후둑 후두두두----- 우리 동네만 여름에 비가 그리 많이 내리는 줄 알았는데 뉴욕에도 여름에 비가 많이 오나?

건물 밑으로 들어가야겠다. 비를 피할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다리가 아팠다. 그리고 좀 여유롭게 앉아서 무엇이라도 쓰고 싶었다. 지금 충만한 기분을, 느낌을, 감사함을. 난 급할 게 없다.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고 어디를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를 찾으러 왔다. 마음이 커다래지고 잔잔한 색깔로 풍성히 채워지고 나면, 내가 찾고 있는 게 찾아질 것 같기도 했다.

센트럴 파크 내 베데스다 연못 앞 건물 아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빗소리 들으며 글 쓰는 시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낭만으로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기엔 너무 굵은 비가 세차게 내린다. 나처럼 비를 피하는 관광객들이 점점 모여든다. 비 오는 장면이 그다지 아름다운지 모르겠으나 관광객들은 사진을 마구 찍어 댄다. 비 오는 호수의 풍경이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관관객들의 셀렘이 그 순간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비에도 불평하지 않고 여행을 즐기는 관광객들 참 여유 있게 느껴진다. 내 마음을 투사한 것일까?


정면에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 아저씨 덕에 비 오는 풍경이 더 아름다웠다.

한참을 앉아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를 아리송 한 글 조각을 모았다. 내 손끝에서 흘러나온 그 글 조각들은 누가 보게 되든 말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나를 즐겁게 했다.

숙소에 짐 풀고 센트럴 파크 한참 걷는데,
예보대로 비가 꽤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추적추적 맞고 걷다가
어느 건물 아래 비를 피하는 중이다.
남편이 전화 와서 수다 떨다가,
오늘 통화한 친구가 출판사에서 계약금 받고,
정해진 기간 동안 글 쓰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좋겠다. 나도 그런 날이 올까?
이 여행이 내 글쓰기 첫 번째 여행으로 기억되길.

그래, 내 이 여행 목적이 러닝이랑 글쓰기인데
나도 뭔가 좀 건질 수 있으면 좋겠다.


러닝과 글쓰기 하며 쉬는 여행을 왔다. 그런데 뉴욕이다 보니, 그냥 쉬려는 게 산책하다 앉아서 글만 쓴다는 게 너무 큰 욕심 같이 느껴진다. 좀 더 걷다가 새로운 걸 만나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러다 비를 만났다.
비 피해 앉아 쉬며 글을 쓰라는 하늘의 뜻일까,




두 시간 정도 걷고 났더니 에너지가 완전 바닥났다. 공원을 보고 흥분했던 마음에 피로 따위는 없을 줄 알았지만, 비를 좀 맞으며 공원을 벗어나니 고스란히 몸에서 신호를 보낸다. 더 못 걷겠다. 비도 다시 오기 시작했다. 퇴근시간 거리는 매우 붐볐다.


낭만이라 믿었던 풍경들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함께 빛을 바란다. 비가 점점 많이 온다. 짐 챙길 때 우산을 넣어야지 했었지만 결국 깜빡했다. 비가 언제까지 오려나? 일기예보에는 무슨 경고가 떠있다. 계속 오려나. 그럼 우산을 사야 하나? 잠깐, 가방이 터질 듯 꽉 채워 왔었다. 기념품이 아닌 우산 따위를 사고 싶지는 않다.


일단 걷고 싶은 뉴욕 거리를 실컷 걸어보자. 그런데 두 블록을 채 못 가서 머리를 두드려 대는 비가 너무 얄미워졌다.


겨우 나흘이라고. 하필이면 오늘 비가 와야 하니.


걷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졌다. 그런데 안 걸을 수도 없다. 비 피할 곳도 없는데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보다는 걷는 게 나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그냥 걸었다. 54번가. 비가 오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래 이런 부슬비는 좀 맞아 줘야지! 시원하다.' 했는데 제대로 내리기 시작하니 금방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었다.


꼴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아줌마로 산지 15년, 꼬락서니 따위 포기한 지 오래다. 이제 굵은 빗방울이 정수리를 때릴 때마다 그 비가 두피에 맞는 게 아니다. 그 딱딱한 밑을 뚫고 들어가 뇌의 쭈글쭈글한 골짜기 사이를 파고드는 듯하다. 어느새 이성을 잃었다.


길 잃은 강아지처럼, 그냥 방황하는데 저 깊은 속에서 울러 퍼지는 내 본능이 뜨거운 국물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그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내 귀에도 들어왔고, 내 몸뚱아리는 이미 32번가에 있는 코리안 타운을 향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가자. 20분 걸으면 되려나? 아니다 그럴 필요 없지, 난 메트로카드 7일권을 가지고 있다. 버스를 타자.

무작정 걸어가는데 화려한 포스트가 보인다.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카네기 홀이구나. 너는 이 비 내리는 거리에서도 아름답구나. 공사 때문에 주변을 둘러친 보호벽마저 빨강으로 깔 맞춤 했구나. 화려한 뉴욕. 56번가와 57번가 사이의 카네기 홀을 지나 계속 걸어가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아직 이곳의 버스 시스템을 잘 모르겠으나 길쭉하게 생긴 맨해튼 땅에서 남쪽으로 쭉 가는 버스, 북쪽으로 향하는 버스, 비교적 짧은 동-서 거리를 다니는 버스가 있는 거 같았다. 폰을 꺼내서 확인하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이 정도 직감은 맞더라. 그래서 남쪽을 향하는 버스 정류장을 발견하고 버스를 기다렸다. 곧 버스가 왔고 냉큼 올라탔다. 그런데 그 버스는 세 정거장만 가다가 우회전을 해버렸다. 이렇게 중간에 방향을 트는 버스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아뿔싸. 내려야 했다. 이 버스는 코리아 타운에서 점점 멀어질 테니.

버스 안에서 바라본 타임스퀘어 풍경

배신당한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파리바게뜨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타임스퀘어와 브로드웨이 극장가 중간 어디쯤이었다. 열 블록 넘게 차를 타고 왔지만 아직도 42-43번가이다. 걸어서 32번가 까지 갈힘도 남아 있지 않고 다시 버스를 타서 또 배신당하기는 싫었다.


뜨거운 커피라도 당장에 마시고 싶었다. 아주 간절해졌다. 안 되겠다. 여기까지 와서 파리바게뜨 가긴 아쉽고, 다른 카페 없나... 둘러봤지만 없다. 이렇게 비 오는데 또 거리를 방황하고 싶지 않다. 그 순간 눈에 스타벅스가 들어갔다. 모르겠다. 발이 먼저 그곳으로 날 이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그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커피가 필요하지만, 앉을자리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자리가 없다.


더 고민할 것도 없다. 파리바게뜨로 향하는 도중 앱을 열어본다. 라떼를 단돈 3불에 준다는 쿠폰이 앱에 들어있다. 스타벅스의 반 값도 안 되는 가격인데 파리바게뜨에 들어온 LavAzza 커피도 뒤지지 않는 맛이다. 더 확실한 이유가 생겼다.




익숙함에 대한 끌림. 뿌리치치 못하고 파리바게트에서 몸을 녹였다.

찹쌀 도넛의 쫀득함과 팥의 달달함, 커스터드 과일 페이스트리에 진한 라떼까지. 이 선택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난 뉴욕까지 와서 왜 우리 동네에도 있는 걸 먹나 하는 반성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익숙함을 멀리하고
생경함 속에 나를 던져 보아
잃어버린 나를 찾으러 왔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다시 익숙한 것들을 간절히 찾고 있다.


사실 아까 센트럴파크의 웅장함과 섬세함과 너른 품에 감탄하며, 이 공원이 뉴욕을 빛내는 거다라고 확신하고 있을 땐 달랐다. 우리 동네에선 볼 수 없는 언덕을 만나고는 내일 러닝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반 기대반으로 설레발치고 있을 땐, 한국 음식이나 국물 따위는 일도 생각이 안 났다. 글 쓰고자 하는 꿈에 심취해, 거리의 음악에 감동해, 그냥 삼일 내내 이 공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글을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책 쓰기 기초 공사가 다 되겠구나 내심 들떴다.


그러다 고작 비 하나에... 우리 동네엔 여름 내내 매일 내리는 비, 비 따위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비를 요리조리 피하는 생쥐가 되어 5번가와 57번 스트리트에 있는 트럼프 타워 앞을 지날 때, 명품 거리 건물 아래엔 조금도 비 피할 곳이 없어 "역시 있는 것들이 더 야박해"라고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따끈한 국물 앞으로 데려다 주리라고 믿었던 버스한테 배신당했을 때엔 본능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며 폭발해 버렸다.


나를 찾으러 왔는데,

이 과정이 나를 찾는 걸까?
예기치 못한 작은 변수에
마음 달랑달랑 흔들리며
구시렁대고 있는 모습이.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잠깐 끄적여보았다. 비 맞고 쫄딱 젖어서 파리바게트에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이러니 홈 스윗 홈을 외치지.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외치는 말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Home, Sweet Home!"이 우러나온다. 여행이 얼마나 길고 짧았는지, 얼마나 신나고 고생했는지, 오래 기다렸던 여행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홈, 스윗홈이 나온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만 집에서 자고 나면 또 떠나고 싶다. 인생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리자, 마음도 녹는다.

이내 또 그리워할 테다. 낯선 도시의 공기, 음악, 바쁜 사람들, 축축함, 사실은 이 비까지 그리워하게 될 줄 안다.


타임스퀘어 근처 42번가 파리 바게트 2층에 앉아 이 글을 쓰며, 이 장면을 그리워하게 될 거란 문구를 적으며 입이 귀에 걸린다. 그래, 그게 지금 이 순간이야. 지금을 더 즐기자. 카르페디엠!


입 꼬리가 올라가자 시야도 넓어진다. 눈앞 전광판에서 자메이카 여행 광고를 한다. 아- 다음번 여행은 저기도 괜찮겠네. 지금 막 여행을 시작하면서 다음 여행을 꿈꾼다. 도넛을 입에 넣으며, 내일은 국물을 먹겠다는 의지도 다졌다. 넌 대체, 지... 지금 이 순간에 좀 더 충실한다며?


배가 좀 차니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따라서 일기도 잘 써진다.


익숙함에 대한 끌림
- 파리바게뜨 2025.07.14 7:22 pm

또 익숙한 곳으로 와버렸다ㅋㅋ 뉴욕까지 와서.
핑계를 대자면 일단 맥도널드나
스타벅스는 아니다. 비가 많이 와서 거리를
즐기지 못하고 헤매다 겨우 버스를 탔다.
더 이상 머리와 어깨로 비가 떨어지지 않음에
감사하며 아까 메트로 카드 7일 권을
미리 사놓은 나를 칭찬해 주었다.
7 Ave & 54번가 에서 M104 버스를 탔고
남쪽 방향으로 쭉 내려갈 줄 알았는데
브로드웨이를 만나고 조금 더 가더니
서쪽으로 틀어버린다. 나 32번가
코리아 타운 가고 싶은데 ㅠㅠ

(나머지 내용들은 위에 적혀있는 내용들이다)


이제 들어가자. 춥다.


첫째 날 여행 마무리 7:53 pm

내일 새벽 6시에 뛰려면 이제 가서 씻고 자야지.




바로 앞 지하철 A 노선을 타면 금방이다. 내려서 2분만 걸으면 바로 숙소가 나온다. 아, 비가 아직 온다. 많이. 우산을 사야 하나 생각이 또 들었지만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여태껏 버텼는데 짐을 더 늘릴 수는 없다. 러닝복이랑 운동화까지 챙기느라 배낭이 꽉 찼다. 쓰고 버리면 되는 거 아는데 이깟 비 때문에 돈을 쓰고 싶지 않다. 게다가 아까 비 오기 시작했을 때 샀으면 몰라. 내 자존 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냥 가자.


지하철은 금방 왔다. 사람이 아주 많다. 부지런히 탔지만 자리에 안지는 못했다. 그런데 출발할 생각을 안 한다. 계속 문이 열려있고, 맞은편 급행열차가 들어온다. 내 옆에 앞에 있던 아줌마는 재빠르게 급행으로 달려갔다. 순간 나는 따라가 보아야 할지 말지 고민을 했고, 이미 늦었다. 고민 없이 갔으면 나도 탈 수 있었을까, 그 급행은 순식간에 출발했다.


그리고도 5분 넘게 문도 안 닫고 정차해 있었다. 맞은편 급행이 한대 더 들어온 순간 옆 사람 두 명이 뛰어가자 나도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인다. 그리고 골인. 나도 얼결에 탄 급행이 아까 탔던 전철 보다 먼저 출발했다. 아싸. 그런데 조금 달리다가 멈춘다. 뉴욕 지하철은 악명이 높아서 깨끗하리라고는 전혀 기대 안 했다. 그런데 이렇게 멈추어 서는 것도 기대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가질 않는다. 아무 설명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서있는 사이 우리 뒤에 출발한 어떤 지하철이 옆을 쏜살 같이 지나간다. 저건 뭐지? 왜 재는 가고 우리는 안 가지? 십 분쯤 그렇게 멈추어 서 있다가, 방송이 나온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차오른 곳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는 왔던 역으로 돌아갔다.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뱉어낸 그 지하철은 오늘 운행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며 차고를 향해서 반대편으로 출발했다. 반대편에서 급행이 아닌 일반행을 타려고 다시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바로 출입구를 찾았다. 오늘 지하철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버스를 타자. 숙소로 가는 루트를 확인하니 M104. 아까 나를 배신했던 그 번호. 똑같은 버스를 다시 타라고 한다.


그래, 기분 좀 나쁘다고 안 탈 순 없잖아?


비는 아직 안 그쳤고 겨우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미 버스가 와 있다. 타려니까 기사님이 문을 안 열어 준다. 옆에 있는 아줌마가, 여기가 종점이라 기사들이 쉬었다 간다고 일러준다. 몇 분 후면 출발할 거라고 한다. 버스정류장에는 비 피할 곳이 없다. 그래서 10미터 대각선 뒤로 있는 건물 입구로 비를 피한다. 건물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 비를 피하기 좋았다. 아줌마도 나를 뒤따라와 비를 피한다. 버스들이 쉬다가 출발할 때 문을 열어서 타라고 알려준다고 한다.


그런데 버스는 한 3분쯤 있다가 불을 켜더니 급하게 출발한다. 나는 당황해서 뛰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아줌마는 나쁜 놈의 시키! 시원하게 욕을 한다. 정해진 시간에 늦어서 급하게 출발한 것 같다고 한다. 이 버스는 자주 와서 그냥 여기 기다리면 된단다.


아줌마가 아니었으면 여기서 버스를 타는 게 맞나 하고 또 방황했겠다. 진짜 아줌마 덕에 살았다. 그런데 표현하지는 못했다. 여기는 도시니까 감정을 급하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


공공의 적이 사람들을 하나로 만든다.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간 버스 기사 덕분에

아줌마랑 한 배에 탄 동지가 되었다.

아줌마가 이것저것 물어본다.


넌 왜 뉴욕에 온 거니? 혼자 여행하러요.

그럼 지금 숙소로 돌아가는 거니? 네.

그게 어디쯤 있는데? 이 버스 타고 20분 가면 돼요.

나는 집에 가는 길이야. 아들이랑 같이 사는데

아들이 월세를 내줘. 아들이 집에서 일을 하거든.

뉴욕에 여행 오려면 호텔이 너무 비싸다고 하던데.

맞아요. 그래서 싼 곳을 찾느라 멀리 잡았지요.

거기 괜찮아? 네 가격대비 괜찮은 거 같아요.

그런데 아들이 몇 살인데 벌써 일을 해요? 42살.


세상에 당연히 많아봐야 20대 아들일 줄 알았는데

흑인 아주머니의 피부가 탱탱해서 그런가

진짜 동안이다.


왔다. 이런 좋은 분위기에 양념을 칠 기회다.


어머, 아줌마 많아봐야 50으로 보이는데요?

어, 나 60 넘었어.

우와 진짜 어려 보여요...


거리에서 이렇게 금방 많은 얘기를 나누다니.

나에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항상 숫기도 없어서.


그러는 사이 또 한 명이 와서 버스를 기다린다.

아줌마는 아저씨에게 이쪽에 와서 비를 피하라고 한다.

그리고 버스 한 대가,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놓고 갔다고 아저씨에게 이른다.

아저씨도 합세해서 하나가 된다.

가족들이랑 같이 왔으면 만나기 힘들었을 기회들이다.

진짜 여행 온 거 같다.


여행 와서는 사진으로 남겨야 나중에 기억나는데?

찍지 않고 그냥 넘기면 금방 잊는다.

사진만 남는다.

아줌마한테 같이 사진 찍자고 얘기하고 싶다.

쑥스러워서 말하지 못하는 거면서,

깜깜해서 어차피 안 나올 거라고

다른 자아가 쿨한 척한다.

티도 안 나게 혼자 고민하는데 버스가 와버렸다.


버스에서 가까이 앉아 계속 이야기를 이어갈 만큼

나의 붙임성이 좋지는 않다. 뒷자리에 앉아서

머리를 버스 벽에 댄다. 비에 젖은 생쥐는

에어컨 바람 때문에 얼어 죽을 듯하다.

그래도 더 늦지 않게 버스를 잘 탔다는

안도감이 몰려온다. 자연스레

오늘 하루를 돌아보게 된다.


용기. 자신감. 귀찮아하지 않기.
이 여행에서 내가 찾아갈 것들이다.


첼로 연주를 당당히 들으며 연주에 대한 감사

표현으로 기부도하고, 비디오를 찍어도 되냐고

자신감을 가지고 물을 당당한 용기.

친절한 아줌마에게 더 적극적으로

고마움을 전달할 표현법, 어색함과 귀찮음을

물리치고 같이 사진 찍자고 말할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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