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여행 중 여전히 육아
벗어날 수 없는 굴레
무엇이 나를 그리 꼭 쥐고 있었을까
돌아보면 실체 없는 그 무엇
사랑하기에 나를 둘러싸버린 굴레
없어도 될, 그러나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의 그림자
어느 날 훨훨 날려 보낼 그것
자유로이 내가 다시 머물 그곳
비행기는 제시간에 출발해서
안전하게 JFK 공항에 도착했다.
물론 나도 그 안에 타고 있었다.
이로서 트라우마가 극복되었길 바랄 뿐이다.
이제 진짜 여행시작이다. 일단 숙소에 짐을 풀어야 한다. 메트로카드 7일 치를 사면 버스 지하철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 그걸 사자. 숙소 주소를 치고 길 안내를 시작하니, 먼저 공항 트레인을 타고 가서 Jamaica에서 내리라고 한다. 거기서 트레인을 갈아타고 맨해튼으로 들어간다. Penn Station에 내려서 지하철로 갈아타면 숙소 앞까지 데려다준다고 한다.
첫 번째 트레인 Airtrain JFK를 타야 한다. 애플 맵에서는 요금이 $4.25라고 한다. 그런데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이 그냥 탄다. 지하철처럼 확인하고 들어가는 것도 없고. 내가 제대로 탄 건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다들 어떻게 요금을 내는지 잘 알고 있는 듯 나만 두리번 거린다.
일단 트레인이 왔고, 모두들 탄다.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나도 이걸 타기는 해야겠다. 어디서 내릴지는 모르겠으나 타고 보자. 여기 계속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냥 비싸도 우버를 탈걸 그랬나? 돈 아끼다가 혹시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나. 대중교통 갈아타다가 시간 다 버리고 여행 끝나면 어쩌나. 아니, 당황하지 말고 검색하자. 그래 내 손엔 폰이 있다. 허둥댈 이유가 없다.
공항 안에서 운행하는 처음 몇 구간은 무료고 공항을 벗어나 Jamaica까지 가는 곳에는 운행료가 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받는다는 말인가? 여기 있는 사람들 이미 아무것도 안 내고 다 탔는데... 나만 헤매는 것 같은 도시에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뭐 정류장이라도 놓칠까 정신 바짝 차리고 있다. 이제 탈것 "놓치는"게 비행기 놓치는 것 마냥 바짝 긴장해야 할 것 같은 습관이 생긴 듯하다. 만약에 놓치더라도 내려서 반대로 다시 타고 오면 된다. 그 작은 실수로 역에서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새워야 하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아줌마, 긴장 푸세요.
자메이카 역에 도착했다. 아싸, 공짜로 왔나 보다. 나가는 건 한 방향이다. 인파에 휩쓸려 갔다. 서울 지하철처럼 사람이 많다. 아, 도시는 다르구나. 그리고 괜한 기대를 했구나. 누구든 나가려면 표를 사서 개표구를 지나야 한다. 그렇지? 그렇게 허술할 일이 없지.
메트로카드 7일 권을 사려는데 두 종류다. 뭘 사야 하는 건지 한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자동판매기에서 사길 포기하고 직원이 있는 대로 갔다. 두 패키지의 차이가 뭐냐고 물으니, 그 차이가 안 보이냐고, 뭐라고 적혀있냐고 되묻는다.
아, 도시에서 크게 친절할 건 기대 안 했지만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코나 안 베이게 조심해야겠다. 사기 전에 다시 한번, 더블 체크 한 건데. 저 사람 입장에서는 바쁜 사람 시간 뺏는다고 생각한 걸까?.
고심 끝에 표를 사고 나가서 다음 트레인을 타려 가야 하는데 안내가 잘 안 되어있다. 대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요? 아, 공항에서 도심 가운데 있는 숙소 찾아가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외국인들이 서울 지하철 보면 헤매기도 한다는데... 내가 나이 들어 느려진 건가, 한적한 곳에 오래 살아 도시인들의 속도에 따라가기 힘들어진 걸까. 그래도 나, 국가 번호까지 +82, 빨리빨리의 민족 한국인인데.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어떻게 숙소를 빨리 찾아가나 고민하는 중에 아까 공항에서 날려 버린 시간에 대해 남은 미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물에서 빠진 것 건져냈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한 놈 여기 있다. 비행기 안 놓치고, 연착 안 되고, 다른 변수 안 생기고 잘 타고만 오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잘 도착하고 나니 물에 떠내려간 내 시간 보따리가 눈에 밟힌다.
공항에 일찍 도착했으니 앉아서 글이나 쓰려고 했었다. 밀린 브런치 연재 글도 계속 신경 쓰인다. 일 년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꼭 글 올리기로 나한테 약속했는데… 고작 두 달을 못 넘기도 또 타협했던 순간을 만회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됐다. 트라우마 때문에 게이트 뚫어져라 보는 거 외에 다른 거에 집중할 여력이 안 되었다. 유튜브도 못 즐기는데, 글쓰기랴.
후회해 봐야 되돌이킬 수 없는 일 생각 그만하고, 빨리 숙소 찾아가자. 진짜 여행 시작해야지! 그 와중에 What's App이 난리다. 인도의 카톡. 전화 오고 문자 오고 다시 전화 오고. 길을 찾느라 받을 수 없다. 그쪽에서 묻는 질문이 예상되는데, 나는 정확한 대답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그냥 받지 말고 좀 있다 문자 하자. 시간을 좀 벌어야 한다.
딸아이가 가는 고등학교는 공립이긴 하지만 특성화고등학교라 스쿨버스가 없다. 집에서도 멀다. 카풀을 하지 않으면 첫째를 위해서만 매일 3 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팀이랑 카풀을 하기러 했는데, 모이는 장소가 우리 집에서 꽤나 멀다. 그 사이 더 가까운 곳에서 카풀이 사람을 모집하길래 연락을 해 놓았었는데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나를 카풀 그룹챗방에 초대했다고는 했는데 나는 아직 초대되지 않은, 뭐 그런 상황이다.
다시 묻기는 좀 그렇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냥 연락 오겠지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방금, 다른 팀에서 진짜 우리랑 카풀을 할 거냐고 확인 문자가 먼저 왔다.
그게 하필, 왜 오늘 지금 이 시간에
연락이 오는지 모르겠다.
짝짓기 시기이다. 모든 부모들이 제일 잘 맞는 조건의 카풀 패밀리를 지금 쯤은 늦지 않게 구하려고 하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아직 개학하려면 한 달 정도 남았다.
방학하고 두 달 가까이 지나도록 서로 연락을 안 하다가, 하필이면 딱 오늘, 마침 내가 겨우 4일 여행을 와서 길을 찾느라 바쁜데 딱 이 순간에 이런 긴박한 연락이 오냐는 말이다. 한 시간만 있다가, 숙소에 도착할 무렵 연락이 왔으면 마음 편히 바로 답할 수 있을 텐데.
이 그룹에 먼저 안 한다고 얘기했다가, 가까운 카풀까지 무산되면 진짜 큰일이다. 양다리 걸친듯한 모습은 미안하지만, 이곳에 먼저 확답을 들어야, 저곳에 안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집아야 한다. 절대 놓칠 수 없다.
낯선 곳에서 길 찾는 게 급하지만, 이 문자는 지금 보내지 않으면 앞으로 일 년을 개고생 할 수도 있다. 그래 빨리 숙소 찾아가는 거보다 이게 훨씬 중요하다.
웬만한 학교 이메일이나 아이들 관련 연락은 여행 끝나고 가서 답해도 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지금 확정 짓지 않으면 큰일이 날 사안이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홀가분히 떠나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볼까 온 여행이다. 이 귀한 시간에 두 카풀 그룹 사이를 오가며 설명하고 조율하고 해야 한다니, 아이고 엄마 팔자야.
미국에 오래 살면 영어를 잘하게 될 거라 기대한 건 큰 오산이었다. 아직도 영어로 문장을 만들려면 엄청나게 집중을 해야 한다. 걸어가면서 하기에는 이곳을 영 모르겠다. 올 스탑하고 카풀 짝짓기 문자 시작.
한 그룹과 소통하고 그걸 다른 그룹에 전하고, 앞으로 나의 거취를 밝혔다. 이제 진짜 카풀 그룹이 완성된 듯하다. 급한 불은 껐다. 늙어서 인지, 낯선 곳이라 그런지, 멀티가 불가능하다. 다시 길을 찾자.
사실 멀티가 불가능 한건 특히 아이들 관련한 것들이다. 내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고 빨리 끝내야 하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아이들 관련한 일들을 갑자기 처리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면 차분하게 하나 처리하고 곧바로 나머지를 처분하면 된다. 그런데 마음을 원래 차지하고 있던 것이랑 새로 치고 들어온 것들이 우선순위를 놓고 치열하게 싸운다.
그 싸움은 대부분 이렇게 진행된다. 갑자기 끼어든 아이들 관련한 일이 마음속에 나비 날개 짓을 시작한다. 그것은 곧 큰 바람을 일으켜서 원래 하고 있던 것에 부딪힌다. 그 충돌로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이내 마음 다른 구석에서 결국 태풍까지 만들어 낸다. 아무거나 먼저 그냥 처리하면 될 것을, 중간중간 나머지 일에 대한 미련과 망설임 때문에 생긴 태풍은 내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자주 맹수에 쫓기는 듯 허둥지둥하게 된다.
그 허둥지둥은 엄마의 불안감을 먹고 자라왔다. 내가 자란 환경이랑 너무 다른 곳에서, 이렇게 하는 게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고민들. 엄마의 현명하지 못함으로 아이들에게 작은 피해라도 가게 될까 하는 조바심. 어제 뉴스에서 봤던 큰 일 같은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길까 하는 필요 이상의 우려들까지.
나도 안다. 그 불안감들은 내가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감이 커진다 라는걸.
그 사랑 때문에 뚝딱대고, 더 마음 쓰인다는 걸.
지금 내가 이거 연습하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떨어진 나를 관찰하면서 돌아본다.
안 그래도 될 것까지 또 너무 신경 썼구나.
미리 사서 걱정했구나.
심호흡 몇 번 크게 하고 나면
더 차분히 처리할 수 있었구나.
나, 나름 잘하고 있구나.
그리고 혹시 실수해도 괜찮아, 괜찮아.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 여행하자. 근데 잠깐…
아, 맞다!
한숨 돌리고 몇 발자국 떼자마자 또 깜빡한 게 생각났다. 딸 플룻 선생님한테 이번 주에 수련회 가서 못한다고 미리 못했다. 빨리 문자 보내야지. 또 잊은 게 없나? 지금 다 처리해 버려야지.
나, 지금 나 홀로, 홀가분하게 여행 중인 거 맞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