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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딸 사용법, 육아 선배에게 글로 배움

이정 작가, [반 걸음 정도, 엄마의 속도는 더뎌야 한다는 것]

by 여행하듯 살고

수요일.

카풀을 위해 친구집에 내려주러 가는 길 딸이 묻는다 "엄마는 어떤 코스로 달리기 해?" 말수가 줄어든 사춘기 딸이 물어봐주니 고맙다. 신나서 이야기한다.


원래 우리 집에서 출발하면 Target 앞에 있는 신호등까지 가서 돌아오지. 그렇게 왕복하면 딱 5K 뛰게 되는데 요즘은 코스를 좀 바꿨어. 그쪽으로 가면 아는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도 있어서. 아침부터 화장도 안 하고 땀 뻘뻘 흘리고 뛰는데 민망하잖아, 서로ㅋㅋㅋ


그날 아침에는 딸아이 라이드 때문에 시간이 빠듯해서 평소보다 빨리 달렸다. 내 러닝 목표는 시간이 아니라 거리니까 빨리 달릴수록 일찍 끝내고 도시락을 쌀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해진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딸 도시락 덕분에 5K 나의 최단시간 기록을 세웠다.


미친 듯이 뛰고 곧장 집 문으로 통과했다. 문을 닫고도 숨을 한참이나 헐떡댔다. 그걸 듣고 딸이 나온다.

"굿모닝, 엄마 러닝하고 왔다!! 방금 5K 최단시간 기록 세웠어!"

"굿잡" (이라고 말하는 딸의 목소리에는 영혼이 일도 없었다.)




세상 낮은 톤으로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했었지만 아까 내가 숨을 헐떡 대는 게 기억이 났는지, 딸이 운전하는 내게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리 기쁠 수가 없다. 아직 사춘기인 딸은 먼저 부모 안부를 잘 물어보지 않으며 자기에게 향하는 우리의 질문도 뚝뚝 끊어내기 일쑤이다.


그런 딸이 아침에, 나에 대해 질문을 해주다니 정말 영광이다. 아는 사람들 볼까 봐 코스를 바꿨다느니, 시간이 없어서 빨리 뛰어야 된다느니 이야기를 해주니, 딸은 엄마가 웃긴다고 한다. 비웃음과 그냥 웃음 어느 중간 즈음 있는 그것이 싫지 않다. 달콤하기까지 하다.


나는 딸이 한 명 있지만, 분명 매일 극과 극인 두 명의 딸을 만난다. 아침딸과 저녁딸. 그들의 온도차는 적도와 남극에 비할만하다. 아침에는 생리하는 고양이 같다. 인사도 권하지 않는다.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게 상책이다. 어쩌다 말을 걸었다가는 불똥이 튈 수 있으며, 좋은 의도로 다가갔는데 그런 식의 반응이 돌아오면 내 기분은 아침부터 나락으로 떨어진다. 누가 내 기분을 다시 끌어올려주기가 쉽지도 않으니, 아침에 알아서 잘 피해야 한다.


반면에 저녁에는 이유 없이 댕댕이가 된다. 와서 안아달라고 놀아달라고 난리다. 밥 차려 야하는데, 할 게 많은데. 이런 개냥이를 보면 아침 생리하던 고양이랑 똑같이 생겼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표정이 나올까 진심 궁금해진다. 혹시 손톱 먹고 내 딸로 변한 생쥐 두 마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인가.


그 온도차에 적응하는 건 온전히 나와 내 남편의 몫이다. 영문을 모르는 고양이와 댕댕이는 그냥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듯하다. 그에게 죄를 물을 만큼, 나에게 큰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고양이의 생리가 오늘 아침에는 끝난 것인지, 댕댕이가 되어 종알대고 있다.


아니, 사실 종알대는 건 나의 모습이었고, 그걸 주인이 받아주는 듯 딸은 간간이 대답하며 출근하는 차를 운전하는 듯한 포스였다. 조수석이었지만, 아직 혼자 운전하고 다니려면 일 년 반은 더 남았지만. 아무튼 평소 아침과는 다른 분위기에 그렇게 신나게 말을 이어가다가, 내가 또 말실수를 했나 보다.


"요즘 이렇게 뛰는 게 신나는데 너네 어릴 때도 뛰었어야 했어. 요즘 그게 너무 아쉽게 느껴져",라고 하니 딸은 그럼 엄마 편두통 때문에 죽었을 꺼야라고 한다. 그대로 나는 받아친다. 아니, 엄마 편두통 진작에 더 빨리 괜찮아졌을 거야. 요즘처럼 괜찮아진 게 더 빨리 왔었겠지.

너 POTS 가 없었을 수도 있고.


악~~~~~

너 POTS 가 없었을 수도 있고…

너 POTS 가 없었을 수도 있고…

실수다 딸아, 실수란 말이다...



POTS- Postural Orthostatic Tachycardia Syndrome, 기립성 빈맥 증후군. 앉아있거나 누워있다가 일어설 때 심박수가 비 정상적으로 증가하면서 현기증을 등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기립경 검사에서 혈압의 감소 없이 맥박수가 분당 30회 이상 (청소년은 40회 이상) 증가하거나 120회 이상으로 상승하는 경우에 진단한다고 한다.


딸은 일 년 전부터 어지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생리 때 더 그렇다길래 그냥 생리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다 최근에 정기 검진을 갔을 때 증상을 이야기하니 주치의가 간단한 검사를 했다. 그러더니 POTS 가 의심된다고, 심장과 의사를 만나보라고 했다. 혹시 철분 부족등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피검사도 했다.


그날 피를 뽑은 직 후 딸이 5초 정도 기절을 했다. 세상에나, 생각보다 좀 심한 거였나? 잘 먹고 잘 자고 학교생활 잘하고... 학교 체육시간에도 별말 없이 참여해서 그냥 가끔 어지러운 건 줄 알았는데... 일 년 정도 딸의 어지럽다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미안해졌다.


낮에 피검사 얘기를 듣던 남편이 깜짝 놀라며 눈이 똥그래진다.

“진짜 (그렇게 심하게) 아픈 거였어?”

남편의 멘트는 딸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그럼 아빠는 여태껏 내 말 안 믿은 거였어?”


얼마 뒤 심장과에서 초음파도 찍고 기립경 검사, 심전도 검사도 했다. 심장과 의사는 딸아이의 심장 자체는 아주 튼튼하다고 했다. 증상이 딱 POTS으로 보인다고 한다. 확실히 진단받으려면 심박수가 40 이상 높아져야 하는데 딸은 30 정도라고 한다.


아무튼 완전 진단을 받은 게 아니지만 진단에 가까운 수치와 증상을 보이니 우리는 딸한테 기립성빈맥증후군이 있다고 여긴다. 약을 따로 챙겨 먹고는 나을 수 있는 병도 아니고, 그냥 잘 관리하면서 살아야 한단다.


이런 히스토리가 있었다.


생리 때 빈혈정도로 조금 어지러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그냥 앉았다 일어날 때, 누웠다 일어날 때 심하게 어지럽단다. 5분 정도 그럴 때도 있고 한 시간 이상 지속될 때도 있다고 한다. 그 이후는 어지럽다는 말이 그냥 그런 게 아니고,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압박 양말이랑 레깅스 사고, 소금 좀 더 챙겨 먹이려고 노력하고, 게토레이 같은 이온 음료 더 먹이려고 하고... 딸은 POTS 때문에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확실히 신경 쓰이고 몸 컨디션을 잘 살펴야 한다.




그런 딸한테 내가 의도하지 않은 화살이 꽂혔나 보다. 어지럼증 때문에 불편하지만 따로 약도 없고 그냥 평생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 건데.. 내 편두통처럼 저 아이한테도 저게 평생 짐일 텐데. 아, 그걸 러닝이랑 연결시켜서 없앨 수도 있었을 것이라 말하니 정색하면서 부르르 한다.


"내가 운동을 안 해서 그게 생겼다고 생각해? 체조팀에서 강도 높은 연습할 때도 그게 있었거든?"


나는 빨리 수습해보려 한다. 그게 네가 운동을 안 해서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엄마 편두통이 점점 나아지는 것처럼, 그게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거지. 어릴 때부터 뛰었으면 면역체계 같은 게 탄탄해져서 뭐 그런 게 안 생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딸은 이미 말이 쏙 들어간 뒤였다.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아 좀 억울하기도 하지만, 딸이 왜 서운한지 분명히 알긴 하겠다. 내 편두통이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높은 베개를 써봐라, 맑은 공기를 마셔봐라, 스트레스를 받지 마라, 기도를 많이 해 봐라 감나라 배나라...


물론 정말 걱정하면서 안부를 묻고, 안 아프기를 기도해 주는 분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분들의 말투는 진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과시하듯이 내 편두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어투때문에 불편한 적이 많았다. 내가 노력을 덜해서, 믿음이 적어서 낫지 못하는 거란 뉘앙스를 깔고, 나한테 걱정을 가장한 훈수 두는 사람이 꽤 많이 있었다. 진짜 걱정되면 가끔 안부 묻고 뒤에서 기도나 해주지..


딸이 딱 그렇게 느꼈겠다. 내가 어떻게 컨트롤할 수 없고, 잘못 관리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쩌다 잘 다스려야 하는 병이 생긴 건데. 그걸로 인해 생활도 불편하고 속상한데, 엄마가 그걸 운동으로 연결시켜서 더 속상했겠어. 미안해 진심으로.


그래서 바로 사과했다. 네가 어떻게 해서 POTS 이 생겼다는 게 아니라 엄마 편두통 괜찮아지는 것처럼, 운동으로 없앨 수 있다고 희망가지는 것처럼, 그런 의미로 말한 거라고.


그래도 딸은 말이 없다. 이미 삐졌다. 예전에는 그런 딸 보면 뭐 저런 거 가지고 삐지냐- 진짜 별거 아닌 거에 과민반응이다, 흥 치 뿡 그랬는데 이정 작가 글, [반 걸을 정도, 엄마의 속도는 더뎌야 한다는 것] 보면서 반성하고, 아이들 마음 더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니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미안 딸. 고마워요 이정 작가


그리고 이 짧은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긴 하다


사실 내가 의도했던 말은 너네 세 살 다섯 살 정도로 어릴 때부터 엄마가 러닝 했으면, 너네가 훨씬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랐을 테고 그러면 POTS 이 어떤 이유로 생긴 지 확실치는 않으나, 우리가 추측하는 대로 별거 아닌 감기 바이러스 같은 것이 트리거가 된 거라면.


어쩌면 똑같이 그런 트리거로 POTS 생기며 어지럼 증을 겪을 수도 있겠으나 한번, 어쩌면 면역체가가 탄탄해서 그런 바이러스에 영향을 받이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기본적으로 체력도, 건강도 더 좋았을 거 같아서.


네가 운동 많이 안 하는 걸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엄마가 십 년 전부터 이렇게 러닝을 했으면 너네한테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거 같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 말고, 내가 그랬었으면 좋았겠다고. 내가 했었으면 너네가 자연스럽게 따라 했었을 것 같다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단지 조리 있고 빠르게 저 말이 안 나와서 네가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 거지.

그니까 또 내가 막 떠들다가 실수했다. 말을 많이 한걸 반성하게 된다.




얼마 전에 이정 작가의 브런치 연재글을 읽고는 딸과 내 관계를 많이 생각해 보게 됐다. 그동안 딸이랑 부딪힐 때마다 들었던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오롯이 딸을 향한 것만은 아니라고 발견했다. 그 복잡한 신경을 어찌 다 풀어 내 보지 못해 항상 답답함이 있었는데, 그 답답하고 아쉬운 감정은 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 또는 나를 향할 때가 더 많다는 것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정 작가는 딸과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본인과 엄마의 관계를 떠올린다. 아이들이 어릴 적 직장맘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 육아 이야기들을 오가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분석해 놓았다. 본인의 마음도 충분히 헤아려 보고 어머니를 다시 이해하며 아이들에게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꾸자, 아이들의 행동도 부드러워졌다고... 그런 과정을 글로 잘 풀어내고 있었다.


글을 마음 다해 따라가 보니 내가 딸을 키우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랑 비슷한 모양이 많이 있었다. 그 과정 중에서 나는 내 마음 들여다보기에 제일 바빴구나 반성하게 되었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보다는, 여태껏 뭐든 내가 충분히 해주는데 고마운 줄 모르고 왜 이렇게 불만이 가득한 걸까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보니 내가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아이 입장을 낱낱이 고려하기보다는, 엄마도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앞세우며 내 입장을 먼저 변호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 글을 읽고 다음날 아침에 라이드를 해 주면서 이야기 나눈 게, 제일 앞에 있던 내용이다. 딸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보자, 마음을 그렇게 먹고 보니 너그러워졌다. 평소에는 별것도 아닌 일에 딸은 왜 저렇게 반응하나 그 마음이 먼저 나왔는데, 이제 딸을 좀 더 이해하려는 마음이 진심으로 앞장선다.


육아선배의 글이 교육학 책 보다 백배는 낫다.

글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고맙습니다. 작가님.




목요일.


어제 아침에 좀 삐걱대고는 여전히 삐진 건지, 딸이 학교 갔다 와서도 평소처럼 재잘대지 않았다. 딸은 원래 금방 화내고 금방 풀린다. 자주 삐지고, 금세 별일 없었던 듯 돌아온다. 그런 딸이 설마 아침에 일을 저녁까지 가져온다고?


어젯밤에 이어, 아직 냉랭하다. 아침에 카풀 데려다 줄 때도 우리 둘만 타고 가는데, 딸은 평소처럼 앞자리 조수석이 아닌 뒷자리에 앉았다. 딸의 이 싸늘함이 어제 아침 차 안에서 나의 말실수 때문인지, 새로 시작하는 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궁금한데 물을 수 없다. 물어봐야 좋은 반응으로 돌아 올 리가 없다. 침묵이 현명한 선택이다. 적막 가운데 세상의 온갖 소음이 내 머릿속에만 모여드는 듯하다.


금요일.


그러던 게 이제 풀렸나 보다. 금요일 아침, 밴드 캠프 데려다주는 길에 친구가 우리 차에 탔는데도 조수석에 계속 앉아있다. 웬일로? 친구 탔는데 뒤에 가서 앉지? 장난치듯 말했다. 잠시 옮기는 척하다가, 귀찮다고 그냥 있겠단다. 그리고는 내 옆에 조수석에 앉아 뒤돌아보며 친구랑 이야기한다. 가끔 나랑도 얘기했다. 역시 영광이다. 딸의 재잘거림 덕분에 하루의 시작이 더없이 상쾌하다. 오늘 딸의 날씨 맑음.


토요일. 이틀 연속 홈런.


플룻 레슨 마치고 돌아오는 데 딸이 플룻선생님이랑 했던 이야기, 어제 밴드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조잘 대내 늘어놓는다. 밴드를 같이 하는 친한 친구랑 요즘 좀 불편할 때가 있단다. 평소 친한 그 친구한테 느끼는 것. 대부분 좋지만, 외동이라 그런가 좀 그럴 때가 있다고. 어제가 그랬다고. 한참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술술 꺼내어 주고 분위기가 좋다.


오랜만이다. 그동안 내가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꺼낼 땐 자주, 거의 항상 조언을 해대려고 해서, 자기를 그렇게 못 믿냐며 까칠하게 얘기하고, 나는 또 까칠해서 속상하고, 니 그런 태도 때문에 엄마가 걱정을 하지. 뭐 그런 뫼비우스의 띠를 계속 돌고 돌았었다.


이제 내가 더 들으려고 노력하는 걸 알아준 걸까?


평소엔 그 친구에게 나랑 있었던 트러블을 종종 이야기했을 텐데, 아싸, 오늘은 나한테 그 친구 아쉬운 걸 토로한다. 나 혼자 그 베프에게 의문의 일패를 안겨주고는, 내 기분이 날아간다. 그렇다고 나도 같이 말이 많아지면 안 된다. 들어주어야 한다. 그냥 듣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잘했다, 진짜 잘했다! 딸도 기분 좋게 나도 기분 좋게. 듣기만 하면 되는구나. 딸은 조언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데도 내 고집대로 해왔었던 것 같다. 쉽진 않겠지만 또 까먹을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마음 넉넉하게 해서 듣기만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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