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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너 같은 딸 낳아라

악담이 축복의 노래로 바뀌는 순간

by 여행하듯 살고

딸 키우는 게 만만치 않다.

아주 어려서부터 똑 부러지는 아이라

나랑 자주 부딪혔다.

중학생이 되어서 사춘기가 온 뒤에는

이게 언제 끝나나, 끝이 있기는 한 터널인가...

갑갑한 마음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딸 사춘기 얘기로 내 친구와 수다를 떨다 보면,

내입에서는 이런 얘기가 진심으로 흘러나왔다.

"우리 딸은 평생이 사춘기야..."

유춘기란 단어를 들었을 때,

딱 우리 딸 이야긴데? 그랬었다.

한편으론 그런 단어가 존재하는 걸 보니,

우리 애만 그런 게 아니긴 한가보다, 다행이라 여겼다.


진짜 사춘기가 왔을 땐 궁금했다.

이 터널이 끝나가는 하는 건가.

어려서 너무 착했던 자식은 나중에 나이 들어서라도

어릴 때 못했던 지랄을 꼭 언젠가는 한다는,

'지랄 총량의 법칙'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딸은 앞으로 얼마나 착하게 살려고

그런 걸까 내심 기대가 되기까지 했다.




어릴 때 딸이랑 언성을 높일 때는

"너 같은 딸 낳아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와도 참았다.

뭔가 저주하듯 내뱉는 그 말은,

엄마로서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본격 사춘기가 오고 다툼이 생기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좋게 풀어가자고 시작한 대화가 점점

소리가 높아지더니 결국 말다툼으로 끝나게 될 때,

마지막에 한마디 했다 "꼭, 너 같은 딸 낳아라"


그래도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내뱉지는 않았다.

꾹꾹 눌러 참다, 참다가 정말 내가

미쳐버리기 직전에 툭 튀어왔다. 몇 번.

그런데, 참았다는 건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겠지.

한번 금 간 유리는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얘기를 들은 딸의 마음에서는

어떤 큰 균열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말을 내뱉기 전에 이미

내 표정과 말투, 이전에 대화에서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아 마음이 다 닫혔을지도 모른다.


딸이 한 번씩 속상했던 일을 나에게 이야기할 때면

나는 어떻게든 조언을 해주려고 했다.

중학생 시절에 내가 몰랐던걸

지금 알고 보니 너무 아쉬운 게 많아서였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좀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상상을 종종 해왔었다.


조언을 해줄 때는 최대한 부드럽고

따뜻하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아이는 그게 아니다.

사춘기가 오기 전에도 그랬다. 그냥 얘기를 해도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서 방어적인 태도를 자주 보였다.


그럼 나는 딸아이의 태도 때문에 더 걱정이다.

네가 그런 태도를 자주 보이니까 내가 걱정하는 거야.

별거 아닌데 까칠하게 구는 그 모습!

그런 게 없다면, 나도 걱정을 안 하지.


그렇다, 나는 딸의 소셜 스킬이

사실 약간 불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냐하면 나랑 남편은 딸을 정말 사랑하고

대개 잘 지내지만, 나도 딸과, 남편도 딸과

사소한 걸로 자주 부딪혔기 때문이다.

비교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런데 심하게 체감되는 걸 어쩌랴.

남편과 자주 꺼내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기 때부터 쭉- 우리 둘 다 공감하고

인정하는 부분이다. 둘째는 많이 둥글둥글했다.

어딜 가도 친구들이 많이 따르는 게 보이고, 우리

아이를 데리고 멀리 놀러 가겠다는 친구네도 많았다.


물론 첫째도 친구가 있고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한다.

그렇치만 확실히 다른 온도차가 느껴졌다.

같은 걸 지적해도, 둘째는 “응, 알았어”

첫째는 “흥, 됐어, 치” 등의 완전 다른 반응에 돌아왔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을,

없는 것처럼 치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첫째가 유별난 건지, 둘째가 유별난 건지?

둘 다 그냥 극과 극에 있는 건지?

딸과 이들의 차이인지, 첫째와 둘째의 차이인지…

객관적 원인이나 주관적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현상까지 방치할 수는 없었다.


타고난걸 다시 뱃속에 넣어 바꿀 수는 없지만

교육의 개입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딸한테는 사람들 대하는 태도나 행동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려는 시도가 많았다.


네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도 너무 티 내지 말고,
까칠하게 하지 말자.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랑 친하고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나랑 잘 맞는 사람 몇 명만 찾아서 잘 지내면 된다...
먼저 하나를 주고 손해 볼 수 있지만
계속 습관적으로 그렇게 되는 관계는
건강한 게 아니다. 그런 친구한테는
무조건 맞춰주면 안 된다…


아이에게는 그게 잔소리처럼 들렸을 테다.

자기의 사회성을 믿지 못한다고 짜증 내며

입을 꾹 닫으며 대화는 갑자기 뚝 끊기기 일쑤였다.


내 조바심에서

그러기도 한다는 걸 알고 조심하려고도 한다.

여자아이들이 유독 감정 선이 예민하고, 친구들간의

관계가 복잡 미묘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

우리 딸도 그냥 그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넘기려고,

관심을 좀 덜 쓰려고 노력도 해왔다.


너그럽게 현실을 받아들여서

어떻게 하면 아이가 독립된 인격체로 즐겁게,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도와주자.

아직 어른은 아니니까 부모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걱정도 습관인걸 깨달았다.

내가 딸을 그런 면에서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아무튼 이게

딸이랑 내가 14년 넘게 만들어 온 우리의 모습이다.




딸이 6학년 때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다.

이제 그럴 때니 잘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딸이 꽤나 심각하게 힘들어한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모르고 반년이 훌쩍 지난 뒤에나

알아버렸다. 그리고는 내 평생 가장 힘든 터널을

딸이랑 남편이랑 함께 지나왔다.


그러고 나서 7학년을 잘 보내고

8학년까지 아주 잘 보낸 것 같다.

9학년이 이제 시작했는데 아직 방심하긴 이른 걸 안다.

항상 긴장하고 있고, 고등학교 4년 동안도

별 굴곡 없이, 자기자신을 사랑하면서

건강하게 잘 보내주기만 바랄 뿐이다.


아직도 종종 서로에게 삐지고 짜증 내고 화내고

사과하고 달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사춘기가 대충 지난 것 같고, 그때만큼은 힘

든 시기는 없을 거라고 간절히 믿어본다.


그 힘든 시기를 보내고 그 다음 해

어머니날에 딸이 나한테 준 카드에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의

반대말 같은 게 적혀있었다.


보자마자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힘든 시기를 잘 지나온 딸이 대견한데,

이런 이쁜 말까지 하다니.

사랑해요! 항상 좋은 딸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엄만 (대개) 인내심이 많고 사랑스러워요. 제가 더 나이가 들고 제 아이가 생기면, 저도 엄마만큼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선물을 즐기세요! ~ 사랑해요,


난 꼭 너 같은 딸을 낳아라

빈정거리면서 얘기했었는데,

우리 딸은 진심을 담아서,

자기가 아이를 가진다면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라고 카드에 적었다.


눈물이 솟구치는 걸 주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첫 문장이...

사랑한단 말 다음으로 미안하다고 시작한다.

항상 좋은 딸이 되지는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아이고, 내가 우리 딸한테

'넌 좀 그런 딸이야'라는 인상을 심어준 건 아닌지

너무 미안해서 더 눈물이 났다.

못난 엄마가 딸한테 상처만 잔뜩 준 것은 아닌지.


꼭 너 같은 딸 낳아라

비꼬며 얘기한 게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넌 충분하지 않아

완벽한 딸이 아니야 왜 더 노력을 안 해?'

뭐 그런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말이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됐던 거였다.


시니컬하며 유머 있는 우리 딸.

엄마 인내심이 많다고 적으며 항상 그런 건 아니니

(대개)라는 말을 꼭 괄호 안에 넣는다. 귀여운 것.

또래에 비해 성숙하단 말을 자주 듣고,

어떤 상황이든 한 발짝 물러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려 깊은 아이인데. 그래서 어쩌면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모습이 많지 않았는데,

괜히 내가 해온 조언들이 좀 더 그런 모습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도 크다.


그래서 눈물을 닦으면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딸한테 축복의 말을 해 주었다.


딸, 고마워... 너도 꼭, 너 같은 딸 낳아!
엄마가 너무 고맙고, 미안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서툰 게 너무 많지...


이제 딸이 사랑스럽고 조금이라도 칭찬할 수 있을 땐

더 마음껏 축복해야 되겠다. 꼭 너 같은 딸 낳아!

너도 엄마처럼 너 같은 딸 덕에 행복해야지,

잊지 말고 자주 축복 해주어야 하겠다.


딸 꼭 너 같은 딸 낳아.
너도 엄마처럼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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