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짜증의 결과는 여행 취소. 협박이 아닌 교육하기
단호박 아니고, 단호함.
똑 부러짐과 말랑함 사이에서,
금지와 무작정 허용사이에서,
난 오늘도 단호함을 연마한다.
"엄마, 30분만 더 놀다 자면 안 돼, 엄마 오늘만?"
"엄마, 내일 하루만 연습 안 가면 안 돼, 엄마 엄마?"
"엄마, 미디어 딱 10분만 더 하면 안 돼, 엄마 딱 한 번만?"라는 물음에 안 돼,라고 해 봤자 똑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마치 기관총의 총알처럼 끊임없이 장전되어 발사된다. 내 방탄조끼는 그 총알을 다 받아내지 못한다. 방패 같은 건 이미 다 망가진 지 오래다.
성경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가 밤늦게 빵을 달라고 얘기하면
그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귀찮아서 없애고 싶은 마음에, 먹고
떨어져라 하는 심정으로 빵을 주어 돌려보낸다는,
누가복음 11장 5절부터 8절에 나오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인데, 예수님이 기도의 중요성과 끈질김에 대해 가르치시며 해주신 이야기이다. 내가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 비유의 부탁을 들어주는 친구처럼, 그 끈질김에 더 시달리기 싫어서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 나를 물고 늘어지는 그 끈덕짐 때문에 대개 요구사항을 들어주게 되는 것이지, 아이가 마냥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다.
우리 딸 아들은 나를 "말랑이"라 부른다 아이들이
귀찮게 졸라대면 웬만한 건 허락해 주어서이다.
"엄마, 여기서 딱 1시간만 더 놀다 가면 안 돼?"
"엄마, 딱 오늘 하루만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질문이 시작되면, 안 돼! 를 두어번 외치다가,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아이들에게 내가 먼저 두 손 두 발을 다 든다. 그걸 옆에서 보던 남편이 "아유, 저 말랑이"라고 혀를 차며 말했고, 아이들은 그 '말랑이'라는 단어를 주워 고이 간직했다.
이런 패턴은 아이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안 돼"를 한 두 번 말해보지만, 자진납세 하는 식으로 곧 "알았어, 이번만이야"라고 습관처럼 말했다. 이제 아이들이 탁구공 넘기 듯, 엄마 이번 한 번만 그렇게 해주면 안 돼?라고 던진다. 나는 예의상 안 돼! 를 한번 외치고는 곧 알았다고 하는 걸, 아이들도 나도 다 안다. 알았어, 이번만이야~라는 말과 함께, 아이나 나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랑이"를 외치며 깔깔 웃어댄다.
곧 그 말랑이는 나의 인덕, 뱃살을 주무르면서도 아이들이 불러주는 애칭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우리 집에서 말랑이로 통한다. 남편은 단호해서 아이들이 좀 더 무서워한다. 그렇다고 아빠를 멀리하지도 않는다. 아빠를 사랑하고 같이 잘 놀고, 무섭게 하니 아빠말은 좀 더 잘 듣는다. 아이들 교육과 관련한 거의 모든 걸 내가 처리하고, 직접 부대끼는 것도 나인데... 결정적으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내가 말하면 아이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때도 있으며, 자기 의견 피력 이상의 무례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걸 인지하고부터는 관계설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느꼈다. 억울하다. 친구 같은 엄마도 좋지만, 주 양육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 엄마는 단호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단호하다는 건 강압적인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적어놓은 지난 글을 추천합니다. <세 살 버릇 정말 여든 갈까?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아이들이 커가면서 점점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하는 것들이 많이 생긴다. 그중에 특히 아쉬운 건, 어릴 때부터 좀 더 단호하게 안 돼라고 선을 긋지 못한 모습이다. 아이들을 좀 더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키웠냈어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억압적인 부모상을 말한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약속한 것을 양보 없이 지키고, 아이가 슬쩍 넘어가고 싶어 하는 귀찮은 것이라도 하기로 했으면 그대로 하게 하는 단호한 모습을 말한다. 존중하는 태도를 지키면서 경계를 분명히 세우는 일이다.
일관성 있게 내 말은 지키는 것. 아무리 떼를 쓰고 매달려도 엄마가 말한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어야 했었다.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그런 단호함을 고수하려고 노력해 왔다. 덕분에 지금 사춘기 때도 그때의 훈육이 크게 도움이 되는 듯하다.
아들 6살 때 한국에 방문했을 때이다. 대학로에 어린이 공연을 보기로 하고, 근처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밥을 먹는 내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작은 식당에서 크게 혼냈다. 여행 중이라서 피곤 한 건 알았지만, 계속 아이패드를 보여달라고 떼쓰고, 말은 듣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아주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이의 확실한 잘못이 있었고, 나는 그걸 여행 중이고 이모네랑 같이 있다고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교육할 때는 일관적이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진다. 오히려 아이들을 헷갈리게 만들어 규칙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어 버리는 역효과가 나기 쉽다.
더 늦기 전에 제대로 교육하자 마음 확실히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서 망설임 없이 실천할 수 있었다. 좁은 식당에서 소리 내는 게 민폐 같아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 교육을 했다. 순순히 따라 나오려고 하지 않아서, 질질 끌 수는 없으니 번쩍 들고 나왔다. 그렇게 교육을 하느라 속도 상하고 밥은 제대로 못 먹었지만, 결국 공연은 재밌게 보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갔다.
원래 손님이 있거나 무언가 다른 환경일 때, 아이들은 부모가 평소와 같이 교육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태도가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엄마가 통화할 때를 틈타 귀신같이 게임시간을 더 받아내려고 한다. 손님들 앞에서는 "No"를 잘 못하니까 이것저것 본인이 원하는 걸 많이 얻어 갔었다. 나도 내 유희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허락하니까, 그게 그런 종류의 행동을 더 부추기는 양분이 되었다.
어느 순간, 내가 즐기는 순간의 달콤함이 아이의 인생을 삐뚤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즐겁게 하던 통화 잠깐 끊고, 지금 즐기던 커피 잠깐 내려놓고 아이에게 집중했다. 내 즐거운 시간이 방해받는 것은 슬펐지만, 지금 교육의 기회를 놓치면 걷잡을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뜨거운 커피가 식으면서 내 엔돌핀도 사라졌다. 하지만 내 잠시의 즐거움보다는 아이의 긴 인생이 더 중요했다.
한국에서 또래아이 키우던 언니는 다른 육아 스타일에 놀라는 듯했다. 우리 아들보다 1살 많고, 2살 적은 조카들이 그때 동석했었다. 뭐,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 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교육을 해야 했다. 사실, 나는 그 여행 동안 한국에서 거의 모든 부모가 아이들이 해달라는 다 맞추어 주는 듯한 분위기가 많이 불편했다. 아이의 기분에 온 집안 어른들이 다 맞추어야 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팽배해 있는 듯했다.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고을이 필요하다'는 건 마음 깊이 동의하지만, 그 뜻을 모든 걸 아이 한 명 기분에 맞추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본다. 아이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잘 성장할 수 있게 아주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다 맞추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꼰대의 손을 들어주는 말도 아니다. 중용이 필요하다.
그 중용을 지키지 못한 한국 사회가 몸살을 앓는 걸 모두 다 보지 않았는가. 2023년 7월,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이십대 교사가 자살하면서 교권침해 문제가 붉어졌다. 교사를 자살로 몰고 간 갑질 부모의 행동들은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때, 금쪽같은 자기 자식을 교육하지는 않고 타인에게 그것들을 전가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때부터 쏟아져 나온 여러 사례로, 그간 무시했던 현상들을 되짚어 보면 어느 한 교사나 학부모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 전반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걸 아이에게 맞추어 주면, 그 아이가 사회에 나와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좌절감은 어찌할까. 그때부터 다시 적응하려면 그간의 삶이 있기 때문에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 미리 세운 규칙을 엄마가 단호하게 지키려는 의지를 보일 때 아이는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구나" 하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느낀다고 한다. 내가 끈질기게 요청해 봐야 내 마음대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아이가 그 속에서 자기 조절력을 키울 수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 자기 조절력을 통해서, 책임감도 확실히 가르칠 수 있게 된다.
"오늘, 이제 더 이상 게임을 할 수 없는 건, 약속한 대로 청소를 안 해 놓아서 그런 거야. 약속대로 청소를 다 했으면 지금 게임을 할 수 있겠지. 너의 행동에 따라 다른 결과를 얻게 되는 거야."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이해를 시키면 아이들은 억울하더라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간 양육 과정에서 일관성을 지키지 않고, 약속대로 청소를 안 했지만, 오늘 한 번만 봐준다라고 허락한 경우가 종종 있으면, 아이가 엄마 말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겠는가? 듣는 척하다가, 지난번에 성공한 방식으로 엄마를 설득하려 할 테다. 혹시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우회로를 찾아볼 건 명백하다.
특히 엄마가 협박하듯이 소리 지르며 말만 하고, 떼쓰는 걸 듣기 싫어서 결국 아이의 말대로 들어주면 아이는 자기가 규칙에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어쨌건 자기 말을 관철시킬 기술을 연마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시험 공부하느라 바빴으니까, 손님이 왔었으니까, 아팠으니까 등등의 예외를 인정해 주기 시작하면 아이는 더 자주 핑곗거리를 찾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인이 "우리 애는 혼내는 데도 말을 안 듣는다."라고 푸념한적이 있다. 키즈카페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고 엄마들은 테이블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끼리 작은 트러블이 있었고, 그 지인은 자기 아들을 향해서 '하지 마'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을 못 했지만, 제대로 혼내는 모양이 아니어서 난 의아했다. 정말 혼낸 거라고 생각한 걸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높이 기는 했지만, 그냥 "하지 마~ 그거 하면 안 돼" 정도의 몇 마디 말만 날리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 뭐 하나, 아이를 그렇게 행동하는 곳에서 완전히 분리시켜서, '너 지금 이거 하지 말라는데 계속하면, 우리는 여기서 계속 놀 수 없다'는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혼내고, 아이한테 메시지를 주려면, 당장 엄마 몸이 움직여 아이를 그 공간에서 잠시 분리한 후,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말해야 한다. 지금 하지 말라는 그것을 안 하면 이렇게 재미있는 이곳을 당장 떠나야 한다고 아이가 알아듣게 말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하면 너무 유별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매번 그럴 필요가 없다. 한두 번 정도, 말뿐만 아니라 진짜로 놀던 곳을 급하게 떠나며, 엄마의 단호함을 보여주면 아이는 그런 상황에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 과정 중에 엄마가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면 안 된다. 아이에게 감정을 분출하는 게 아니라 교육하려는 것이다. 엄마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고 단호하게 대할 때에, 아이도 그것을 보고 그대로 배운다.
단호하면서도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말하는, 부드러운 표현을 연습하면 된다. "친구 밀지 않기로 약속했지? 그런데 네가 방금 친구 밀어서 그 친구가 넘어진 거 엄마가 봤어. 벌써 오늘 세 번째니까 이제 여기 더 있을 수 없어. 오늘은 지금 바로 가고, 다음번에 놀 때 그런 일이 없으면 계속 놀 수 있지." 아이는 본인 입장에서 억울한 걸 피력할 수도 있다. 그때 엄마의 단호함이 필요하다.
"그 친구가 먼저 밀었어."라고 아이가 억울함을 호소할 땐 "그걸 네가 밀기 전에 엄마한테 말하거나, 그 친구 엄마한테 말하든 했어야지, 네가 그 친구를 밀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똑같이 나쁜 행동을 한 거지." 내 아이 억울함을 들어주고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이해해 주기만 하며, 그 행동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아이를 금쪽이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문제가 있을 때에는 아이가 억울하지 않게, 너만 잘못했어라는 식으로 몰아가지 말고 다른 친구의 잘못도 인식하고, 그에 관해 적절한 제제를 마련하기도 해야 한다. 사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려면 너무 피곤하다. 아이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동시에 잘못된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지 않게 교육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냥 약육강식의 어린이들의 세계에서 알아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또래들과 놀기 시작하고, 사회성을 키울 때는 자기 행동에 자기가 책임질 수 있게 엄마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의 억울함이 있으면 풀어주고, 앞으로는 그런 억울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 행동 관리가 전혀 안 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가 있는 곳은 미리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만약에 그런 친구가 때문에 내 아이가 피해야한다면 당장에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런 친구들은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여러 아이들로부터 기피 대상이 된다. 그런데 억울한 우리 아이를 이해한답시고,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이해해 주고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단호하다는 말을 들을 때, 냉정할 것 같은 이미지도 따라오는 것 같다. 그러나 잘 구분해 보면 단호하다는 게 강압적이라는 것과는 크게 차이 난다. 단호함은 아이를 혼내거나 지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아이를 지키고,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연습시켜 주는 진정한 사랑의 한 모습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을 바른 행동과 인성으로 인해,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다. 내 아이가 놀이터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인정받고 함께 잘 어울리기 위해서는 여러 기술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바탕은 인성이다. 엄마와 아빠의 적절한 교육 아래 잘 단련된 아이들은 바른 인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인성은 어떤 자격과 기술보다 아이의 인생을 도와줄 고마운 동반자가 될 것이다.
육아에 있어서 "안 되는 건 끝까지 안돼"를 고수하는 신애라 배우가 언젠가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했던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다. 어렸을 때 자신의 행동을 제지받지 않은 아이가 오히려 불안감을 더 느낀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테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안정감을 가지게 해서,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특히, 아이들이 어릴 때 엄격하게 대하고, 이후 사춘기를 겪을 무렵에는 좀 더 풀어주고 아이들을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완전 동의한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릴 때는 오냐오냐,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들어주고, 세상이 그 아이 주변을 도는 것처럼 했는데 커서 이제는 네가 계속 그렇게 살 수 없다는 현실을 막 딱 뜨리게 되었을 때 쉽게 적응을 하겠는가? 안 그래도 질풍노도의 시기인데, 그런 격변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초등학교 입학해서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려 하지 않고 본인의 기분대로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요즘 많다는 이야기를 여려 매체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듣는다. 심지어 선생님이, "00가 전체 지시를 따르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다른 것만을 하려고 하는 일이 자주있다."라고 부모님께 전하자 "우리 아이는 시간이 좀 필요해요. 아이가 그때 하고 싶은걸 좀 예외적으로 허락해 주면 안 되나요?"라는 식의 답이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런 아이는 홈스쿨을 해야지 어떻게 20-30명이 한 반에 있는 상황에 그런 걸 요구할 수 있을까? 이 말도 오해해서, 아이들은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독재, 군사식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교실의 질서와 선생님의 지시를 따라야 스무 명이 넘는 학생을 한 명의 교사가 이끌어가는 교육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말랑하게 교육하던 유아시절을 지나, 학령기로 들어서면서 나는 단호하게 교육을 하려고 노력해 왔다. 물론 나도 일관성을 잃을 때도 가끔 있다.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엄마가 말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기본 인식이 몸에 배게 교육을 해야 한다. 십 년을 넘게 노력해도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나이가 변함에 따라 아이들의 성향도 변하고 환경도 변한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엄마가 멀리 있는 목표점으로 나아가면서 정확히 그쪽으로 나아가고 있냐를 확인해야 한다.
딸아이가 만으로 12살 때 이야기이다.
오후 4시에 가족여행을 출발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2시 즈음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와 서로 감정이 상했다. 전날 있었던 일로 딸아이를 가르쳐야 할 부분이 있어서 말을 꺼냈는데, 꺼내자마자 내용을 듣기도 전에 짜증을 낸다. 어제 한번 했던 이야기인데 제대로 받아들인 것 같지 않아서 그냥 지나 칠 수 없었다. 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 두 번째 이야기한 건데, 좀 억울했지만 사과했다. 집에 도착해서 차고 안에서 사과하고 좋게 얘기했다. 그 대화 도 중에 딸눈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뚝 떨어지는데, 울음 참는 거 같길래 한번 울고 나면 시원하다고 말했다. 울어도 된다고 하니까 더 심하게 화내면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화 엄청 내고 방에 들어가서는 나오질 않는다. 한 30분 뒤에 집에 왔던 이모가 나가는데 쪼르르 나온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평소처럼 말을 걸어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까 그렇게 화내고 들어가 놓고 나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다니.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우리 애틀랜타 갈 거면 이제 가기 전에 해야 할 숙제하고 가자고 했다. 그러니까 또 잔소리하는 표정 따라 하는 얼굴로 하고 방문 쿵 닫고 들어간다. 저 싹퉁바가지.
한 시간 뒤면 여행 출발한 시간인데 도저히 이렇게 가는 건 아닌 것 같다. 아직 밖은 환한데 딸 방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깜깜하다. 똑똑 한번 했을 때 ‘what?’ 그러길래 이제 여행 출발할 거면 아까 그렇게 화낸 거 사과하고 여행 짐 싸자고 이야기했다. 여전히 짜증을 낸다. 이러고 여행을 간다고?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여행 가는 차 안에서는 모두가 마음이 풀어져서 없었던 일로 구렁이 담 넘듯이,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갈 텐데. 이건 아니다.
특히 딸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나랑 감정이 상하면 아빠 옆에 딱 붙어서 아빠랑 더 친하게 놀고, 아빠한테 화나거나 혼나면 나한테 와서 애교 떨며 아빠는 내버려 두고 나와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처음엔 귀엽게 얘교로 봤고, 여우 같은 행동이 크게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커서도 자주 반복되니 좋지 않았다.
본인 마음대로 행동한 후,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제대로 지지 않고 회피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서로 긴장도 풀린다. 그러면서 어떤 반성도 없이 지나간 일들이 꽤나 많았다. 이제 이런 상태로 바로 여행을 떠나면 딸은 아빠한테 더 가까이 붙어 나랑 있었던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여행을 즐길 테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 여행을 취소할 수도 없고. 이게 문제였다. 호텔 예약도 미리 해놓았고, 이미 체크인 시간도 지나서 환불도 안 된다. 여행은 쉽게 취소할 수 없으니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종종 넘어간 적이 있었다. 딸은 지금도 여행을 갈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갈 시간까지 별생각 없이 기분대로 하고 있는 듯했다. 이모가 놀러 와서 있는 며칠 동안 또 점점 말을 안 들어서 나도 화가 차 올라 있었다. 멀리서 가족들이 놀러 왔으니, 조카들도 제 멋대로 행동하는 면이 있었으니, 그냥 비슷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모는 아까 떠났다. 우리도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 여행을 하면 평소보다 허용되는 게 많다. 조금 말을 안 들어도, 딸 아들 둘이 싸워도 제대로 교육하기보다는, 현상만 안 보이게 덮어놓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딸아이가 몇 시간 동안 보여준 태도나 요 며칠 버르장머리 없었던 것을 그냥 얼렁뚱땅 넘기고 여행을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여행을 취소할 수도 없다. 호텔비를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
결정했다. 기대하던 애틀랜타 2박 3일 여행은 취소되었다. 몇 백 불의 돈과 우리의 즐김 보다는 아이의 교육이 중요했다. 이런 식으로 몇 번 더 넘기면, 그냥 아이는 제 멋대로 하고 사는 버릇이 들지도 모른다. 나도 남편도 아이들도 기대하던 로드 트립이었다. 남편이 많이 아쉬워했지만 교육을 위해 설득했다. 아이에게 여행 취소를 통보했다.
짜증스럽게 '너 때문에 여행 못 가'라고 알리지 않았다. 딸을 조용히 불러내어 이야기했다. 조용히, 언성 높이지 않고, 나도 딸도 눈물 뚝뚝 흘리며 이야기했다. 왜 이 여행이 취소되었는지, 우리가 무얼 바꾸어야 할지 천천히 얘기했다. 엄마가 바꾸어야 할 것 있으면 짜증 내지 말고 알려달라, 그러면 바꾸려도 노력하겠다,라고 말한 후 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딸에게 바라는 것 이야기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고 말했다. 서로에 가 바라는 큰 줄기는 다음과 같았다.
7/31/2023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것
어떤 상황에 대해 안 좋을 것을 예상하고 discourage 하지 않기
이미 했던 얘기 다시 말하지 않기 (볼링장-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아라, 그냥 즐기면 된다. 그게 뭐 속상할 일이냐)
엄마가 딸에게 바라는 것
엄마가 같은 이야기 세 번 이상 한 거 아니면, 했던 얘기라고 화내지 않기- 두 번까지는 화 안 내고 들어보기.
엄마랑 싸우고 나서 아빠랑 더 많이 얘기하려고 하는 것 그만하기, 엄마랑 풀고 나서는 아빠랑 많이 놀아라. 만약 아빠랑 싸우고 나면 바로 엄마한테 와서 친한 척하지 않기, 먼저 아빠랑 풀고 와서 엄마랑 즐겁게 놀기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이모가 와 있는 동안 사촌 동생들이랑 부대끼며 좋았던 것과 불편한 것들 나누고, 엄마랑 이모랑 다른 양육스타일에 대한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화가 누그러들었다.
출발 예정시간이 두 시간 정도 지났다. 우리는 다시 여행 가도 될 것 같아서 남편한테 이야기했더니, 남편이 화를 낸다. 이미 호텔 다 취소했다고. 그냥 변덕 부린 거 아닌데. 진짜 안 가려고 했다가 상황 종료되어서 가자고 했는데.. 사실 딸, 아들, 나는 방학 때 여유롭게 지내고 있어서 이번 여행은 남편이 제일 기대했었다. 시간도 따로 빼놓고 기대했는데, 아까 딸 교육하느라고 못 가겠다고 했을 때는 좀 슬퍼했지만 이해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가자고 하니까 남편이 장난치냐고 화를 낸다. 아, 미안 남편. 자녀 교육은 어렵고, 기회비용도 크다. 나도 여행 가면 밥도 안 하고 맛난 거 먹고 아이들이랑 더 웃고 떠들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게 나도 진짜 아깝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면 역시나 잘 한 선택이었다. 남편한테는 미안했지만, 그 여행을 취소할 결단을 하고 딸 교육을 한 덕분에 지금 더 성숙하고 감정과 행동을 더 잘 조절할 수 있는 청소년이 된 것 같다. 화가 나도 바로 짜증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사회적인 인간으로, 내 감정을 조절해서 마구잡이로 분출되지 않도록 연습을 해 왔다. 만약 감정 조절에 실패하면 여행 취소 같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걸 확실히 배웠다.
너무 극단적이지 않냐고 의문을 가지는 분에게 묻겠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여행을 가서 아이가 잘못한 것을 흐지부지 넘어가고, 그것이 반복되면 아이는 어떤 행동을 몸에 지니고 살아갈 텐가. 아이의 행동을 입으로는 나무라면서도, 어떤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의지나 결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건 그냥 그런 행동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내가 그때 상황이 그래서, 제대로 혼내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는 것을 본다.
아마 미리 계획했고, 기대했던 여행을 취소할 수 없는 것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이다. 취소하기에는 돈이 아까워서 휴가 냈는데 아까워서 등의 이유가 있을 테고,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기회는 다음으로 미룬 것이다. 그럼 자녀 교육보다는 여행을 선택한 것이다. 본인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아들 6살 때 대학로 식당 에피소드와 딸 12살 때 여행취소는 나에게도 아주 극적인 예이다. 내가 매 순간 그렇게 단호하지는 못하다. 아직도 귀차니즘 때문에 말랑이가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정말 필요하고, 아이 교육을 위해 더 이상 물러나면 안 되겠다 싶을 때는, 감정 더 차분히 가라앉히고 단호하게 하려고 한다. 이제 사춘기 지나는 아이들이라 오 년 십 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어떤 모습이든 다만 나와 남편과 딸, 아들이 함께 시간 보내기를 즐기고 서로 마음으로 많이 의지하고 가까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필요에 의한 관계가 아니라 마음 다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춘기를 지나는 중이라 속이 상할 때가 많다. 말수가 줄어들 때도 있고, 친구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보면 서운할 때도 있다. 그래도 며칠에 한 번씩은 어릴 때처럼 침대에서 뒹굴고 놀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오랫동안 수다를 떨기도 해서 참 감사하다. 어릴 적 단호함이 있었기에 지금 이런 모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단호함을 위해서는 일단 우리 아이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메타인지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아이가 아주 어릴 적 내가 그러지 못했을 때와, 그 깨달음을 얻고 그에 관해 기록해 놓은 글들도 추천드립니다. 내로남불 in 육아)
나는 아직까지도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말랑함과 단호함을 오가며 줄타기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