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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엄마가 아이 키우는 법

육아 메타인지

by 여행하듯 살고

나는 대문자 P다. 여행할 때는 신나고 좋다. 계획 따위 필요 없다. 즉흥적으로 마음 가는 데로 하면 된다. (이런 P가 어떻게 여행하는지 궁금하시다면, 여기​)


그런데 육아에는 독약이었다. 아이들이 좀 커서 학교 다닐때에야 깨달았다. 아, 내가 P라서 육아가 유독 더 힘들었구나. J들이 육아에는 확실히 유리하겠다. 학교 시간 맞춰 보내는 것도 힘들고, 뭐 하나 안 빠트리고 가는 날이 없다. 미리 받은 가정통신문은 다시 봐야지하고 옆으로 치워 놓는다. 그러다 중요한 걸 놓치기도 다반사다.


딸이 고등학교 들어가는 이제서야 나도 노력형 J 모습을 갖추어져 간다. 카풀 스케줄은 특히 미리미리 확인한다. 조정이 필요하면 적어도 삼일 전에는 작업을 한다. 딸한테 수시로 변경 사항을 묻는다. 이제 늦는 법이 없으며, 누가 보면 날 J로 볼 것 같다는 뿌듯함도 장착했다.


지금의 모습이 있기까지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다.




이제는 일정을 알게 되자마자 핸드폰에 꼼꼼하게 모두 기록한다. 그래도 까먹을 수 있으니 한 이벤트당 알람도 3개씩 만든다. 그것도 모자라 왼손 엄지 기부 바깥쪽으로 타투를 달고 다닌다. 볼펜으로 적는 그 타투는 매일 내용이 바뀐다. 내 경험상 손바닥이나 손등보다는 그곳에 적는 게 효과가 좋다. 타인에게는 잘 안 보이고, 운전할 때 특히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손을 씻어도 손바닥에 쓴 거보다는 덜 지워진다.


끝이 아니다. 리마인더 앱에도 일정을 기록한다. 꼼꼼히 기록할수록 놓치지 않는 다는걸 제대로 학습했다. 해야 할 것을 잘 까먹기 때문에 카톡이나 이메일을 리미인더로 사용하기 위해 확인하지 않고 버틴다. 그 '읽지 않음' 표시가 또 하나의 리마인드다.


도시락 메뉴 때문에 항상 고민한다. 그런데도 미리 식단을 짜는 것은 싫다. 그에 맞추어 장도 철저히 계획적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 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꼭 장을 보러 가야 한다, 같은 것은 나에게 매우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다.


따라서 항상 대기하고 있는 장 봐야 할 리스트는 매우 갑자기 사용할 때가 대부분이다. 어쩌다 병원 볼일이 일찍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심방 갔다가 아이들 픽업 가기 전 잠깐 남는 시간에. 좋은 트레일에 러닝 갔다 오는 길에, 그 순간 기분이 땡기면 땀에 젖은 옷만 갈아입고 장을 보러 간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러 갈까 마음을 먹었어도, 안 갈 때도 많다. 그건 100% 그때 '마음 내킴'에 맡긴다. 그날 장을 안 보러 가도 큰일 안 난다. 굶어 죽지 않는다. 집에 든든한 냉동고가 있지 않은가. 어떤 계획된 스케줄을 지키려고, 마음 가지도 않는 일을 하면 안 된다. 물론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면 꼭 지켜야지. 하지만 장 보는 것에 나를 옭아맬 필요가 없다. 괜찮다.


그리고 장 보러 갔을 때 예상치 못하게 할인을 크게 하는 재료들이 있다. 그럼 엉성하게 생각해 놓았던 식단도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오징어가 유독 싸게 나온 날에는 고민 없이 왕창 사 온다. 그리고는 삼일 동안 오징어 파티를 한다. 오징어 볶음, 오징어 뭇국, 오징어 파전, 오징어 튀김 등등. 미리 식단을 짜봐야 도루묵이 될 것, 계획을 세워 무엇하나. 무계획이 내 계획이다.




P라서 육아에 좋은 것도 있다. 아이들이 어디서 더 놀겠다고 하면, 흔쾌히 허락한다. 뒤에 일정이야 바꾸면 된다. 뭐 꼭 중요한 거 아니고, 장 보러 가는 것 따위는 내일이나 며칠 뒤로 상관없을 때가 많다.


예전에 아이들이 어릴 때는 더 했다. 동물원에 놀러 가면서도, 수영복을 다 챙겼다. 동물원 가는 길에, 혹은 다 놀고 나오는 길에 수영장을 지나다가 갑자기 수영이 너무 하고 싶으면 어쩌겠는가. 집에 빨리 돌아가야 어차피 밥 잘 차려먹는 일 밖에 없다. 남편 퇴근하고 오면 저녁 대충 차려 먹으라고 하면 된다. 우린 피자로 때우며 수영장에서 내일이 없을 것처럼 또 불태우고 놀았다.


아들은 나보다 심한 P라서 체육복, 이름표를 수시로 안 들고 간다. 뿐만 아니라, 수영장에 도착해서야 신발을 안 신고 차에 탄 걸 발견하다. 아들은 보통 거라지에서 맨발로 차에 몸을 실은 후, 차에서 내릴 때야 신발을 신는다. 보통 차에 신발이 있으나 없더라도 20분을 달려간 뒤, 차에서 내릴 때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영복, 수건을 안 들고 다는 건 일상다반사다. 그래서 수영장 5분 거리에 있는 Ross (의류 잡화 할인점)에서 급하게 신발 2번, 수영복 2번, 수건 1번을 샀었다. 이제 수건은 사주지도 않는다. 안 들고 간 날이면 그냥 물 뚝뚝 떨어지는 채로 걸어 나와 차에 바로 탄다. 물론 그런 예상외 지출을 할 때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분담을 한다. 아들 통장에서 그 돈이 나가니, 아까워하는 척 하지만, 몇 주 내 그런 일이 재발하는 거 보면 크게 아깝진 않나 보다.


그런 아들을 보면 나를 보는 거 같아서 크게 뭐라 할 수도 없다. 아들의 그 구멍들을 이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아직까지 그런다. 자전거를 타러 가면서는 챙길 게 많다. 고글, 헬멧, 속도계, 물통, 충전이 완료된 전조등, 후미등, 선크림. 다 챙기고 나온 거 같은 데, 가다 보면 엉덩이가 아프다. 아뿔싸, 엉덩이 패드를 까먹었네. 그럼 다음번 탈 때는 엉덩이 패드부터 챙긴다. 그러고는 물병을 빠트린다.




멀리 여행을 가던, 당일치기로 바람 쐬러 가든, 심지어 그냥 공원에 가도, 꼭 빠뜨리고 온 게 있다. 그게 나의 기본 값이다. 그래서 웬만한 것에 당황하지 않는다. 이런 내가 마흔이 넘어서야 배운 것들이 있다.


예전엔 그걸 차에 미리 실어 놓아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필요한데 없으면, 그냥 다른 걸로 대충 때우면 되니까. 이가 없음 잇몸으로 잘 살 수 있다. 아들의 실수를 메꾸다 보니 차 트렁크에 항상 싣고 다니는 게 생겼다. 신발, 수영복, 물병, 비상식량,...


이제 아들이 차에서 내릴 때야, "신발이 없어"그래도 괜찮다. 씨-익 웃으며 트렁크에서 신발을 꺼내준다. 양말, 수건, 신발 없는 게 없다. 진작 그럴걸, 아들이 물건을 그렇게 놓고 다녀서, 급하게 근처에서 사고할 때도 바로 차에 여분으로 다 싣고 다닐 생각을 못했다.


최근에 우리 J 딸이 칭찬해 주었다.


“엄만 많이 빼먹고 다녀도 차에 항상 준비가 되어있어!”


어 고마워 딸, 이렇게 한지 이제 몇 개월 되어가나 봐ㅎㅎ 알아봐 주어 고마워


가끔 심방 갈 때도 곤란할 때가 있다. 유독 아침이 바쁜 날이었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는 곧바로 다른 일정을 계속해서 소화해야 한다. 그런데, 아뿔싸. 바쁘게 나오느라고 슬리퍼를 끌로 나왔다.


하지만 괜찮다. 차에 이미 실어 놓은 운동화가 있다. 옷에 좀 안 어울려도 슬리퍼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하하. 진화하는 내 모습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여전히, J처럼 계획을 꼼꼼히 세울 수 없다. 어디든 출발 전에 철저히 점검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건 나에게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나 비슷한 것이다. 아이들 학교 학사 일정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차다.


하지만 P 본성대로 살아가려니
구멍이 너무 많이 생긴다.
그 구멍이 결국은 나를 괴롭히니,
최소화시켜야 한다.




Photo by Mary Borozdina, https://unsplash.com/@mbacloud

그러기 위해서 생긴 습관이다.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나를 객관화시켜 부족한 것을 어떻게 막을지 고민한다.

기록, 알람, 리마인더로 꼼꼼히 계획하지 못하는 구멍을 막고, 차에 여분의 물건들을 미리 실어 놓아 출발 전 점검 스트레스를 줄인다.


오늘 남는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지는 않지만, 대충 하면 좋을 것 3가지를 미리 떠올린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그중 제일 마음이 가는 곳으로 움직인다. 어떨 때는 미리 떠올려 놓은 3가지에는 없던, 새로운 걸 한다. 그러면 더 즐겁기도 하니까. 이런 나를 허용해 준다.


이게 구멍 막으며

P 엄마가 가까스로 육아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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