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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Apr 24. 2023

밥 먹을 권리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스무한 번째 편지



매일매일 뭐 해 먹고살지 궁리하는 것도 얼마나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인지, 주부생활 어언 7년 차 접어든 엄마는 오늘 저녁 메뉴 정하는 것도 녹록지가 않다. 맨 그게 그거인 듯해도 고기, 생선, 볶음, 덮밥 이 변주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물리지 않게 적절히 배치하려면 이것도 꽤 생각을 해야 하고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그야말로 오랜만에 좀 특별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 뭘 먹을지 메시지로 고민을 주고받는다. 친구나 지인, 가족의 모임의 핵심은 또 뭐니 뭐니 해도 뭘 먹을지, 뭘 먹어야 모두가 만족할지가 되고 또 성공적으로 선정된 메뉴에 따라 분위기가 좌우지되기도 한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먹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너무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 오늘 저녁을 뭘 먹지? 하는 너의 아빠가 주책스러운 게 아니라 -엄마가 핀잔을 주긴 했지만- 무언가 먹을 궁리를 우리는 늘 하고 있는 거야. 이렇듯 삶에 중대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밥 먹고 간식 먹고 차 마시는 행위, 먹는 행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부담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특별히 입이 짧거나 아주 극소수의 식탐이 전혀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매스컴은 천 원짜리 학식에 대해 많이 다루더구나. 주로 대학교의 교내 식당에서 파는 음식을 학식이라고 하지. 그 식사를 하루 한 끼 천 원이면 학생들이 먹을 수가 있는데 이 학식을 먹으려고 식당이 문이 열기 전부터 많은 학생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료소진이나 받을 수 있는 정원이 차서 마감을 하는데, 워낙 저렴하다 보니 무한대로 제공할 수는 없는 형편인가 보지? 예산의 일정 부분은 학교와 정부에서 담당하고 남는 나머지, 천 원을 학생이 지불하는 방식으로 운영을 한다만 이조차도 운영하는 학교가 몇 안 되는가 봐. 한 학생이 하루 두 끼 먹을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는 뉴스의 갈무리 영상을 보고 당연하게 굳어진 세끼는 고사한 두 끼의 권리 주장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엄마가 대학생이었던 2000년대 초반에는 학생식당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적었어. 물론 엄마 과의 특성일 수도 있었겠지만. 예술대 옆에 먹자골목이 있었고 학교 밖을 나가면 가지각색의 식당들이 넘쳐났다. 가격도 중요하지. 지금도 기억한다만 자주 이용하던 먹자골목의 평균 한 끼 식사비용은 2,500원, 학생식당보다 몇백 원 더 지불하면 더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으니 학생 식당을 찾을 이유가 별로 없었다. 요즘 한 끼 식사비용을 고려한다면 엄청나게 저렴하다 할 수 있고 사실 그 당시에도 밥값이 비싸서 밥을 못 먹을 정도의 식당물가도 아니었단 말이지. 한창 먹을 시기의 20대 청년들에게 별로 부담 없는 가격으로 끼니를 제공할 수준이 됐다면 지금은 하루 두 끼도 못 챙겨 먹을 만큼 먹는 비용이 상승했다는 거겠지.


얼마 전, '편의점 도시락으로 하루 세끼를 먹는다면 우리 몸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에 관한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거기서 엄마는 전혀 다른 쪽으로, 청년들의 일상적 '밥'의 문제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실험에 참가한 몇 명의 청년들은 거의 대학생이었고 그들은 평소에도 편의점 도시락을 일상적으로 먹어왔더구나. 식당밥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도시락이기에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지. 물론 편의점에는 과일도 있고 팩에 든 채소 샐러드도 있었다. 그러나 '가성비'를 따져야 하는 그들에게 같은 값이면 배부르고 든든한 도시락으로 손이 갈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중 한 청년의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다'라고 하는 말에서 혹시 사회의 빈약계층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우려를 씻었고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도 겪는 보통의 문제라는 것에 더 심각함을 느꼈달까. 학자금 대출에 치이고 비싼 등록금에 치이고 비싼 물가에 치여서 하루 밥 한 끼 건강하게 먹지 못하는 현실을 나에게 알려줬다. 나와는 멀어서 알 수 없었던 20대 청년들의 팍팍한 삶이 또 다른 결의 생소함으로 다가왔다.



밥 먹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계층은 또 있는 것 같다. 60,70이 넘은 혼자 사는 남자노인들. 그들은 손수 밥해 먹는 일을 평생 해보지 않아 생활에 엄청난 애로가 있었다. 사회복지사들도 그들에게 먼저 밥 짓는 교육을 한다고 해.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간단한 반찬을 하고. 나 스스로 그것을 해결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방법은 처음 얼마간은 되더라도 식문제의 궁극적인 해결방안은 아닌가 봐. 또한 내 손으로 내 먹을 것을 장만하는 것은 자립과 자존에 아주 큰 축이라는 것이다. 나를 돌보는 행위의 첫째가 스스로 밥을 해 먹는 거지. 내 입에 넣을, 내 몸에 주입할 밥을 건강한 식재료로 손수 지어 나에게 주는 것. 그것은 나의 자존을 세우고 자립함에 있어 첫 번째가 되어야 할 과제임이 자명하다. 끼니를 위한 요리를, 노력을 한다는 것은 전반적인 나의 일상을 보살피고 돌보는데 그래서 삶의 만족도와 행복도를 높이는데 가장 우선되는 일이기 때문이야.


혼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입에 넣을 것을 대충 한다. 엄마도 혼자 먹을 때가 되면 꼭 대충 먹어치우고 말지 나를 위해서 씻고 조리하고 차려내고는 잘 되지 않더라고. 쉬는 때가 되면 점심을 매번 라면을 끓이는 너의 아빠에게 라면이 그렇게 좋냐, 밥 놔두고 늘 라면을 끓이네 하는 나에게 차려줘야 먹지! 한다. 누군가 -당연히 아내다-차려주지 않고 제 손으로 먹기 귀찮으니 라면을 먹는단 얘기야. 엄마는 그때 한 프랑스 영화를 떠 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목이 기억이 안 나서 안타깝다만 영화 중반의 어느 장면이었어. 밖에서 일을 하고 또 덤으로 가출한 가족을 찾으러 헤메 다니다가 지쳐 밤늦게 집으로 들어온 남편이 손을 씻고 '아직도 저녁을 못 먹었어' 하면서 자기 먹을 음식을 냉장고에서 찾아서 마련하더구나. 언뜻 보면 일상적인 이 장면이 엄마에겐 너무나 놀라웠다! 이 문화적 충격이라니!

우리나라 같으면 어땠을까? 식탁에 남편의 식사가 차려져 있던지, 아니면 아직 저녁 전이란 말을 들은 아내가 서둘러 냉장고 뒤짐을 해야 하겠지. 온종일 집에 있던 그 프랑스인 부인은 어떠한 한국적 죄책감을 갖지 않고 저녁준비를 하는 남편 옆에서 전혀 도와주는 일 없이 대사를 해나갔다. '네 남편 오늘 무지 힘들었는데 저녁 좀 차려주지~!' 하며 민망한 마음이 드는 나는 뼛속까지 K-와이프인 걸까, 참...

어떤 상황이라도 내 몸을 지탱해 줄 내 입으로 들어갈 음식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내 손으로 마련하는 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행동이 문화가 되어 우리의 몸에도 배게 하기 위해서 엄마는 어릴 때부터 너에게 그것을 스스로 하도록 독려를 해야겠구나.


뭐, 매끼 잘해 먹는다는 것은 보통의 노력으로는 힘든 일이야. 가끔은 인스턴트와 배달음식도 먹고 외식도 해야 하지만 자신의 끼니를 기본적으로 잘 돌볼 필요가 있다. 의식적으로 채소와 과일을 챙기고 물을 많이 마시고 내 밥상이 자연에 가까운지 살피고. 그런 것도 너를 대하는 정성스러움의 하나로서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으면 좋겠지.


엄마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지금의 물가가 청년들의 밥상을 저질로 만드는 원인이 되더라도 그 속에서 자신들을 잘 돌보는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버릇이 되지 않은 손수 지은 밥상을 손수 받는 것에 의식적으로 길들여져서 건강과 재정 모두를 좀 더 잘 다독이며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청년시절 자신들이 겪었던 밥 한 끼의 절실함을 마음에 새기는 따뜻한 어른이 되면 좋겠다.

밥 잘 먹는 것도 인간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야. 재정을 더 투여하고 동참하는 대학들이 더 많아져 청년들이 하루 한 끼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넓어져야 할 텐데. 여러 복합적 요소들로 밥 한 끼의 권리가 소원해지고 있는 요즘을 보니 밥문제도 충분한 사회문제가 됨을 다시금 알게 된다.



독일에서의 생활물가가 아주 쌌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돈이 없어 못 먹고 건강을 잃을 수 없기에 소위 '마트물가'를 정부가 엄격히 관리한다.

예술가 교류 프로젝트로 부산에 온 독일 함부르크의 예술가들이 자신들이 짜온 예산보다 엄청나게 높은 여기 물가 때문에, 특히 채식주의자였던 그들이 비싼 채소나 과일값 때문에 재정적 곤란을 겪던 일이 떠오른다.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니 지금 오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듯하다. 채식을 할 수 있는 식당을 골라주고 메뉴를 골라주고 하는 일이 아니라 5년 만에 더 치솟은 물가의 넋두리를 오히려 그들에게 해야 할 판이다.

(그때도 와 비씨다~ 하던 하나 천  원하던 오이가 지금은 세 개 오천 원, 도대체 오이가 그렇게 비싸야 하는 이유가 뭘까. 예를 들어 오이지만 파프리카, 양배추, 파 등 즐겨 먹는 채소들의 비싼 가격은 농산물 유통의 구조적 문제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채소 한번 맘껏 먹어봤으면!)


맛 좋고 가짓수 다양하게 양 푸짐하고 가격까지 착한, 평범한 한식이 다시금 큰 자랑이 되는 날이 이제는 올까,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드는 저녁이다.




APR. 2023. 엄마의 스무한 번째 편지.




설거지는 아빠가. 엄마가 찍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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