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하루하루는, 그 유명한 관용구대로,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하다. 특별히 약속이 있거나 볼일이 있지 않는 이상 집 주변을 떠나지도 않고 매일의 일과를 그저 몸에 익은 루틴대로 소화해 나간다. 어느 날은 산에 다녀와서 씻고 물 한잔 마시려는데 설핏, 아 좀 지겨운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지금 정말 별일 없는 일상을 누리고 있구나.' 거의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다.
그래 엄마는 일상을 '누리고'있다. 별로 불행한 일 없이, 크게 아픈데 없이, 마땅히 불변한 데 없이, 누구와도 사소한 갈등 없이, 불안과 조급함 없이. 매일을 똑같은 장소를 다니고 같은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작은 감정기복을 느끼며 일상을 누린다.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처럼.
엄마가 이 일상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적이 있지? 몸이 아플 때. 아프지 않던 어제의 내가 간절하고 아무렇지 않던 내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 절절함을 편지에 담았었다. 지겹다고 생각이 든 저 순간, 그래서 내가 가진 무탈한 일상이 곧 행복임을 또한 자각할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며칠 전, '행복하다' 느낀 순간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산에 다녀오고 씻고 물도 마시고. 이불정리에 장난감 정리를 하고 맛난 라테 한잔 만들어서 랩톱 앞에 힘든 몸을 푹 앉히며 '아 행복하다'라고 내가 생각했는데.
늘 과거의 일인 줄 알았던, 또 저기 먼 중동이나 아프리카지역의 내전으로만 들어오던 전쟁이라는 것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발되어 지금 벌써 일 년을 넘겼다. 가끔 매스컴으로 보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파괴된 일상에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상실의 아픔을 느꼈어. 평생을 살던 집이 파괴되어 형채만 겨우 유지한 채 위태위태한데, 그 속에 몇십 년을 매일 썼을 식탁과 소파와 침대는 무너진 건물의 파편으로 뒤덮였고, 유리가 다 깨져나간 창의 자리에 어설프게 친 비닐은 혹한의 추위를 전혀 막아주지 못하는데도 또 물과 전기가 없는데도 자신의 그 망가진 터전을 떠나지 못하여 서성이는 노파의 억눌린 울음은 가슴에 각인되어 떠나지 않는다. 글로벌 리포터가 자국의 전황을 알리며 "제가 무사하다면 다음 주에도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하는데, 그 고된 일상의 여음에, 사람 한 세상 산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이 한평생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몇 달 전이다. 당시 좋아하던 인터뷰 프로그램에 한 남자 배우가 출현했어. 그 사람은 자신의 딸과 관련된 말들을 하다가 그 딸은 자기에게 진짜 고마워해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줬으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냐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와 진짜 못 말리는 낙천주의자다 생각을 했어.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이 세상에 너를 소환하는 것이 미안한 일이 될까 봐 염려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못 말리는 염세주의자였던 것일까.
그 전의 나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기적이란 말의 의미를 전혀 몰랐어. 일상의 위대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삶이었지. 오늘 당장 죽어도 별로 여한 없고 별로 억울함 없는, 삶을 그렇게 악착같이 살 필요가 없단 인식의 바탕은 삶의 긍정성이 아니라 부정성에 무게가 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일까 하는 것에 완전한 긍정이 되진 않아. 오늘 당장 죽어도 별로 여한 없고 별로 억울함 없는 것에는 변함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성격이 옮겨 오긴 했어.
(나의 삶은, 그것이 얼마 큼이든 내 몫만큼만 살지 더 살고자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질 그 어떤 절대적인 가치도 대상도 없다는 것을 알고 그저 주어진 오늘을 충실히 살고 오늘의 안녕을 감사하며 오늘을 살면 그만이다.)
지진이 나고, 산불이 나고, 교통사고가 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사건사고 속에서, 예측불허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그 많은 재난 속에서, 터전을 잃고 살아온 전부를 잃은 사람들이 산재한 속에서, 내가 아무 일도 없이 무사하게 아침에 눈을 떴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기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리 알아채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감사가 지겹고 초라했던 내 일상을 행복과 경이로 받아들이는 기적이 되는 게 아니겠니.
네가 이처럼 건강하고 무탈한데 네가 떼를 쓰고 울며불며 소리 질러 네 목이 좀 쉬고 내 신경을 좀 긁는 것이 무슨 대수겠니.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기싸움에 번번이 내가 웃고 마는 것은 네가 이리도 무탈한데 내가 내 성질 죽이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깊은 자각에서 왔다.
또한 내가 이처럼 무사하고 안녕한데, 나의 주변에는, (내가 자각만 한다면) 나를 위한 좋은 것들이 널려있는데 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 또한 어디에 있겠니.
지진으로 산불로 홍수로 터전을 잃어도 어디 한 군데 애끓는 마음 온전히 풀 데 없이 묵묵히 새로이 일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터에서 가족을 잃고 일터에서, 등굣길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잃어도 또 남은 사람은 일상을 다시 이어가야 하는 순간이 온다. 믿을 수 없이 내 가까이에서 또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나의 안녕은 실로 기적과도 같은 일임을 인정해야겠지. 나에게도 혹여 찾아들 고통의 막중한 무게도 그저 그 질량만큼 삭혀내고 극복해 내는 것이 나를 포함한 우리가, 인간이 사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짓밟혀도 또 일어서는 것은 생명이 가진 본질이다.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힘에 의해 어긋나도 종내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내부의 그 본성으로 그렇게 순응하며 만족하며 인정하며 일상이라는 이름아래, 어쩌면 무심히, '그저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생명의 길이며, 사람 한 세상 사는 것의 의미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장기하라는 가수가 있다. 그의 유명한 노래 중에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하는 후렴구가 있는데 이런 가사를 쓴 경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수의 어머니는 동창으로부터 가끔 요즘 별일 없어?라는 소리를 듣는데 그 뉘앙스는 사건사고를 기대하는 은근한 질시였다고 해. 그들에게 가장 김 빠지는 대답은 바로, "나는 별일 없이 살아. 별다른 걱정도 없고, 나는 사는 게 재밌어."
요새 어째 지내? 하고 가끔 통화하는 친구들이 묻는 물음에 별 의미 없이, 나야 항상 똑같지 뭐~ 밖에 할 줄 모르던 엄마는 요새 문자 그대로 매일을 항상 똑같이 잘 살고 있어. 되풀이되는 일상도 -뭐 어쩌다 지겹다 생각이 들어서 장문의 편지를 너에게 보내는 일이 생겼지만- 사실 엄마는 참 재미있어하면서 '누리고' 있다. 별일 없이 사는 것의 감사함을 이제는 깊이 알아서 엄마는 매일 산의 정상을 찍고 내려오면서 마음속의 되뇜을 잊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그저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충실히 살겠습니다.'
이제는 슬슬 전시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수개월간 재미난 일상을 보내고 충전을 잘했으니 이제 일을 좀 하더라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작가에겐 작업이 일상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좀 게으른 작가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쪽도 저쪽도 똑같이 내 삶인걸.
두껍게 쌓였을 작업실의 먼지를 털어내며 새로운 일상을 준비해야지. 작업에 깊이 집중할 때 느끼는 말 못 할 편안함과 지금의 재미난 자유를 잠깐 바꿔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