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중 「이모」>
토요일, 늦잠 자고 일어났다. 어제 먹은 설거지에 빨랫감이 잔뜩 쌓여있지만 일단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는다. 대충 배를 채우고 세탁기를 돌렸다. 그리고 쌓인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 혼자 먹고 몇 개 되지도 않는 설거지도 귀찮네. 식기세척기는 정말 편할까. 겨우 이 정도로 무슨, 이라고 생각하다가 몇 달 전 식기세척기를 구매했다는 친구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와, 드디어 3대 이모님 -로봇청소기, 건조기, 식기세척기- 장만했구나!” 평소에 인지하지 못했는데 3대 이모님이라는 표현이 갑자기 정말 폭력적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도 이모다. 조카들에게 큰이모로 불리고 가게에서는 이모님이라고 불린다. 권여선의 「이모」를 읽으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떠올렸다. 아주 오랫동안 가족의 빚을 갚았고 이젠 나와 동생의 노년을 위해 돈을 모으는 엄마. 꾸부정한 걸음에 이제 할머니라 불림에도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는 엄마가 이모와 닮아서 마음이 저릿하고 먹먹하다.
이모는 일평생 가족을 부양했다. 혼자 살 결심을 했을 때 그녀 나이 쉰 살에 가까웠다. 그녀 자신을 위해 살아온 시간 겨우 2년 남짓. 그녀는 5년간 동생들의 생활비와 대학 학비를 댔고 그녀의 엄마가 자신 몰래 그녀의 이름으로 남동생의 보증을 서는 바람에 10년간 빚을 갚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신용불량자로 10년을 살았다. 빚을 다 갚아 주고 나서야 혼자 살 결심을 한 그녀.
“누구한테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고 차라리 자기가 손해를 보고 마는 성격이지.”
자기 언니에 대해 말하던 시어머니의 말이다. 나는 그 말이 마치 언니는 그래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일찍 결혼하고 친정이 싫어서 결혼 후 친정에 발길을 끊었다던 동생과 언니는 뭐가 달랐을까.
이모가 편지 한 장만 써놓고 사라졌을 때 시어머니가 느낀 감정. 다 평범한 말뿐이었는데 이상하게 무섭고 서럽다던 그 말. 그게 뭔지 궁금하다는 말. 나는 그 감정이 마치 숨을 곳이 사라지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언니 대신 내가 희생돼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같은. 누구도 그녀와 짐을 나누지 않았다. 가족조차도. 왜, 함부로, 한 여자의 인생을 그렇게 당연하게 희생시켰을까.
“이모는 5년여 동안 1억 5천만 원 정도를 모았는데 1억은 아파트의 보증금으로 넣고, 남은 5천만 원으로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볼 생각이었다. 혼자 사는 건 그녀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5천만 원으로 제멋대로 살기 위해 이모는 한 달 생활비로 35만 원만 썼다. 다시는 가장이 되지 않으려고 딱 35만 원만. 이모는 결국 5천만 원도 제멋대로 다 쓰지 못하고 췌장암으로 죽었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가족과 인연도 끊고 35만 원만 써야 했을 그녀에겐 친구를 사귀는 일도, 만나는 일도 무리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편했을지도. 그녀를 주체적으로 살게 한 것은 ‘관계없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생전 관계도 없던 조카며느리를 선뜻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도서관이 쉬는 월요일을 만나는 날로 정한 이모에게 도서관은 그녀가 그토록 끊어냈던 사람과의 정을 느끼고, 관계를 맺는 곳은 아니었을까.
“나를 절대 찾지 마라, 당분간 모든 관계를 끊고 살겠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마음이 변하면 돌아오겠다.”
이모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당분간.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마음이 변하면 돌아오겠다. 이모는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가족에게서 자유롭지 못했다. 췌장암을 앓던 이모는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냐며 하소연하지도 않았다. 죽음이야말로 해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죽었다. 자신을 위해 악착같이 모은 돈도 다 나눠주고 홀가분하게 떠났다. 이제 정말 가족에게서 해방되었다.
이모를 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삶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하찮은 것이 살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이니. 치워버리고 싶은 어떤 날, 타인을 향해 느꼈던 분노, 이모가 주체적으로 발산한 감정의 해소. 그래서 살아진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