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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May 23. 2022

책을 덮고서야 가슴이 뛰었다

<가슴 뛰는 소설> 창비



“아름다웠다. … 가슴이 뛰었다.”

믿고 읽는 작가 9인이 전하는 사랑의 순간 

_ 책 소개에서



형광 분홍 표지에 낚였다. 제목은 또 어떻고. 가슴 뛰는. 내가 느낀 이 수식어는 고백할 걸 눈치채고도 모른 척 고백하길 기다리는 설렘 같은 거였다. 설렘을 기대하며 작정하고 읽을 참이었는데 웬걸. 읽다 보니 사랑에 나대는 심장이 보호막 하나 없이 아스팔트 위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이 소설의 스토리는 표지 색처럼 쉽게 소화하기 힘들었다. 사랑이 너무나도 지지리 궁상에 처절했다. 한여름 지하철 안 모르는 이의 팔뚝이 내 팔뚝에 닿은 듯 움찔거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분명 가슴 뛸 만한 소설이다. ‘믿고 읽는’. 9인의 작가 앞에 당당하게 붙을만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이 이런 거구나. 그렇게 엉뚱한 곳에서 가슴이 뛰었다.      


시청하는 드라마가 바뀔 때마다 내 이상형도 바뀌었다. 나는 도깨비 신부 지은탁이기도,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이기도 했다. 아무리 구질구질한 환경이라도 사랑은 아름다웠고 두근거렸다. 몸빼바지에 늘어진 찜질방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게 내가 원하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드라마 같길 원했다. 이 소설의 사랑도 그러길 바랐다. 나는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려는 자와 밀리지 않으려는 자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버티고 버티다 이 책을 덮고 나서야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름이 곧 신뢰인 작가들의 언어 부림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사랑은 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곳에서도 피어났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었다. 햇빛 찬란하게 비쳐오는 동화 같은 집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온갖 벌레가 기어 다니는 눅눅한 천장 위에서도 기어코 피어났다. 사랑은 실로 생명력이 강했다.     

누구나 그랬을 때가 있다. 남들이 보면 지지리 궁상인데 그들은 진정한 사랑일 때. 사랑이라는 감정을 빼고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어 피하고 싶으나 사랑 때문에 이게 뭐 어때서가 되는 때. 무르익지 않아 풋풋하고 두려움도 거칠 것도 없는 때. 나중에야 내가 미쳤지, 하고 허공에 발을 구를 때.     


사랑이 무엇일까. 나는 왜 사랑을 제한했을까. 사랑마저 사랑해도 되는 외모, 직업, 성격, 나이, 환경, 조건 등을 갖춰야만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었나. 책을 읽는 내내 자로 재어가며 인물을 바라봤다. 네 형편에 사랑은 무슨!, 네가 지금 사랑할 때야?. 잔소리만 나왔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똑같지만, 사랑을 바라보는 감정은 누구나 같지 않음을 느꼈다.      


예쁜 사랑 하세요. 왠지 낯설다. 예뻐야 사랑인가. 아름다워야만 사랑인가. 예쁘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예쁘고 아름다워지는 마법. 사랑 앞에 어떤 말이 붙든 사랑은 사랑이다. 메이크업을 해도 메이크업을 지워도 내가 나이듯.     


누가(*) 그랬다. 사람이 사랑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슨 감정이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어서라고. 사랑하면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라고.

그제야 선명하게 그어둔 '가슴 뛰는' 이 말의 경계가 사라졌다.



사랑이라 말하기 억울한데 나도 궁상맞은 사랑을 했었다. 형광 주황 반바지. 발꼬락 튀어나온 삼선 슬리퍼의 맨발. 면도기로 깍은 다리털이 스포츠머리처럼 올라왔지만 무엇이 그리 당당한지 내 손을 잡고 홍대를 누비던 그... 아.... 으악!!!! 걷다 삼선 슬리퍼가 끊어졌지. 제기....ㄹ.... "여기서 기다려 내가 신발 사올게" 하며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데. 눈치 없이 "같이가" 했던. 슬리퍼 밑창을 땅바닥에 딱 붙여 걷는 널 보며 정말이지 얼굴이 타들어가는 줄 알았지. 그때 돌아서야 했는데. 내가 미쳤지. 나 진짜 그때 괜찮지 않았다. 끊어진 삼선 슬리퍼. 맨발. 네 털쯤은. 





(*) 소설가 김나정 교수님♥


학과 동아리 <북적북적 소설 방> 첫 모임에서 나눈 <가슴 뛰는 소설> 작품을 읽은 느낌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끊어진삼선슬리퍼맨발다리털남'이 댓글에 많이 등장하면 답글을 남길 때마다 '끊어진삼선슬리퍼맨발다리털남'을 떠올려야 하니 되도록이면.......... 




가슴 뛰는 소설 중 <햄릿 어떠세요?>,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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