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쓰당

비가 오니 나가지 않을 것이지만

by 좋으니



비가 오니 나가지 않을 것이지만



긴 장마가 시작되었다 커튼으로 집을 가렸다 비가 오니 나가지 않을 것이지만 새벽마다 현관문을 열었다 물에 빠진 건빵 같은 택배 상자가 곧 걸쭉해질 모양새였다 아직 비가 오는 중이네, 다시 문을 닫았다 비닐이 썩는 데 한 오백 년 쯤은 걸린다지만 비닐이 없었다면 오늘 굶었을 것인데 그렇다고 썩 고마운 것도 없다

세상 참 좋아졌다 나갈 일 없으니 좋다 입은 먹을 때나 열어도 되니 좋다 지네들만 재밌는 이야기 안 들으니 좋다 이렇게 있다간 늙지도 않고 보존될 것 같으니 좋다


잠깐 커튼 걷어본다 마침 빨래도 해야 하니까 불투명한 햇빛이라도 보고 싶다 비 맞는 화분이 발효된 곰팡이처럼 흙을 토해내고 있는데 창밖은 공기가 없는 것 같다 비가 오니 나가지 않을 것이지만 세탁기에서 갓 꺼낸 빨랫감이 내 몫의 숨까지 다 빨아드리는 것 같아 횡격막이 아플 때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비 내리는 밤 횡단보도 앞이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색은 후르츠칵테일 통조림 속에 으스러진 체리 색이었고 예쁘기만 한 색이 핏방울처럼 땅 위에 툭툭 고이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거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에만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아는 척도 않고 서있습니다 당연히 자연스럽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이 다 같이 움직입니다 나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요






현직 작가에게 배우는 진짜 글쓰기_온라인 창작 클래스 <세작교>

시인 김상혁과 함께하는 시(詩)그날 첫 번째 시


표시는 시를 읽을 때 연과 연이 연결 되지 않으면 독자들이 조바심 날 수 있기 때문에 시 앞에 *(별표)등의 특수 문자를 사용하는 시인의 예를 들면서 특수 문자를 넣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피드백 주셔서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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