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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Dec 22. 2021

단지 사랑이었다.

자꾸만 뒤돌아보며 알게된 것들

어느 날 우리 집에 아빠 친구가 찾아오셨다. 그리고 내게 쪽지 한 장을 주시면서 아빠에게 전해달라고 하셨다. 열어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보고 말았다. 빨리 돈 갚으라는 내용이 분노 가득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주먹 한번 쥐면 맥없이 구겨질 그 쪽지 한 장에 나는 잔뜩 겁을 먹었다. 내내 불안한 마음 때문에 아빠가 오자마자 전해주었다. 그리고 일부러 “아빠, 뭐라고 쓰여 있어요?”라며 물었다. 혹시라도 내가 그 쪽지를 읽었단 걸 안다면 아빠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서였다. 아빠는 내게 “아빠 친구가 아빠 잘 지내냐고⋯”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아무 일 아닌 척하셨지만, 그 쪽지를 읽던 아빠의 모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그림자처럼 쓸쓸하게 남아있다.


그 후로 엄마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마당 한쪽 벽에 기대어 세상 서럽게 울던 엄마의 모습은 나를 일찍 철들게 했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와 동생들, 막내 이모의 아이들까지 6명을 키워내셨다. 그리고 부업으로 온종일 마늘을 까셨다. 물에 불린 마늘은 빨간 고무 대야에 가득 쌓여 하루, 이틀, 몇 년이 지나도 줄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손은 붓고 터서 볼품없었다. 아무리 로션을 발라도 엄마의 손은 추운 겨울을 이기지 못했다. 틈틈이 엄마를 돕던 내 손도 엄마 손을 닮아 볼품없어졌다.


그런데도 엄마와 마주 앉아 마늘 까던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축축한 껍질 벗은 뽀얀 마늘이 고무 대야에 통통 부딪히며 쌓여가는 소리만 들렸는데도 엄마가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하루 꼬박 걸려 번 돈은 고작 몇만 원이었다. 엄마의 예쁜 손과 맞바꾼 그 돈은 내 문제집, 육성회비, 준비물이 되어 정붙일 틈도 없이 사라졌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돈을 건네는 엄마 손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천근만근이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내 가정 형편은 내 꿈을 응원해주지 못했다. 많은 사람에게 “동생이 그러니 너라도 잘돼야 한다”라는 당부를 듣고 자랐다. 안타깝게 바라보던 눈빛도 쓰다듬는 손길도 모두 부담이었다. 잘돼야 한다던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취업하길 원했다. 내가 대학을 가지 않고 일찍 돈 버는 것이 잘 되는 것이었구나. 상처였다. 기대도, 당부도, 눈빛도, 모두 무게를 잴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실로 무겁게도 나를 짓눌렀다.


나는 엄마, 아빠의 기대였다.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엄마, 아빠만큼은 내게 한 번도 부담 주지 않으셨다. 언제나 내게 아낌없으셨는데도 늘 못 해줘서 미안하다는 부모님이셨다. 당시 전교 꼴등에서 1등 만들어준다는 엠씨스퀘어도 사주셨고, 삼성 마이마이도 사주셨고, 한 반에 몇 명 없었던 최고급 삼성 컴퓨터도 사주셨다. 오랫동안 그 돈을 갚아오셨을 텐데 가족 대신 누려왔던 혼자만의 풍요를 고작 말 없는 기대로 느꼈던 어린 날의 내 모습이 참으로 밉다.


이런 사랑을 받고 자랐음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엄마, 아빠, 동생, 사람들의 당부, 스스로의 다짐은 내게 불안과 우울을 안겨주었다. 책임감은 나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것 같았다. 가장 빛나야 할 나이에 나는 가장 불행했다.


불행이 나를 휘감을 때마다 나를 붙잡은 건 엄마였다. 고통에 방바닥을 쥐어뜯는 순간에도 엄마가 떠올랐다. 내가 없으면 우리 엄마는 어떡하지? 나 하나 보고 사는 엄마의 삶을 더 끔찍하게 할 수 없었다. 엄마가 견뎌온 시간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한들 엄마만큼은 아닐 테니까. 나를 생각하며 버텨왔을 엄마 때문에 나도 견뎌냈다.


가난했던 시절은 퍽퍽했고 버거웠다. 때때로 삶의 고상함도 앗아갔고 서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함께 견뎌왔고 가난이 남긴 상처와 아픔도 새로 난 추억에 덮여 온기를 입었다. 힘든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 것 같았던 기억도 ‘어디 잊어버린 게 없나?’ 하며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엄마, 아빠가 말없이 보내던 기대는 단지 사랑이었음을. 한순간도 멈춘 적 없던 그 사랑 덕분에 돌아보니 참 행복했고 따뜻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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