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라디오 방송을 들은 지가 언제였더라. 청춘의 한 자락에서 밤마다 듣던 라디오 방송도 이제 낯선 이야기가 돼버렸다. 두 번째 직장에서였나? 그땐 출근부터 퇴근까지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했었다. 각자 바쁘게 일하면서도 어떤 이의 사연에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넘나들었고, 값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누군가의 흥얼거림이 더해질 때면 지지직거리는 음질이라도 좋았다. 그 회사를 퇴직한 이후로는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 방송을 찾아 듣는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교내 아나운서였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청소 시간이면 전 학년 각 반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 학기가 되면 얼굴 없는 가수처럼 목소리로만 듣던 아나운서가 나였단 사실에 친구들이 정말이냐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친구의 친구들에게까지 관심을 받았지만 쉬는 시간마다 방송실로 달려가야 했던 나는 친구들 사이에 깊이 소속되지 못한 것 같아 이따금 외로웠다. 음악책을 들고, 체육복을 갈아입고 수업 종이 치고서야 혼자 널찍한 복도를 뛰어갈 때가 특히 그랬다.
쉬는 시간 10분. 친구들과 와글와글 떠들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달콤했기에 몇 번이고 방송반 활동을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내겐 쉬는 시간마다 함께 복도를 뛰던 또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 길쭉한 복도 끝에 있던 교실에서, 3층에서, 별관에서 뛰어오던 친구들. 방송실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함께 꿈을 꾸고 꼭꼭 감추어둔 이야기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친구들이. 우린 함께 꿈을 찾고 찾아주었으며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발견했다.
On Air. 바닥에 깔려있던 그림자 같던 색에 빨간 불빛이 탁! 하고 켜지면 가슴이 둥둥거렸다. 마음에 들 때까지 글을 쓰고 지우느라 회색이 된 종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연필 자국, 곳곳에 붙어있던 지우개 가루, 나풀나풀 힘 빠진 공책. 읽고 또 읽으며 열심히 준비했으나 마이크 앞에 설 때마다 두근거렸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익숙해지지 않았다. 두근거림의 뒤를 따라가 본 어느 날 그건 긴장이 아닌 설렘인 것을 알았다.
맑았다가 갑자기 내린 비, 유난히 파란 하늘, 해변의 모래처럼 깔린 구름, 떼굴떼굴 귀엽게 굴러가던 낙엽, 체육관 가는 길에 핀 벚꽃, 개나리, 목련…. 모두 스크립트의 글이 되었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묻혀 공중에서 글자들이 퐁퐁 사라지더라도 주어진 일상에 의미를 발견하고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썼다. 하루 동안 찾고 모은 발견을 교실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내가 쓴 글은 전교생에게 보내던 편지였다. 우리의 오늘이 이렇게 특별하다고.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깝다고. 오래된 시그널 음악이 서서히 줄어들면 준비한 스크립트를 읽었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나의 글과 목소리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길 바라면서.
생일인 친구를 축하하거나, 응원이 필요한 친구에게 전하는 정다운 사연 가운데 내가 있었다. 사서함 안에 몰래 넣어둔 쪽지. 방송실 문틈에 끼워둔 편지. 두꺼운 방음문을 열고 들어와 수줍게 붙여두고 간 포스트잇. 오돌토돌 올라온 쪽지 뒷면의 글씨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친구들이 보내온 마음을 대신 전했다. 방송실과 가까운 교실에 사연의 주인공이 있을 때면 꺄악-하며 신청곡보다 더 큰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교내를 장악했다. 좋아 보이는 것이 생길 때마다 꿈이 바뀌던 내게 뚜렷한 꿈이 생기던 순간이었다.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반짝이던 청춘에 꿈이라는 꽃을 피웠다. 꿈을 꾸고 꿈을 그리던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특별히 설레는 일도 없고 어느새 꿈을 꾸지도 않았다. 꿈은 정말 꿈처럼 사라졌고 나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꾸지 않은 꿈처럼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하지만 아주 우연히, 늦더라도 만날 수밖에 없었던 인연처럼 잊어버린 꿈과 다시 만났다. 고민도 무게도 가볍기만 했던 그때의 짤막한 글은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길고 무거워졌지만, 다시 쓰는 꿈은 달기만 하다. 그리고 혼자 되뇌어 본다. 계속 꿈꾸는 것이야말로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라고.
그런 의미로 요즘 무한반복 중인 최애 곡 하나 띄워드립니다. WINNER의 <10분>
세작교 에세이 두 번째 과제. 브런치에 올렸던 에세이 중 <그 시절 꿀 보이스 조디>라는 글을 새로 퇴고해서 제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