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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Apr 08. 2017

울면 좀 어때, 그게 어디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은유 저) 독서기인 듯, 한담

화장대 거울 옆, 제일 잘 보이는 곳. 술 먹고 뻗어서 안 씻고 자는 날을 제외하고 하루에 적어도 두 번은 들여다 봐야 하는 위치에 쪽지 하나를 붙여 뒀다. 그 종이에는 북유럽에서 온 '얀테의 법칙(보통사람의 법칙)'이란 게 적혀 있다.


10개나 되다보니 때에 따라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바뀐다. 요즘 내 마음이 가장 자주 머무는 문구는 이 것. " 아무도 당신을 신경쓰지 않는다"


만년필 사용 초기라 글씨에 힘이 무쟈게 들어갔다. 필체에 눈이 덜 가게 하려고 누런 필터를 적용했다. 실제로 종이는 무척 하얗고, 글씨는 더 못생겼다.


20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내 시간은 주위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가득하다. 잘 보이고 싶고, 잘나 보이고 싶어 모든 걸 총동원해 있는 척을 한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의지와는 무관하게 까다로운 성미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독한 말, 배려 없음과 무식함을 들통내는 언어들이 자꾸 뛰쳐 나온다. 매번 뒤돌아 후회와 반성의 이불킥을 한다. 그래놓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미움 받을까 두려워 하는 나를 감춘다.


억지로 쑤셔 박은 감정들이 마음을 고장낸다. 우울함과 분노에게 주기적으로 점령을 당한다. 잘 보이려는 부담을 내려놓아야 했다. 짐을 내려두고 주변을 둘러봤다. 타인의 시선은 그리 깊이 닿지 않는다, 아주 고맙게도.


감정 표현의 자유를 조금 회복한 뒤부터 나는 시도때도 없이 운다. "내 동생 빨리 낫게 해주세요"라는 대사가 나오는 어린이용 시럽 광고를 보면서 울 정도라면 설명이 될까. 책이고, 신문이고, 페이스북며 현실에도 온통 눈물바람 할거리 투성이다.


책상은 필요할 때마다 지저분하다.  


은유 작가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최근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정말 잔인하다. 퇴근길 버스가 나의 주된 독서 장소인데, 요즘 여기저기 밑줄 긋느라 무척 분주하다. 그러다 작가의 딸이 '구피'라는 종류의 물고기를 키운 이야기('앵두와 물고기, 함께 있음의 존재론') 에서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다.


"살아있는 존재를 돌보는 그 성가신 일을 즐기는 꽃수레. 딸아이는 2박3일 휴가 가서도 안절부절 납싹이들 다 굶어 죽으면 어떡하느냐고 수시로 근심이 서렸다. (중략) 잠시나마 아이 성적을 걱정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드는 방편으로서의 공부라면 아이와 대화하면서 천천히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위의 책 186쪽에서 발췌)


살뜰하게 생명을 챙기는 꽃수레(작가의 딸)는 돌보던 물고기가 죽자, 보고 자란대로 제사를 지낸다. 물고기 시신을 휴지고 감싸 두고, 그 곁에 소복하게 밥을 쌓아 제삿상을 마련한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108배를 한다. 어여뻐 웃음이 나다가, 고와서 눈물이 났다.

말을 애둘러 써서 그렇지 실제는 무지 청승 맞았다. 퇴근 시간, 버스는 종로 3가 인근을 지나고 있었다. 송곳 세울 틈도 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승객들로 가득했다.  

나는 운전사 바로 뒤에 앉아 있었는데, 저상버스라 맨 앞줄 좌석이 꽤 높았다. 고개만 돌리면 서 있는 승객과 아이컨택이 가능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웃다가 울다가, 또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부산스럽게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끄집어내, 거기서 또 포스트잇 플래그를 꺼냈다. 포스트잇에 별표까지 그려 책에 붙였다. 입은 웃고, 눈은 울고 있었다.


강아지(시바) 귀 옆에 별을 그려줬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존재론 아래에 있는 선과 포스트잇 플래그의 평행을 맞추느라 애먹었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렇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앞에 선 사람이 한참 쳐다보긴 했다. 나도 힐끗 눈치 한 번은 봤다). 보면 좀 어떠랴.  "야, 나 버스에서 우는 여자 봤어"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 외에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지하철에서 눈물 줄줄 흘리며 운 적도 꽤 여러 번인데,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서럽다. 만원 버스 안에서 자기 의지로 몸을 가눌 수 없어서, 운이 좋아야만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분하다. SNS 조차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된다는 게 서글프다. 어쩌면 다음 번에는, 만원 버스가 슬퍼서 울지도 모르겠다.  

출퇴근길 널널한 대중교통을 보장하라! 그보다도 직장인들이 회사 근처에서 살 수 있게 집값 좀 낮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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