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혜 Mar 27. 2017

"물론, 당신 스스로는 그렇다고 생각하겠죠."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관람 후 한담(閑談)

영화관을 나서며, 영어사전에 알파벳 여섯 글자를 입력했다. F.I.G.U.R.E. 혹시 이 단어에 영웅 혹은 뛰어난 사람 등의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꼭 압도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이, 세상의 규칙을 바꾸는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일까. 문득 불안해졌다. 네이버 영어 사전에서는 '영웅' 혹은 그와 가까운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건, 맨 앞줄에 서서 '여기 차별이 존재한다'고 외치며 벽을 부수고 나갔던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너무 뛰어났던 탓이다.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인종과 성별을 뛰어 넘는 능력자만이 세상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은 <Hidden Hero>(최악의 경우 <Hidden Heroine>)가 더 어울렸던 건 아닐까. 한 켠 불편함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Hero나 Heroine이 아닌 Figure에 더 가깝다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왜? 아무도 묻지 않겠지만 이유가 있다. 고등학생 시절 지니고 다녔던 영어 단어장 때문이다. 그 단어장에는 figure라는 어휘의 뜻이 이렇게 3가지로 정리돼 있었다.


* figure : 1) 숫자 2) 인물 3) 이해하다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단어장이 떠올랐다. 관람 직후 figure를 검색했던 건, 두번째 적어둔 '인물'이라는 뜻을 헷갈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틀리지는 않았다.


영화 <히든 피겨스> 중에서

내가 외워둔 figure의 세 가지 의미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숫자(공학)에 능숙한, 세 인물의 이야기라는 점에 대해서는 너무 단순한 연결이라 차마 말하기도 부끄러워 이쯤에서 생략. 다시 옛날 이야기로 도망을 가야겠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 거다. figure가 숫자, 인물, 이해하다.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처음 들었던 날, 정말 뭐 이런 게 있나 하는 기분이었다. 의미들 간 연관성이 없어서 단순 무식하게 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머리에 집어 넣고 있는데, 단어장을 자주 보며 정이 들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세 단어가 하나의 궤로 얽혀 보이기 시작했다. 숫자와 인물, 모두 이해가 필요한 존재들.    


여성 그리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했던 일상에서, 나사의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바쁜 일과 중에 캐서린이 한 번에 40분 씩,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자리를 비우는 이유를 백인들은 파악하지 못했다.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이미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을 것이므로.


때문에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아찔했던 대사를 꼽으라면 단연 이 부분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비비안에게 "물론이죠. 당신의 생각에는 그렇겠죠"라고 돌려주던 도로시의 대사. 본인이 차별적인지, 아닌지 조차 알아채지 못한 상태. 차별에 대한 몰이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뒤, 비비안은 도로시에게 경칭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 중에서

그러므로 이 영화는 영웅적인 세 여성을 그리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에 대한 이해를 중심에 둔다. 물론 모두가 이해한 것도, 차별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부터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어본다.


================================

* 뱀발 ) 글을 정리하는 말미에 이 영화에 대한 다른 평가를 접했다. 기억나는 대로 옮겨보자면 이렇다.  

Racism과 sexism에 대한 Nationalism의 승리.


그 이후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만약, 소련(당시)과 미국이 우주기술 경쟁을 하지 않았다면, 국가주의가 개입되지 않은 문제였다면, 나사는 이렇게 흑인, 여성들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인물이기도한)등장 인물 개개인의 성품과 능력 등과는 별개로, 냉전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유리천장을 부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왜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 기우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울면 좀 어때, 그게 어디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