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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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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Dec 11. 2017

바꾸지 못하는 5글자

지현에게 보내는 너무 늦은 사과 #02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는 통장이 있었다. 통장도 없고 계좌번호도 모르는데, 은행까지 찾아가는 수고를 하기에는 잔액이 너무 적었다. 그렇게 그냥 잊고 지내던 어느날, 잠자는 계좌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사이트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얼른 통장 두 개를 해지했다. 커피 한 잔 값, 말그대로 '꽁똔'이 굴러들어왔다. 행복했다.



해당 은행을 다시 이용하지 않을 거란 착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계좌를 없앤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 은행 계좌를 다시 만들어야 할 일이 생겼다. 수년 만에 창구를 찾아 인터넷 뱅킹을 신청했다. 은행 직원은 내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물었다. "없을 거예요." 주민등록번호 조회 결과는 내 말과 달랐다. 장기간 사용하지 않아 정지된, 오래된 아이디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매일 같이 붙어 다녔던 흔적이었다.


공동 명의로 통장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였는지, 아니면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는지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우리는 공금 통장이라는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통장에 각자의 흔적을 하나씩 입히기로 했다. 통장 명의는 내 앞으로, 인터넷 계정 아이디는 그녀가 자주 쓰는 것으로 정했다. 


이십대가 겨우 중간 무렵을 지나던 때였기에 우리는 알지 못했다. 학교에 다닐 때 만큼 자주 만나지 못할 것을, 씀씀이도 그때와는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결국 통장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그녀가 죽은 뒤에는 클릭 몇 번만에 폐기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절대 쓰지 않는 문자 조합이 은행 서류 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종이 쪽지 한 장을 손에 쥐고 그저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던 건 말 그대로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쓰지 않았다고 할 지라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도 용서도 되질 않았다. 평소라면 진즉 파쇄해버렸을 서류를, 접지도 가방에 넣을 수도 없었다. 또다시 잊을 것이, 잃어버릴 것이 두려웠다.



함께 보낸 15년이란 시간이 남긴 흔적은 그렇게 자꾸 일상을 뚫고 나왔다. 쓰기 뿐만 아니라 문자를 읽는 일 조차도 버거운 날들 속에서,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진 이유도 이곳저곳에서 예고도 없이 등장하고야 마는 너 때문이었다. 


바꿀 수 없는 다섯자리 문자 덕에, 나는 자꾸만 네가 보고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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