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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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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Jan 15. 2018

고래밥 쏟아내던 바다

못된 짓은 언제나 내 몫

험프백 고래가 물을 뿜고, 점프를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내게는 익숙한 호주의 지역명, 던버로우dunsborough 에 와서 꽂혔다.  텔레비전에서 방영 중인 <신서유기 외전 - 꽃보다 청춘>이 출처였다. 나는 그 무심한 텔레비전에 속절 없이 당하고는 멍하니 앉아 몇 번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현아...너랑 같이 봤으면 우리 정말 할 이야기가 많았겠다, 하고.


험프백 고래의 높이 뛰기는 10여년 전 우리 눈앞에서 펼쳐졌던 그것보다 훨씬 못했다. 허연 배를 드러내고 수면 밖으로 온몸을 끌어올리던 거대한 고래는, 이러다 배와 부딪히는 건 아닌지 무서울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검고 두툼한 지느러미는 쉴새 없이 수면을 내리쳤고, 그때 생긴 거품으로 바다는 하얗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마어마했던 건 파도였다. 선원과 너를 제외하고는 모든 승객이 배멀미를 할 만큼 배는 파도에 맞춰 요동을 쳤다. 지독한 배멀미에... 끊임없이 구토가 치솟았다. 초반에는 고래가 뛰어오르면 구토가 멈추기도 했으나, 너무 자주 본 광경에 나는 이내 시들해졌다. 더이상 쏟아낼 것도 없었것만, 구토와 구토 사이의 간격은 자꾸 짧아져만 갔다. 다들 나와 비슷한 역경의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선원들이 준비한 봉투는 금세 모두 바닥 나버렸다. 봉투도 없고, 있다고 해도 받으러 갈 틈이 없는데 어쩔텐가. 나는 배의 난간을 붙잡고 몇번이나 바다 위로 토사물을 뿜어댔다.


은 구토에 민망해진 나는, 난간에 기대 우스개소리를 했다. "고래밥 준 거야." 그 말을 들은 너는 신나게 웃었다. 우리는 그 얘기를, 그 순간을 수십번 꺼내 들춰보며 그때처럼 또 웃었다. 그 기억 끝에, 혀뿌리가 시큰해지더니 네 그림자가 맺다. "야, 이거 먹어봐. 진짜 맛있어." 장액까지 끌어올려 입으로 쏟아낸 내 옆에서, 향이 강한 치즈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던 그날의 너였다.

늘 그랬다. 배멀미처럼 나쁜 것들은 대부분 내 몫이었다.


스무살에서 스물 한 살로 넘어가던 겨울.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했던 오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럽 지도를 펴놓고 밤새 여행 루트를 짰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비행기표를 살 여유가 없다니.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대수인가 싶지만, 나는 돈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을 하기가  자존심 상했다. 너를 혼자 보내야한다는 미안함보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 먼저였다. 그래서 "나 여행 못 가"라는 말을, 차마 얼굴을 보말할 수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함께 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며 쭈뼛거리는 나와는 달리, 너는 너무 태연했다. 그때는 이런 표현이 없었는데...말 그대로 쿨했다.

소심한 나는, 네가 화가 나서 차갑게 군다 오해해버렸다.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어 더 속상한 건 나인데, 내 속도 몰라주다니! 서운해서 서러웠다. 휴대폰을 붙들고 울다가 어색하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때 우리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카톡이 없던 때여서 우리는 하루에 수십통 씩 문자를 주고 받고, 적어도 한 번은 통화를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과 낮은 달랐다. 항상 먼저 문자를 보내오던 네가 잠잠했다. 몇 번을 쓰고 지우다가 문자 보내기를 결국 포기했을 무렵, 너는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는 서럽고 반가워서 막 엉엉 울었다. 너는 잔뜩 놀라서 왜 우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너 어제 울었다고? 난 몰랐는데. 낮에는 폰을 두고 가서 문자를 못한 거야.


오해도 삐지는 것도, 화내는 것도 모두 내 몫이었다. 그때가 15년 동안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툰 날이었다. 아니, 사실은 나 혼자.

페이스북 페이지 '비차의 캘리툰'에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 나쁜 건 내가 아니라 너에게 갔던 걸까, 지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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