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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은달 Feb 21. 2023

회피형 공무원

야망이 없다 고로 책임도 없다


직접 생산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은 보시로 생활을 꾸려가는 삶의 방식은 이를테면 공무원의 생활 패턴과 유사하다.(중략) 직접적인 물건이나 서비스에는 명확한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간접적인 도움은 책임의 소재가 모호하다.(중략) 직접적인 도움이 아닌 간접적인 도움으로 회피형 인간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형태의 일인 것이다.

-오카다 다카시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회피형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책임이다. 회피형 인간들은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연애와 결혼, 육아와 출산 문제에는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질색한다. 겉으로 보기엔 친구도 많고 소위 싸처럼 보여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는 인간관계는 거의 없다.


일도 마찬가지다. 한 직장을 꾸준히 오래 다니는 회피형 인간은 별로 없다. 꾹꾹 참고 혼자 일을 하다가 갑자기 그만두기도 한다. 업무량이나 사내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로 실랑이를 하느니 그만둬 버리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어제까지 정력적으로 일하던 직원이 갑자기 사표를 내니 황당하다. 그러나 회피형 인간은 참다 참다 번아웃이 와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정말 힘든 상황이 오면 왜인지 남의 일 보듯 한다. 고통을 직면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마저 회피한다. 타인에게 의지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실망히지도 않는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갈등도 별로 없다. 회피형 인간에게 가장 힘든 관계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자꾸 넘어오는 사람의 존재다. 회피형 인간은 이른바 잔정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쓰는 시간을 극도로 아까워하고 인간관계의 피상적인 면을 견디지 못한다.



여기까지가 자기소개였다. 그렇다. 나는 염병할 회피형 인간이다. 나와 연애를 하면 솔로일 때보다 외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 재밌게 연애를 하다가도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부터 흥미가 뚝뚝 떨어진다.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얘기 중에 하나는 "왜 그 얘기를 이제 하느냐"거나 "왜 너는 네 이야기를 안 하느냐"이다.


지금 다니는 직장은 7번째 직장이다. 가장 짧게 다녔던 직장은 5일 만에 관뒀다. 아니다 싶으면 사람이든 일이든 누구보다 빠르게 손절한다.


모든 회피형 인간이 공무원일리 없고 모든 공무원이 회피형 일리 없다. 어쨌거나 나는 회피형 인간이고 직업은 공무원이다.


이토록 무책임하고 인간을 피해 도망 다니기 바쁜 회피형 인간에게나 그나마 가장 바람직한 직업이 공무원이라니. 아이러니다. 민원인들이여 그래도 걱정은 마시라. 해야 될 일은 다 하고 있다. 갑자기 의원면직을 할까 봐 그게 걱정이다. 나도 내가 걱정이다.




회피형 인간에게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가 바로 작가다. 사회에 나가 일하지 않고 상상의 세계에서 놀며 작품을 쓴 후 원고료나 인세를 받아 생활한다. 속박당하지도 않고 자유롭다. 무엇보다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이미지가 작가라는 직업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인기 작가가 되지 않는 한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활유지가 안 된다.

-오카다 다카시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중




회피형 인간이라 브런치 작가가 되었나.(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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