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의 짧은 경험담
내가 어학연수를 위해 선택한 길은 어떤 유학원의 필리핀 어학원 4개월 + 호주 워킹홀리데이 1년 패키지였다. 필리핀은 영어권 국가는 아니었지만 모국어 외에 국가에서 영어를 두 번째 언어로 채택해서 사용하는 나라였고, 무엇보다 영어권 국가 대비 어학원 비용이 매우 저렴했다.
거기다가 수업만 듣는 것이 아니라 어학원에서 기숙사와 숙식까지 제공하는 시스템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학원에서 영어수업을 하며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어학원+숙식(기숙사 3인실) 비용이 16주에 400만 원 이내였으니 영어권과 비교했을 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저렴한 것이다. 부모님께 조사한 내용을 보여드리고 설득한 끝에 허락을 받았다.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고, 좋은 사람들을 여럿 만나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라이프'를 즐겼다. 영어와 관련한 몇 가지 기억나는 것들은 아래 3가지이다.
1. 영어테스트
- 처음 학원을 가면 내 말하기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테스트를 본다. 등급은 6개로 나뉘어 있었다. Beginner(말을 아예 못하는 수준), Elementary(단어로 몇 마디 말하는 수준), Pre-intermediate, Intermediate, Upper-intermediate, Advanced.
Advanced레벨은 필리핀 어학원을 올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 레벨의 학생은 어학원에 없었다.
나는 단순한 문장들을 말할 수 있었기에 pre-intermediate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첫 질문이 한국의 남북 분단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어로도 정리해서 말하기 쉽지 않은 걸 영어로 말하라 하니 어버버 하다가 테스트 시간이 끝났다.
내 레벨은 'Elementary'로 측정되었다. 충격적이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2. 수업방식
수업은 크게 1:1(3시간), 1:4(2시간), 1:12(1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1:1은 프리토킹을 하거나, 주제토론을 하거나, 뉴스토픽, 비즈니스 영어 등 교재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나는 주로 Controversial conversation을 선택했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막 뱉어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머릿속의 한국어를 영어로 전환한 문장 구조가 입에 붙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1:1 수업을 하다 보면 튜터와 친밀감이 생겨 잡담을 하다가 시간을 보내거나, 튜터 주도하에 튜터가 말을 많이 하고 학생은 듣다가 수업이 끝나는 경우가 굉장히 빈번했다. 그리고 튜터를 여러 번 바꿀 수 있게 허용되어 있었음에도 이미 친해져서 바꾸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4개월 동안 머물면서 튜터를 10번가량 바꾸었다. 기준은 튜터가 내가 '말하도록' 독려하는지, 내가 틀린 표현, 문법을 사용했을 때 '고치도록' 독려하는지였다. 이 기준에 부합하는 튜터는 단 1명밖에 없었다. 거의 2개월 가까이 그 튜터의 1:1 수업을 수강했다. 다른 학생 기준에서는 엄격하고 타이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학생이 틀린 문법을 썼을 때 처음부터 바로 직접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중에 중단시키고 "너 방금 문법 틀렸어. 너가 아는 문법이니까 다시 고친 걸로 말해봐"라고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Controversial conversation 대화 이후에 관련된 주제를 주고 essay를 써오면 첨삭을 해주겠다고 했다.
튜터들이 수업 방식 측면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수록 만족했다. 불편을 느껴야 실력이 늘 수 있었기 때문에.
- 1:4는 그룹수업이다. 이 수업도 다양한 방식들이 있었는데 내가 선택한 수업은 30분짜리 짧은 미드를 보고, 미드의 숙어표현, 단어들을 익히고 연습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수업도 매우 좋아했다. 새로운 표현을 배우는 것도 좋았고, 튜터도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4명이 듣던 수업이 몇 주 후 3명이 되고, 두 달 후 2명이 되더니 어느 날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이유는 어학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호텔 카지노가 원인이었다.
같이 수업 듣던 남학생이 어느 날 그곳에서 돈을 크게 따고, 그 후로 딴 돈을 카지노에 걸면서 잃기 시작하고, 부모님께서 주신 돈을 거진 다 탕진해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같이 수업 듣던 또 다른 남학생은 공부는 하지 않고, 유흥에 빠져 노느라 수업을 나오지 않았다.
그즈음, PD수첩에 필리핀 어학연수의 실태를 고발하는 방송이 방영되었다. 제목은 '필리핀 현지보고, 성매매에 빠진 어학연수'였다. 필리핀으로 어학연수 간 많은 학생들이 거기서 유흥에 빠져 돈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을 본 부모님들로부터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 전화들이 걸려왔다. 솔직히 그 유학생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부모님이 어렵게 보내준 돈과, 자신의 시간을 그런 일에 소진해 버릴 수 있는 것인지.
마지막 한 달은 1:4 수업을 1:1 수업 특혜를 누리며 지냈다.
-1:12는 대규모 그룹수업이었다. 1:1은 튜터가 학생의 실력에 맞추어 수업을 진행하고, 1:4도 비슷한 레벨의 학생들끼리 모여서 수업을 했다면, 1:12는 beginner부터 upper-intermediate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이 수업을 불편해하며 싫어했다. 왜냐면 1:1 수업은 내가 말하는 속도를 튜터가 기다려주었지만, 1:12는 실력 있는 학생들이 치고 나갔다. 튜터가 질문을 하면, 먼저 대답을 하는 학생이 있고, 그 대답을 이어받아 먼저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학생들 중심으로 스피킹이 이어지며 나머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거기다가 한국인 특유의 '눈치보기'때문에 말을 할 수 있어도 선뜻 말하려는 학생이 없었다. 12명 중에 2명 정도 겨우 주도적으로 말을 했다. 그 학생들이 말하기를 멈추면 튜터가 앉아 있는 학생 중 하나를 지목하고, 그제야 꿀 먹은 벙어리였던 학생은 천천히 문장을 만들어 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나는 1:12 수업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1:1 수업의 한계를 1:12 수업이 돌파하게 해 주었다. 1:1 수업은 경쟁의식이나 말하는 속도에 대해 '압박'을 느낄 일이 없었다. 듣는 사람이 한 명이었기 때문에.
1:12에는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학생이 있었고, 늘 수업을 갈 때마다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을 말로 전환하면서 뜸을 들이는 시간이 길어지면 1시간 밖에 되지 않는 수업시간에 다른 사람의 시간도 같이 갉아먹게 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말하려고 1시간 내내 긴장된 상태를 유지했다. 말해야 하는 차례가 왔을 때의 긴장감과 말하는 순간에 집중하게 되는 몰입감이 실력향상에 양분이 되어주었다.
3. 4개월간 내 영어 실력은 빠르게 올랐다. 학원에서 나를 본 선생님들이 모두 놀랄 정도로. 4개월이 지났을 때 내 레벨은 Intermediate이었고, 영어로 듣는 것도 이전보다 많이 편해졌고, 내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데도 자신감이 붙었다. 문법에 대한 이해는 Grammar in Use의 도움을 크게 받았었다.
6시간의 학원 수업 이후 저녁 시간에도 계속 영어 공부를 했었다. 영어 드라마를 보면서 멈추고, 문장을 분해하고 모르는 단어를 이해하고, 따라 말해보고 하면서 1시간짜리 미국 드라마를 3시간 동안 봤다. 자막 없이 보기도 하고, 들리지 않는 구간은 다시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영어로 일기도 쓰고, essay 숙제도 간간히 작성했다.
학원에 있는 동안 계속 생각했다. 부모님이 나에게 투자해 주신 거고 그 시간을 헛되어 쓰면 안 되고, 내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 실력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관광스팟과 유흥거리가 넘쳐나는 세부에서 어학연수 생활을 했지만, 영어 스피킹 향상이라는 목표에만 올인한 4개월을 보냈고, 드디어 호주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