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초의 해외여행은 고등학교의 해외견학 프로그램으로 다녀온 일본 패키지여행이었다.
그 후로 나는 두 번 다시 패키지여행을 가지 않았다. 이 글에는 일본여행에 대한 내용은 없다. 왜냐면 무엇을 경험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내가 패키지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붙은 일본 견학 안내문을 보고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선뜻 허락해 주셨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는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해외를 가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학교차원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해외를 갈 일은 더더욱 없던 시기였다.
우리 집은 딱히 유복하지도 않았고 부모님은 알뜰하고 엄격하셨는데 어떤 생각으로 승낙하셨는지 모르겠다. 한번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나의 일본어는 동급생 친구들보다는 조금 더 아는 수준이었다. 중2 때 친구 따라 우연한 기회에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어 회화를 가르치는 작은 교습소 같은 곳을 다녔고, 중3 때 JLPT3급을 땄다. JLPT3급이면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 일본어에 공부를 딱히 하지 않아도 쉽게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후 2급 도전을 위해 공부하다가 한자의 벽에 부딪혀 흥미를 잃고 손을 놓았었다. 추정컨데 일본어를 공부하던 때라 막연한 접점으로 호기심이 생겨 가보고자 했던것 같다.
여행을 신청한 학생 수는 관광버스 한 대 대절할 정도의 규모였다.
나는 분명 나가사키, 후쿠오카를 다녀왔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은 단 3가지이다.
1. 약 10시간가량을 여객선을 타고 갔다.
- 가장 저렴한 티켓이었기에 지정석이 없었다. 잠을 청하려면 찜질방 마루 같은 넓은 공간에 그냥 알아서 자리 잡고 누워 자야 했다. 큰 여객선이지만 배 위에 누워있으면 머리가 점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일어날 때는 운동 후에 느낄 법한 근육통 마냥 몸도 머리도 무겁고 개운하지 못한 감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일본 갈 땐 여객선은 절대 이용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배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딛고 걸어갈 때 발밑이 계속 출렁이는 기묘한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요새는 3시 반 30분 만에 가는 고속페리도 있다더라.
2. 숙소는 다다미 방이었다.
- 친구들 5명과 같은 방을 썼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밤늦게까지 포커를 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반 친구들과 포커를 쳤고 지나가던 선생님들이 사행성 오락이라며 못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걸고 한 적이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기에 계속 몰래 했다. 그냥 해도 재밌는데 못하게 하니 몰래하는 재미가 더해졌던 것 같다.
이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집에 한 장 있다.
그 사진에는 다다미 방에 5명의 여학생들이 포커패를 들고 있고, 판 중앙에는 환전해 온 모든 돈이 쌓여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돈을 걸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모범생들이 찍은 불량 컨셉 사진이었을 뿐이다.
3. 하우스텐보스 기념품 샵은 하우스텐보스보다 인상 깊었다.
- 하우스텐보스는 네덜란드풍의 테마파크처럼 구현되어 있는 공간이다. 하우스텐보스에서 다양한 컨셉 의상을 입은 크고 작은 테디베어들을 봤다. 나는 자라면서도 한 번도 커다란 곰인형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곳을 걷는 동안 우리는 왜 이곳을 온 것인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기념품 샵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한국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봉제인형에 대한 구매욕구를 크게 느꼈다. 일본 사람들의 공예품이 섬세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나 좀 데려가'라고 '귀여움'을 어필하는 기념품들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때 당시 내 동생은 7살이었고, 나는 동생을 아주 많이 예뻐했고, 귀여운 것은 무조건 살 수밖에 없었다. 많은 것들을 사고 싶었지만 용돈이 충분치 않았기에 튤립 인형을 하나 사 왔다.
나머지 장소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것은 버스를 타고 한참을 이동하다가, 내려라고 하면 내리고, 몇 시까지 타라고 하면 타고, 또 어딘가를 내려주면 거기서 돌아보다가 또 버스를 타는 식의 반복이었다.
고등학생들이 타 국가의 지역 특성과, 역사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이미 짜인 스케줄대로 교사들의 인솔하에 어딘지도 정확히 모르는 곳에 버스를 타고 내리면서 그저 우리끼리 떠들고 수다 떨기 바빴다.
처음 가본 해외여행인지라 어떠한 것을 보고 경험할 것이라 기대를 가지고 간 것은 아니었지만, 돈이 많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에 여행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많이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에 지역에 대한 도로와, 상점과, 관광명소로 이동하기 위한 경로에 대한 지도가 그려져야 비로소 그 여행이 내 경험으로 남겠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여행에서 얻은 것은 친구들과의 추억이다. 그리고 그 추억은 다다미 방에서 5명의 친구들이 포커 치는 모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