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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글 Oct 23. 2023

버스에서 마주하는 풍경들

만원 버스를 타고 출근하며 든 생각


상당한 피로감에 눌려 여유 눈곱만큼도 없이 달려 나온 아침. 보통 일찌감치 나와 한적한 버스를 타고 카페로 가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하루를 시작하는데, 며칠에 한 번씩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나오는 날엔 큰일이다 싶을 만큼 빽빽한 차와 사람들 사이에서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서있곤 한다.


오늘 만원 버스를 탔는데 운 좋게도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바로 내려서 맨 앞에 서 있던 내가 폴짝 올라가 앉을 수 있었다. 창문이 열려있어 더 기분 좋았다. 요즘 같은 쌀쌀한 날씨엔 좀처럼 창을 열지 않지만, 오늘은 날이 좋고 공기마저 쾌적했다. 차창으로 넘실넘실 들어오는 바람이 생각보다 차지 않았다. 음악을 듣고 밖을 내다보며 한 정거장 거리쯤 멍 때리다 옆을 보니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후다닥 내려와 다른 사람이 앉을까 봐 괜찮다는 아주머니의 팔을 살짝 잡고 여기 앉으시라며 자리를 내어 드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살금살금 빽빽한 인파를 뚫고 내리는 문 근처에 가서 섰다.


젊어 보이는 편이지만 나이 드니 무릎, 허리 성할 데 없는 우리 엄마가 대중교통을 탔을 때도 누군가 자리에 앉혀 드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난주 아침 만원 버스에서는 내 앞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힐끔힐끔 나를 보시다가 한참 후 앞으로 안고 있던 내 가방을 톡톡 치시며 본인 앞에 두라는 손짓을 하셨다.


"앗. 아닙니다. 괜찮아요."


보기보다 무겁지 않았고 정말 괜찮았지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근데 주춤하다 타이밍을 놓쳐 감사하단 말을 못 했고, 아침이라 살짝 쉰 내 목소리가 혹시나 차갑게 들린 건 아닐지 약간의 걱정을 하다 내리는 할아버지께 소심하게 목례를 한 뒤 속으로 연습하듯 감사한다고 되새겼다.

앞으로 감사 인사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짐을 들어주려는 사람, 못된 어른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이 많은 것, 비어 있는 임산부 석, 어르신이 앉으실 때까지 기다려 주시며 신경 사납지만 다정하게 외치는 버스 기사님, 열린 창문, 라디오 소리. 불편할 때도 있지만 버스에서 마주하는 좋아하는 풍경들 속에서 배운 것이 많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쑥쑥 자라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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