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의 그늘 아래에서 혼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날 좋은 날 기회될 때 한 번쯤 가보면 좋겠다 정도. 상반기 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내기로 했다. 곧 제주 장마라니 비소식이 있으면 굳이 산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기예보를 확인할 때마다 그날의 날씨가 가장 좋았기 때문에, 점점 꼭 가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 버렸다.
돌아오는 날 일정을 홀로 보내게 되어 외로이 한라산에 오를 채비를 했다. 저녁 비행기로 돌아오는 여정이라 새벽부터 서둘러 나와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입구에 도착해 미리 예약해 둔 입장 QR코드를 찍고 드디어 입산했다.
한라산을 오르는 여러 가지 코스 중 내가 고른 길은 <성판악탐방로>였다. 정상의 너른 풍광과 백록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립공원이라 워낙에 잘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고, 이정표에 쓰인 예상 소요 시간이 적지 않았으므로 집중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빠르게 올랐다.
처음 두 시간가량은 울창하고 가지런한 숲길을 산책하듯 걸었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기자기한 잎의 서어나무, 때죽나무, 졸참나무들은 사라지고 어느새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 숲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진한 숲의 향기를 속 깊이 들이마시고 호흡하며 예쁜 길을 걷다가, 잦은 돌길의 등장에 당황하며 나는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는가 생각하다가, 무념무상이었다가, 나뭇가지를 뱀으로 오해하고 식겁하기도 하면서 나아갔다. 어찌나 돌길이 많은지 계단을 오르는 구간이 나타날 때마다 고마울 지경이었다.
성판악 탐방로는 거의 정상을 바라보고 가는 코스나 다름없다 보니 초반에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풍경으로 다소 지루한 산행이 될 수도 있다. 다행히 초록잎이 무성한 시즌이고, 날이 좋아 오르는 내내 나무 그림자와 돌 사이사이로 햇살이 아른거려 반짝이는 모습이 예쁘게 이어져 좋았다.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고 오래지 않아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죽어서도 천 년이 간다는 멋진 주목나무와 구상나무 숲이 등장하며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람도 세졌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그 길이 가장 난코스였다. 그래도 날이 좋아 파란 하늘 아래 멀리 바다와 오름이 보였고 그 아래 넓고 높은 어딘가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몇 걸음마다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을 거슬러 정상에 진입했다. 한숨 돌리며 앉은 사람들을 지나 울타리 너머 물이 약간 고인 백록담이 보였다.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사납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뜨기도 힘든 와중에 혼자서 사진을 찍어보려다가 경치 감상하던 분께 사진 부탁을 드렸다. 이어서 내가 찍어드린다고 하자 이미 찍었다며 한사코 사양을 하시기에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 나의 비상식량 일부인 에너지바와 소시지를 나눠 드렸다. 30분 이상 줄 서야 찍는 비석 앞 인증샷은 패스했다.
대피소에는 잠깐씩만 머물고 혼자서 쉬지 않고 빠르게 걷고 뛰며 생각보다 정상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이라 하산길은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향했다. 음악을 들으며 대단한 장면들 사이로 지나가는 듯한 감상에 젖어들다 이내 익숙해졌고, 그러면 안 되지만 시간을 더 벌고 싶어 계단이나 완만한 지형은 살짝 뛰어 내려왔다.
하산의 길은 끝이 없었다. 내가 이토록 기나긴 길을 지나왔던가. 내 기억에 이런 길이 있었던가 싶게 끝없는 길이 어찌어찌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 거의 다 내려와서 방심하다 발을 헛디뎌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양손과 무릎이 먼저 빠르게 땅에 닿자마자 왼쪽 얼굴 관자놀이 쪽을 땅에 박았다. 바로 앞에 돌이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지푸라기 위에 떨어졌다. 약간의 상처는 생겼지만 어쨌거나 안 아프게 넘어져 나의 반사적인 운동 신경에 스스로 놀랐다. 가도 가도 나오지 않던 하산길의 끝인 처음 통과했던 입구에 당도했을 때 조금 감격했다. 내 발로 들어오고선 되돌아온 게 감격이라니.
평소 활동량이 많고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편이라 극한의 고통은 없었던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움직임을 반복하니 분명히 지치는 시간들이 있었다. 특히나 정상에서 사정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발에 차이는 돌들과 끝없는 하산길에서 '당분간 산에 안 오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끔씩 누군가 파이팅을 외쳐주고, 다 왔으니 조금만 더 힘내라고 응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스쳐갔다.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주신 분들도 있었다.
특별히 번민하거나 사색에 잠기기보다 대체로 조금은 외로운 무념무상의 시간 속 산행이었다. 혼자 하는 산행은 짧고도 길다. 반나절 동안 고통과 한 줄기 성취의 시간을 겪었으며, 그저 자연의 그늘 아래서 오래 산책하는 것이 좋았다. 그 시간이 벌써 그립다. 돌아보니 쉼이었다. 일상의 번뇌와 고민의 시간들로부터 멀어져 현재의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넘어질 때 생긴 멍이 알록달록 흐릿하게 남아 있고, 은은한 근육통마저 여행의 잔여물인 것만 같아 좋다고 생각한다.
20240618 한라산 백록담(1950M)
성판악탐방로-속밭대피소-진달래밭대피소-백록담
입산: 06:42 AM/ 하산: 13:48 PM
간간히 외국인들이 보였다. 하산길에 마주친 외국인 커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헬로라고 할지, 파이팅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짧은 찰나에 ”안녕하세요~“라고 그들이 먼저 인사했다.
이후 카페 두 군데를 들렀고 뒤늦게 거울을 보니, 넘어진 쪽 얼굴에 흙이 묻어 있어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름 턴다고 털었는데 영락없는 자연인 몰골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