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폐쇄와 고소공포 사이 그 어디쯤.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겁을 별로 내지 않는 사람들이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전정 감각이 꽤 예민한 편이다. 장거리 비행은 물론이며,
놀이기구를 타는 것 모두 나에게는 공포 그 자체이다.
마치 식물이 뿌리를 땅에 내리고 살아가야 하듯, 나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야만 몸도 마음도 편하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로열층이라고 하는 아파트의 고층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저 쉽게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고 창밖으로 나무도 볼 수 있는 2, 3층이 가장 좋다.
사실 내가 처음부터 비행기를 잘 못 탔던 것은 아니다.
결혼 전까지 장거리 비행 경험은 없지만 가까운 거리의 비행은 몇 번 해 본 적이 있다.
비행기가 컸던 탓일까,
비행 거리가 짧아서일까 큰 터뷸런스 없이 하늘을 활주 하는 비행기에서 나는 꽤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면세의 즐거움도 한몫하긴 했다.)
하지만 그때도 수천 미터 상공에 나 홀로 갇힌 공간에 둥둥 떠 있다고 상상을 하면 긴장이 되긴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약간의 폐쇄공포증도 가지고 있다.
고소공포증과 달리 내 폐쇄공포증은 그 기원을 명확하게 따질 수 있다.
대학교 1학년 여름의 끝 무렵 나는 홍대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새벽 두 시 가까이 되었을까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 어귀로 들어서는데
시커먼 형체가 다가와 무언가를 들고 내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
만일 내가 머리를 먼저 맞았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코를 먼저 맞았다.
너무나 진부한 말이지만 그 순간 내 인생이 타임랩스 영상처럼 압축되어 눈앞에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맞고 있는 장면이 부감 샷으로 떠오르면서 오른쪽 상단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 로고가 떡하니 보였다.
순간적으로 이것이 내 마지막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 사람은 나의 돈을 노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러자 골목 앞 뒤의 창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를 때리던 남자는 순식간에 골목 저쪽으로 사라졌다. 건너편 원룸의 남자들이 창문을 열고 위험하니 일단 자기네 방으로 올라오라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얼굴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나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남자들 또한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동네 배달원도 다 아는 우리 원룸의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으로 들어서려는 그때 우리 원룸 위 층에 사는 룸살롱 언니가 나를 불렀다. 언니는 나에게 약을 발라주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자기 집에 편히 있으라고 했다.
그해 여름 이후로 한동안 나는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다.
높은 곳까지도 계단을 이용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 편이 마음이 편했다.
지금도 나는 엘리베이터에 낯선 남자가 타면 나도 모르게 등을 벽에 댄다.
시간이 흘러 나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좁은 공간, 밀폐된 실내에서는 항상 출입구를 확보해야 안심이 된다.
영화관에서는 뒤쪽 통로에 앉아야 하고 비행기는 무조건 앞쪽 통로 자리를 예약해야 하며 창이 없거나 작은 호텔은 선호하지 않는다. (아……얼마나 피곤한가.)
신혼여행은 나의 첫 장거리 비행이었다.
어쩌다 보니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내 인생 최악의 터뷸런스를 겪게 되었다.
비행기는 두 시간 동안 좌우 상하로 요동치며 뚝뚝 떨어졌다.
비행기야말로 폐쇄 + 고소 공포의 절정이 아닌가.
승무원들마저 3 점식 안전벨트를 매고 좌석에 앉아야만 했고 아이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이 와중에 헤드폰을 쓰고 잠을 청하는 사람이 나의 건너편 통로 끝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때 그 사람 같이 무던하지 못한 내 운명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나는 두 시간 가까이 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줄줄 흘렸다.
하지만 나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매번 다정한 사람들의 힘을 빌어 비행기에 올랐다.
혼자서는 힘들지만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준다면 나는 세상의 끝까지도 울면서 갈 준비는 되어 있었다.
아이를 낳고 6개월이 채 못 되었을 때 적금을 깨서 시칠리아행 비행기를 타기도 했고, 싼 티켓을 찾는다고 15시간 경유를 하기도 했다.
12시간의 비행 동안 뜬 눈으로 엔진과 한 몸이 되어 덜덜 떨면서도 다정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기어이 몇천 킬로 떨어진 곳에 내 두 발을 딛고 섰다.
노출 요법이 통한 것일까 다행히 짧은 거리는 혼자서도 견딜 만 해졌지만,
출구 없는 커다란 비행물체에 내 몸을 싣는 상상을 하면 여전히 긴장이 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누군가는 웃으면서 거꾸로 매달려 번지점프를 하고,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며 스트레스를 푼다.
브이로그 속 씩씩한 여행 가는 혼자서 훌쩍 비행기를 예약해 창가 자리에서 멋진 구름을 감상한다.
친구들은 사람 많은 영화관에서 아무 자리나 무던하게 앉아 집중하며 영화를 감상한다.
그 누군가는 공간이 좁든, 하늘이 보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잠자리를 크게 타지도 않으며 어떤 누군가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 세상의 이편이든 저편이든 스스로의 힘으로 여행한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고 싶다.
나는 진심 그런 사람들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