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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타자기 Aug 31. 2021

02.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문을 걸어잠글 수 있는’ 방과 500파운드




이 세상의 다양한 일을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까요.

최희암 감독의 말처럼 농구도 어찌 보면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닌 생산성 없는 공놀이고,

영화라는 거대한 산업도 사실 그 많은 돈을 들여 세트를 짓고 다시 부수는 대량 쓰레기 생산 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어느 쪽일까요?

글쓰기에서 제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써야만 하는 것일까요?


첫 글쓰기 후 조금이나마 달라진 점은 문득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해보기도 힘든 상황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저의 경우는 지난 3월 이후로 생각을 정리한다는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않고 지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몸속에 아무 음식이나 닥치는 대로 집어넣고 소화가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그 당시 저는 무언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복기하고 찬찬히 곱씹어 보는 것. 혹은 바라보는 것.

저에게 무척 필요했던 일입니다.



특히나 여기에 모인 분들은 모두 ‘여성’이기에

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보면 나를 돌아볼 여유 따윈 없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에게 주어진 디폴트 조건이었습니다.



식당 한 켠에 놓였던 제인 오스틴의 집필 책상








샬롯 브론테만 하더라도 자신만의 책상 따윈 없어서 거실의 티 테이블에서

제인에어를 썼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진 않았습니다.

사진 속 테이블은 그녀의 생가 부엌에 놓인 작은 책상으로 그녀는 식당 문이 삐걱대면 누군가 오는 것을 눈치채고 원고를 재빨리 숨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를 극찬했던 버지니아 울프는 연 500파운드의 수입과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주어진 여성작가는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방에 환한 횃불을 밝히게 되는 예술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그녀는 이러한 조건들을 위해 여성에게 100년간의 시간을 주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자기만의 방이 1929년 출간되었으니 이제 곧 그녀가 바란 100여년 이후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저에게는 아직 문을 걸어 잠을 수 있는 저만의 방은 없습니다.

연간 500파운드 이상의 소득은 있으나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저의 시간의 1/3을 온전히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수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거실 식탁을 자신의 책상으로 겸용하고 있네요.( 샬롯 브론테들이여..)


저의 남편은 무척이나 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무딘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산다고 생각하면 제 속도 편합니다.


남편은 제 속에 가득한 화산과 용암들, 때로는 알 수 없는 괴물들과 싸워야만 하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배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건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대신 관심 밖의 것들은 손쉽게 차단합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가사와 육아가 결합하면서 해야 할 퀘스트는 계속 많아져만 갑니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놓여야 머리가 정리되는 남편은 저의 복직과 더불어 정리정돈된 삶과도 안녕을 고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이 하원을 위해 제 직장 근처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통근 시간마저 길어졌습니다. 그는 그대로 체력과 여유 모두 소진되어 갑니다. 둘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게 되고 저는 저대로 지쳐갑니다. 그즈음 아이 앞에서 서로 얼굴을 붉힐 일도 많아집니다. 두 양육자는 멈춰서서 서로 바라보기보다 그저 한 잔의 맥주를 더 털어 넣고 과자 한봉지를 더 까먹었습니다. 올해 유독 저도 남편도 소화 불량이 잦습니다. 확실히 아이 앞에서 얼굴을 붉히느니 그냥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나의 숨이 꼴딱 넘어갈 만큼 힘든 순간이 오더라도 내가 다 감당하고 말자. 재지도 말고. 덜려고 하지도 말자. 무언가를 바꾸려 하지 말자. 란 결심을 말입니다.


육아와 가사를 똑같이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자신의 몫을 담당하라는 외침. 그 자체를 하지 않기로 다짐(이라 쓰고 포기라 읽습니다.)한 그 순간 싸움은 멈췄지만, 저는 제 안의 어떤 것이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특히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여자를 갈아 넣는 일임을 여기 저기서 듣곤 했지만 저는 그저 ‘아이’라는 카테고리가 제 인생에 하나 추가되는 것 정도의 각오만을 한 것을 고백합니다. 제 삶이 ‘아이’라는 카테고리에 몽땅 빨려 들어갈 수 있음을 몰랐던 것이지요. 또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 일단은 불공평해도 받아들여야 할 것(포기해야 할 것)들이 산재한 영역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저것 다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저는 다르게 살 줄 알았습니다.


30대 후반, 제 몸에서 사람이 하나 나오는 경험은 제가 ‘포유류’임을 인식할 수 있는 명백한 사건이었습니다. 갓 출산한 여성의 몸은 바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충분한 회복을 할 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휴직’이라는 ‘육아’의 총대를 메게 됩니다.(혹은 바로 풀타임 육아의 총성없는 전쟁터로 들어섭니다. 부상병이면서 최전선에서 싸워야만 하는…그렇다고 제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다 아시겠지요?) 그리고 한 번 메게된 총대는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아마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에게만 더 엄격하게 부과된 것이겠지요.


아마 이것은 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러한 고백으로 누군가는 저에게 반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여 공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편이 많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 ‘저에게’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버지니아 울프로 돌아와서.

저는 그녀가 단순히 자기만의 방이라고 하지 않고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에 주목합니다. 방해받지 않을 권리. 나 혼자만의 절대 ‘카테고리’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안타깝게도 아직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욕심이고 사치이지요. ( 저의 엄마는 이 부분에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버지니아가 저희에게 준 100여 년의 시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순간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마냥 실망만 하지는 않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는 이곳에 모여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으니까요.


글을 한 자 한 자 적어나가는 행위 자체가 나의 세상에 있던 일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글로 직조해내야 하는 또 다른 노동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즐거운 창조적 노동이지요. 어느 누구도 제 글과 생각을 훔쳐 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시키지도 않았으니 잘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것이니 누군가와 공평하게 몫을 나누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꾸 뒤돌아보게 됩니다. 자꾸만 커서를 올려 제 글을 불안하게 살피고 또 살펴봅니다. 내가 한 말이 정말 맞을까? 그리고 한 편으로 생각합니다. 진실에 가까운 글은 무엇일까?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에게 좀 더 솔직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나 자신에게 개인적인 치유를 주는 것일까요? 혹은 제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일까요?


‘자기만의 방’의 한 대목으로 저 자신에게 용기를 주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명목상 문호가 개방된 때조차도, 즉 여성이 의사나 변호가, 공무원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도 수많은 환영과 장애물이 불쑥 앞길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러한 장애물을 규정하고 그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내 생각에 매우 큰 가치와 중요성을 지닙니다. 그럼으로써 노고를 서로 나눌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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