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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타자기 Jul 14. 2024

<바다에 가자> 04.

또다른 이름

04. 또다른 이름           

    





명희는 손바닥 안에 놓인 필름을 계속해서 바라본다. 동우의 사진과 함께 상자 속에 30년간 봉인되었을 이 필름. 과연 어떤 사진들이 있을까.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마음 한켠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동우를 찾을 단서가 남겨진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명희는 근래 해연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던 것이나, 갑자기 나타난 동우의 사진과 필름 한 통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마치  30년 전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갑자기 자신의 흑백에 삶에 문득 끼어 들어온 컬러 사진처럼 느껴진다.      





영업 중이라고 적힌 팻말이 무색하게 현상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밑에 작게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1층 게이트 카페로 오란 말이 돌아왔다. 신기한 주인이었다. 보통 손님이 있는 쪽으로 와야 주인 아닌가? 명희는 이상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당당한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알겠다고 답했다. 1층으로 내려간 명희는 게이트 카페의 문을 열고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선배?”     




머리가 희끗하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 진혁이었다. 3학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호주로 훌쩍 떠나 그곳에 정착해서 사진으로 전공을 바꿨다는 그. 놀란 것은 진혁도 마찬가지였다.      




“너야? 전화건 사람이?”     




진혁이 일어서서 명희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진혁의 눈에 명희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큰 키와 가슴께까지 오는 긴 머리도 예전과 똑같았다.      




“진혁 선배 맞죠?”

“맞지! 명희야! 넌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어?”          




진혁은 반갑게 웃으며 명희의 손을 끌어 잡고 자리에 앉힌다. 진혁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검은 뿔테를 쓴 남자가 그들을 흥미롭게 쳐다본다. 명희는 검은 뿔테를 낀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진혁은 명희에게 묻는다.      




“너 아직 시나리오 쓰니?”          




그 말에 명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한다.      




“아뇨 저 이제 영화 안 해요. 선배.”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거야, 아님 지긋지긋해서야?”

“둘 다.”          




그 말에 진혁의 맞은 편에 앉은 검은 뿔테를 낀 남자까지 셋은 짧게 웃는다.

명희는 저도 모르게 그를 쳐다본다. 진혁은 그런 둘의 시선 교환을 느끼고는 소개를 한다.      

     



“아, 얘는 그 지긋지긋한 영화 아직 까지 하는 이동우라고 호주 지인.”          




동우. 순간 명희의 심장이 발바닥까지 쿵 하고 떨어진다.          

 



“안녕하세요. 이동우라고 합니다.”          




유난히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그를 보며 명희는 이게 무슨 우연일까 싶다.       




‘아니겠지. 설마. 그 동우가 그 동우는 아닐꺼야. 세상에 얼마나 흔한 이름이 동우인데.’     




 진혁은 이런 명희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둘을 재촉한다. 게이트 카페 밖 골목에는 여름 저녁의 어스름이 낮게 깔려있다. 차들이 간간히 지나가는 바람에 그들은 한 줄로 서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맨 앞에 선 진혁이 큰 소리로 맨 뒤에 선 명희에게 묻는다.           




“너 근데 이 동네 계속 살았어?”   

       



차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명희는 ‘네?’하고 반문한다. 동우는 그런 상황이 재미있는지 피식 웃으며 ‘이 동네에 계속 사셨어요?’라고 크게 묻는다. 그러자 명희는 ‘아뇨. 선배는요?’ 라고 묻는다.  동우가 진혁에게 다시 한 번 대신 묻는다. ‘사진관 정리하느라 잠깐 들어왔지.’ 명희는 웅웅거리는 진혁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동우가 멈춰 서서 명희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아버지가 얼마 전 돌아가셔서 대신 사진관 하고 계신 거예요.’라고 말한다. 동우의 말투를 듣고 보니 한국말이 조금 어눌한 것도 같다.     

 


‘그렇구나. 이제 우리 나이도 부모님이 아프시거나 돌아가시는 나이대가 되었지.’      


명희는 이런 생각을 하다 동우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동우와 동우 아버지 소식은 어떻게 이제껏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걸까. 명희는 또 다른 이름의 동우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30년 전 하얀 교복을 입고 수없이 해연 극장을 드나들었던 동우가 불의의 사고로 과거의 기억을 몽땅 지우고 그녀 앞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나타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자. 여기야.”          




진혁이 멈춰선 곳은 골목 안의 선술집이었다. 선술집 간판이 깜빡인다. 명희는 간판 이름을 읽어본다.      




‘바다에 가자’      




명희의 마음 한 구석이 반짝 하고 들어 올려 진다. 명희는 작게 미소 지었다. 진혁, 동우는 선술집 안으로 들어선다. 명희는 그 뒤를 따르다 돌아서서 꿈을 꾸듯 선술집 앞 계단에 빨간 단화 밑창을 비벼본다. 그리고는 주머니 속 필름을 세게 쥔다. 30년 전의 마음들이 파도처럼 다시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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