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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Apr 12. 2021

루이뷔통 대신 루이까또즈를
샀습니다.

조금 더 편해지는 삶에 대해.

나의 앞글들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내가 얼마나 치기 어렸고, 건방졌으며 심지어는 나의 분수도 몰랐는지 알 수 있으실 것이다. 20대 후반부터 다시 사회의 문을 두드릴 때, 그 결과 내 욕심에 다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숨을 돌릴 정도의 결과를 얻고 다시 사회로 발을 디뎠을 때, 나는 20대 후반부터 다시 도전을 할 때까지 쏟았던 모든 노력을 보상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것에 욕심을 냈고, 그 끝없는 욕심에 나 자신을 불태웠으며 그 결과 나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그 불길이 얼마나 거세고, 얼마나 삶을 위협할 만큼 위험한 지 알지 못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그 누구이든 어떤 것에든 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채우지 못했던 내 목표에 대한 모자람은 물질적인 것으로 채우고자 쏟아진 결과였다. 매일 자동차 동호회든, 자동차 커뮤니티를 들락날락거렸고, 패션 잡지 등을 보며 어떤 제품의 물건이 새로 나왔는지를 확인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제 갓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로 돌아온 것뿐, 가진 것도 거의 없는 즉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였다.




처음 내 소유의 자동차는 쌍용에서 나온 "렉스턴"이었다. 대한민국 1%라는 지금 보면 유치함이 느껴지는 캐치프레이즈로 대표되는 그 SUV는 대한민국에서 꽤 비싼 승용차로 인식이 되기도 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수입차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는 않았을 때다.) 경유가 비교적 저렴했던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나는 이 승용차를 가지고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구입을 했고, 대략 12만 Km를 주행하고 다음 주인에게 녀석을 입양 보냈다.


녀석을 입양 보낸 이유는 몇 가지가 되지만 그중 한 가지는 자동차를 구매하고 3년 6만 km, 무료 메인터넌스 기간이 끝나면 그 차는 팔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이 것은 아버지가 조금 젊은 시절, 많은 차를 짧은 주기로 교체하시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잘못 자리 잡은 고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또 하나는 마침 르노 삼성 자동차에서 신형 자동차가 출시되었다. 새로 나온 "SM7"은 나의 눈을 홀려버렸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으며, 빨리 녀석을 손에 넣지 않으면 일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당시까지 출시되던 자동차들과 다르게 검은색이나 흰색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른 색상도 잘 어울렸고, 실내도 그 당시까지 볼 수 있었던 자동차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기에 나는 계속해서 호시탐탐 그 녀석을 입양할 기회가 닿기만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또 하나 조금 더 큰 욕심도 있었다. 한 참 대한민국에서 확산세를 이어가던 일본 수입 자동차들의 유혹이었다. 체구는 비교적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렉서스"의 "IS250"은 내게 또 다른 허황된 생각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렉스턴"의 다음 자동차는 "SM7"이 되었다. 끝까지 "IS250"과 고민을 했지만, 내 "렉스턴"을 매입해가시던 중고차 매매상 사장님의 한 마디, "젊을 때부터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찾게 되면, 나중에는 힘들어집니다. 자동차는 한 번 올라가면 내려오기 어렵거든요."라는 말씀이 이상하게도 가슴에 남아서였다. 그렇게 어느 해 2월 "SM7"을 계약하고 출고받았다. 자동차의 색상은 "카키색".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색상이었고, 그만큼 나는 진심 "관종"이 되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새 연인 "B"가 생겼다. 한 참 시험 준비를 하던 내게 "선"을 본다고 "협박"을 하던 전 연인과 끝끝내 헤어진 뒤 딱 8개월 뒤였다. "자동차가 있으니 연애를 하기 더 쉬웠겠네요??"라고 물어보신다면, "국산 자동차 나부랭이 따위로 그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라고 그 당시에는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다시 "SM7"에 부지불식간에 질려있었고, "SM7"의 모태 모델인 "닛산"의 고급 브랜드 "인피니티" 모델에 꽂혀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수입자동차를 타야 했었는데...'라는 후회가 계속 밀려왔다. "SM7"의 출력과 성능에 목이 말랐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한 성능을 가진 차를 갖고 싶었다.


"B"의 절친인 "P"에게는 무려 15살이 많은 남자 친구 "K"가 있었다. 자신을 분당 큰 손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그를 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자신은 현재 어머님의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후계자 수업을 하러 대전에 내려와서 지내는 중이고, 그 후계자 수업이 바로 백화점의 "샵마스터"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화려한 과거를 어찌나 자랑을 하며 "B"와 "P"에게 주입을 시켜대는지, 그것을 믿는 "B"와 "P"를 보면 마치 그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같이 보였다.("B"와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역시 "K"였다.)


그는 자신이 서울에 있을 때, 타고 다녔던 수입 자동차의 이야기와 할리 데이빗슨 바이크의 이야기를 내게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종종 영화배우 "최민수"와도 "할리 데이빗슨"이나 "인디언" 같은 아메리칸 바이크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종종 했다. 나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그냥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보다 무려 10살 가까이 많은 남자의 뇌 속을 궁금해했다. 그 당시, 그의 차는 현대의 "그렌져 TG"였고, 심지어는 내 차보다 가격도 저렴했으며, 집도 고시원 어딘가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분당 큰 손의 아들"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적어도 더 잘 사는 셈이었다.


분당 큰 손의 아들이 경영자 수업을 받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대전에 내려와서 고시원에 살면서 백화점의 샵마스터로 경영 실습을 한다. 웃기지도 않아서 대거리도 하지 않았다. 그는 허풍이 센 만큼 가격이 얼마 안 되는 선에서는 나름 "명품" 소리를 듣는 소지품들을 갖고 있었다. 가령, "루이뷔통"이나 "구찌" 등의 지갑이나 "태그호이어" 등의 시계 등등, 그리고 내게도 남자는 이런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수없이 말했다. 


반면, 나는 그때까지도 공부하던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등가방(백팩)을 갖고 다녔다.(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나를 보며 종종 "K"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는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도 그가 갖고 있는 시계보다 더 좋은 시계가 있었다. 가슴에 "허세"를 채우며 살아가는 남자로서 내게도 그 정도는 필수였으니까... "1억"을 호가하는 정말 명품 시계들에 비해서는 저렴한 편이지만, 그가 갖고 있는 시계보다는 더 좋은 시계를 갖고 있었다. 그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것조차 이야기하면 내가 더 오히려 우스워지고 유치해질 것 같아서였다.


내 분수보다 비싼 시계를 손목에 두르고 있으면, 가슴 한편이 부담스러워진다. 혹시나 시계에 상처가 나지는 않을는지, 또는 손목에서 흘러내려서 파손되지는 않을는지, 그것도 아니면 어디서 잃어버리지는 않을는지 등등, 수없이 많은 잡생각이 시계를 한 번 착용할 때마다 머릿속을 헤짚는다. 시계를 두르고 있는 손목은 갈수록 무겁게 느껴지고, 점점 내려가고 시계를 두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모시고 다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시계를 손목에 두를 수 있는 깜냥이 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자동차도 끝내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 나는 수입차량 한 대를 운행했다. 그런데 내게는 이 차량이 마치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국산차와 마찬가지로 교체해주는 "엔진오일"이나 "미션오일"에서부터 자동차의 외부에 상처가 나면 색을 칠하는 가격도, 자동차 외장의 부품도 모두 국산 자동차의 배 이상 아니 어느 부품은 말할 수 없이 비쌌다. 내가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것인지, 아니면 차가 나를 데리고 다니다가 어느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문을 열고 내려주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불편하기도 했다.


혹시라도 접촉사고가 나면 정비공장에서 한 달 가까이 잠자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인내해야 했다.(그래도 이 정도면 빨리 수리되는 편이었고.), 자동차의 색상마저 특이하면 다시 이 색상을 수출하는 나라의 본사에 문의해서 그에 맞는 부품 파츠를 보내오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대한민국에는 "수입차"가 거리에 널려있었고, 어느 정도의 "수입차"를 타고 다닌다고 그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으며, 그런 것이 뭐 하나 내게 이득이 되는 것도 없었다.




가장 최근의 일로, 아버지의 독일 승용차가 사고가 나서 정비공장에 한 달이 넘게 세워져 있다가, 폐차 판정을 받고 다시 재구매를 생각하고 계실 때, 내가 타고 다니던 차의 키를 아버지에게 넘겨드렸다. 아버지는 탐탁지 않게 내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타고 다니시게 되었다. 주행거리가 많아서 디젤 승용차를 타시던 아버지에게 휘발유 승용차는 짜증 그 이상이셨겠지만, (게다가 예전처럼 집안 경제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기에...) 나는 무엇인가 내 등에 있는 것을 털어내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진 것, 혹은 내 분수 이상의 물건을 갖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느꼈다. 그 뒤부터는 무리한 선택을 하는 것도 줄였다.(가령, 자동차의 경우) 그리고 선택을 하더라도 조금은 더 내게 더 유리한 조건으로 선택을 했다. 그렇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수입차"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지고 내 주변의 "수입차 오너"도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막상 나는 그들이 부럽지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수입차"의 진정한 맛을 보지 못한 이들도 있기에, 그 맛을 진정으로 보고 나면 느껴지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백화점을 방문했던 날(이제는 백화점에서 정상 가격의 옷도 잘 사지 않는다. 그냥 편한 대로 입고 그것이 잘 어울리면 가격과 상표는 상관없다. 심지어 내 등가방은 이만원도 안 되는 가방이다.) 백화점에 임시로 마련된 매대에서 한 참 여러 가지 품목을 할인하고 있었다. 그중에 "남자 지갑"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표는 "루이뷔통"이 아닌 "루이까또즈". 비슷해 보일 수는 있지만 전혀 다른 "루이까또즈"


언젠가, 분당 큰손의 아드님 "K"씨가 "대윤 씨, 에이.. 지갑이 그게 뭐야, 적어도 구찌나 루이뷔통 정도는 갖고 다녀야지.."라고 했던 말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K"씨는 이제 다시 분당 큰손의 아드님 신분으로 돌아갔을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분당 큰손의 아드님이기에 "루이뷔통" 지갑을 사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나이만 많이 먹은 학생이고, 지갑 안에 아무것도 없이 덩그러니 빈 지갑만 갖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나 스스로 딱해졌다. 세일을 하고 있는 매대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꽤나 튼튼해 보이는 지갑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단 돈, 몇만 원도 하지 않는 지갑을 2개를 짚어 들었다. 하나는 내가 쓸 것이고, 하나는 동생에게 줄 요량으로. 그리고 동생의 지갑에다가 만 원짜리 하나를 넣어서 포장도 했다.


아직도 나는 "루이까또즈" 지갑(몇 년 된 듯하다.)을 쓰고 있다. 그 말 많고, 대한민국 소비자를 봉으로 알고 있다는 "현대차"를 타고 있고, 시계는 그렇게 비싸지는 않지만 내 마음에 쏙 드는 녀석을 종종 손목에 두르고 다닌다. 가방은 여전히 등가방을 메고 있다(얼마 전 소중한 사람이 예전에 갖고 다니던 가방보다 훨씬 좋은 가방을 선물해줬지만, 아까워서 잘 메지 않는다.) 사진을 사랑하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 분수에 어긋나는 카메라도 구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새 카메라를 산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 카메라도 중고로 구입한 카메라지만 어디가 부서질까, 아껴가며 쓰고 있다. 내 주위를 저렴하지만 속은 알찬 존재들이 자리를 잡은 뒤부터 사는 것은 한결 부유해진 것 같다. 타인들에게는 모자란 듯하게 보일 나만의 부유함이 이제는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든다. 


2021년 4월 12일


https://brunch.co.kr/@likethat08/74


앞 범퍼가 부서져있었다. 시험 시간에 닥쳐서 주차를 급하게 하던 중, 화단 앞 블록 모서리에 쿵하고 부딪치면서 생긴 상처가 점점 넓어져갔다. 시험을 보고 나서 되돌아서 보니 상처가 생각보다 심란했다. "하~~!!"라는 말만 입에서 나왔다. 그렇고 보니 앞에 안개등도 덜렁 거릴 정도로 충격을 입었고, 앞의 충격으로 자동차 바퀴 위의 철판(앞 펜더라고 하지요...)도 밀려서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냥 급한 대로 붓칠을 하고 타고 다녔다. 분명, 예전 같으면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난리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지금 살아가는 것이 바쁘고, 해야 할 것들이 수도 없이 내 앞에 산적해있고, 그리고 자금도 예전처럼 여유 있지가 못하기에 그냥 모른 척 살았다. 그리고 오늘, 정비소를 찾아서 이 번 금요일에 수리를 하기로 예약을 했다. 그러면 다시 세차처럼 깨끗해지고 예뻐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최소 5년 이상은 더 타야겠다. 그러다 보면, 나도 졸업을 하게 되고 병원도 개원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내 분에 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다. 타인들에게 보이고, 주변에서 부러운 시선을 받는 순간은 잠깐이지만, 그 시선 뒤에 남겨지는 부담감은 감당하기 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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