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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Oct 10. 2021

아픔은 약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우울증, 공황장애 10년을 살다, 그 후

매년 1월 첫째 날, 한 해의 달력을 넘겨보며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습게도 올해 공휴일이 며칠이 되는지, 그리고 공휴일로 인해서 대체 휴일을 포함한 연휴가 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대체 유일이 조금 더 많다면 나는 은근 기분이 좋을 것이고, 적어진다면 부담스러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9년 5월, 동생은 크디큰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는 우리 가족이 무너지고 와해되는 신호탄이었다. 나는 본과 2학년 1학기에 재학 중이었는데, 때로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찰로 인해서 내가 동생의 병실을 지켜야 할 때도 있었다. 동생의 큰 상처와 아픔을 보면서 여타의 말을 전할 수도 없었지만, 나도 기말고사가 끝나지 않았던 그 무렵, 정말 아무리 찾아봐도 해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굳이 해답을 찾은 것이 동생의 자는 틈에 병원 휴게실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답답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1학년 2학기에는 운 좋게 장학금도 받았는데 이제는 장학금이 문제가 이난,  패스와 제적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독했다. 나는 책의 거의 반 권에 해당하는 범위를 다 외워서 시험을 아주 잘 치러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내 안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산지도 10년도 한 참이나 지났다. 곧,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이제 만성이 된 이 상태를 인정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만약, 내게 단순하게 치료 및 치유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점점 더 나의 증상이 심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환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직 내 한 몸만 생각하며 치유에 신경을 쓸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바듯이 2019년 가을, 나는 동생의 처치를 위해 휴학을 했다. 그 나이에 다시 휴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갈등도 적지 않았겠냐만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 가족 사이사이에는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날이 날카롭게 서있었고, 그날들이 어느 순간에는 가족 구성원들 서로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중, 그나마 내가 동생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였고, 아버지와 동생 혹은 어머니와 동생, 특히 아버지와 동생은 서로 마주하면 불똥을 튀길까 봐 내내 걱정이었다. 그랬다. 그래서 내가 다시 휴학을 하고 동생의 상처와 여러 가지를 도와서 두 학기를 보내고 다시 복학을 했다. 동생의 병새도 나아지지 않았고, 한 가지씩 질병이 더해지는 양상이었다. 나는 2학기 복학을 했지만 늘 좌불안석이었다.




깊은 가을, 그러니까 한 11월 즈음이 되었을까,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나의 반려견 "유키"가 심장 비대증으로 쓰러졌다. 심장 비대증만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유키는 그로 인해 폐수종까지 병이 진전되어 어느 날 밤, 2차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리고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 스스로 한탄스러웠던 것은, 유키가 당장 검사를 하고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데, 돈이,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키에게 바쁘다는 이유로 관심을 써주지 못했던 것이 그렇게 가슴 아프게 돌아올 지 몰랐다.

그동안 동생 치료비로 쓴 돈도 몇 억 가까이 되었고, 그리고 코로나로 경기가 워낙 안 좋아, 어머니의 건물도 몇 달째 공실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우리 가족은 한계까지 몰려있었다.


유키를 살려야겠다는 오직 한 가지 마음으로 친한 동생에게 내 평생 첫 빚을 내었다. 동생은 고맙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고, 나는 울면서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달아 경고음이 터졌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늘만 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머리를 동여 메고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 번에도 내가 다시 빚을 내었다.




그렇게 올해 봄이 되자 내 이름으로 된 빚이 수천만 원으로 늘어났다. 나중에 누가 갚을 것인가에 대한 것은 둘째로 한다 해도, 우선 돈을 차용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무능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나서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나는 또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빚만 떠 앉고 말았다. 그중에 나를 위해 쓴 돈은 단 1원 한 장 없이, 나는 그렇게 종종 매일 하늘을 보고 울었다.


올해 1학기는 정말 내가 갔고 있는 것을 다 뽑아 쓰는 학기였다. 3월 말부터 끊임없이 앓았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을 먹고 강의를 들으려고 책상 앞으로 가던 중, 내 몸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번-아웃 상태가 되어 한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1학기를 그렇게 보내며 내 약의 개수는 또 늘어났다. 이제 약이 7알이든, 8알이든, 혹은 그 이상이든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에 그 누구도 말로나마 "괜찮아??"라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누구도,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돈을 또 차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마침내 내 인생의 끝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나의 우울증은 약물치료보다 내 안의 여러 가지 들을 찾아내서 몰아내는 것에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 병원에 가면 상담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10여분(그 정도도 감사하다.) 내가 어디에 어떤 것이 잘못되고 있는지 찾기도 전에 상담은 끝나버린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내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의 감정들은 사정없이 파장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빗방울이 웅덩이 한가운데 떨어지면 처음에는 한 방울의 자국으로 시작되지만 잠시 후, 똑같은 중심을 가진 동심원으로 수없이 많은 원이 생겨 퍼져나가듯이 나는 그렇게 내 감정의 골들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을 한 것일까. 과거의 부모님은 내게 전문직 라이선스만 취득하는 전공에 합격하라고 나를 위하듯이 들들 볶으며 말했었다. 그러면 그 뒤부터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고. 하지만, 현실의 나는 내 미래는커녕 현실의 우리 가족까지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왜... 내게 왜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일까.




추석 연휴 며칠 전부터 온몸에 발진이 시작되었다. 그 어떻게도 가려움을 참을 수 없어서 밤이 되면 온 창문을 다 열고 잠을 잤다. 쌀쌀한 날에도 그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몸은 벌벌 떨리지만 창문을 다 열고 상의는 전부 탈의를 한 채, 그렇게 잠을 잤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내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내게 왜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일까에 대한 답을 문득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그 누구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돈도 그 누가 차용해서 가져오던 상관없다. 왜냐면, 스스로에게 관련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 대신 유키만을 끌어안고 살고, 어머니는 늘 나가 있어서 바쁘고, 내가 동생을 챙기거나 수업을 듣고 학점을 따서 진급을 하고 졸업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이 원했던 성적을 들고 오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가만히 내 약봉지를 열고 약의 개수를 세어봤다.


'하나, 둘, 셋.... 아홉'

그리고 내 약의 효과들을 다 찾아봤다.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작용을 하는 약들도 있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내가 이토록 약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약은 내면의 치료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삶을 더 이상 비참하게 끝내지 않도록 그냥 인간이라는 존재의 형태로 영위할 수 있게끔만 도움을 준다. 더 이상 아무것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혼자 새벽길을 걷는다. 어느 날 밤에는 불 꺼진 파한 시장의 곳곳을 걸으며 중얼도 거려보고, 큰 거리에서 혼자 웅크리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를 쳐다보다가 또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며칠 전, 낮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집의 노란 창가에서 도란도란 들리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도 힘겨운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고, 나도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데 왜 그들과 나는 이리 차이가 나는 것일까. 직접 만나 묻고도 싶어 졌지만, 꾹 참은 것은 어쩌면 그 답을 찾아내기에 내가 철이 덜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10년이 지나고 다시 또 시간이 흐른다. 약은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다시 "하나, 둘, 셋..."


이제 곧 열 알이 되겠지.


내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다. 내가 더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비가 내린다.

그리고 빗물 웅덩이에는 또다시 빗방울 떨어지고, 파동은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하나, 둘, 셋..."

동심원의 개수 역시 세어본다. "열 번까지 전달될까."


"1년, 2년, 3년..."

어느 정도가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때는 웃을 수 있을까.

문득, 침대에 누워 숫자를 세어본다.


아직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여기, 이곳에서 버티고 서있다.


2021-10-10


사진/글 고대윤


힘이 없다고 앉아만 있으면 저는 진짜 끝이 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제부터는 공부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나가기로 했습니다.

분명, 현재로써 저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여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약도 거의 맥시멈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약으로 이기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약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어느 날, 제가 이 병의 끝에서 패배가 아닌 승리를 하게 된다면,

이 병으로 고생을 하시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의지가 여러분을 치유시켜 드릴 겁니다."라는 말씀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부디, 다른 질병에도 건강하시고, 저를 포함하여 조금 더 행복한 시간들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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