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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Nov 16. 2021

靑春은 영원하다.

나의 봄도, 당신의 봄도...

"천 번을 흔들리지 않으면 어른이 되지 않는다."라던 386세대 아니 586의 교수는 인생을 너무나 쉽게 먹었던지,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였다보다. 그래서 천 번이라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해괴망측한 말을 하고, 노년의 자신은 성매매를 하러 다닌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 말의 진위를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보고, 자신의 삶과 비교도 해봐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거늘, 나같이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런 말을 쉽게 내뱉고 사는 사람들이 두 발 뻗고 살던 시대가 있었다.


나?? 나는 참으로 불행하게도 "낀"세대이다. 그러니까, 내 바로 윗 선배 세대만 해도 취업 알기를 우습게 알던 세대이고, 내 다음 후배 세대부터는 취업이 너무 힘든 세대가 되었다. 내 선배 누군가는 그랬던가?? 지방 3류 거점 국립대(현재 내가 다니는 학교)의 인문계 혹은 사회계열에서 과에서 꼴찌를 하면 가기 싫은 지방 은행에 취업해야 한다고. 


그 소리가 얼마나 무섭고도 속 편한 소리인가를 나는 이제 살아가면서 깨닫는다.

그는 실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 비해 천운을 타고났고, 그렇게 자신에게 온 천운을 날려먹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한 때, 청춘이란 시간을 지나왔거나 지금 청춘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어 졌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청춘. 실패 없는 청춘들도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 다큐멘터리 3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던 과에 호기롭게도 자퇴서를 던졌다. 이유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계속 있으면 내가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지금은 오히려 사라져 버린 "캠퍼스의 낭만"은 그 시절을 두고 하는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 누구도 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조리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은 졸업 후 무엇을 하시려고요??"라고 물어보면,

"난 그냥 공무원이나 해야지, 난 서울이 고향이니까. 서울시 7급 공무원이나 하려고."


세상에...


"서울시 7급 공무원이나..."라니.


그런데, 그 시대에는 그랬다. 모두 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리고 다 자신의 행복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갔자만, 자신의 의도대로, 계획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서였다. IMF 이 후로 이 세상은 180도 변했으니까.




"청춘"의 낭만은 사라져 버렸다. 밤늦게까지 캠퍼스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사회를 비판하는 이들은 자연스레 퇴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똑 닮은 386 선배들의 그 모습과 그 패기를 따라 하고 싶었겠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취업에 실패했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딱 하나...

자신들도 선배들과 똑같이 호경기가 계속되는 세상에서 살 것이라는 믿음 하나였다.


나의 "청춘"은 반쪽 자리 청춘이었다. 나 스스로 얼마간은 한 곳에 나를 묶어둔 청춘이라면 올바른 비유가 될까. 그렇게 나는 초반에는 반을 묶어두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내 "청춘" 모두를 다 한 곳에 쏟아버렸다. 그 당시에는 "청춘"이라는 것이 다 사라지는 것이 아까운 줄도 몰랐다. 단지, 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들의 반복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와 비슷한 삶을 산 무리들, 혹은 나보다 훨씬 빨리 자신들의 "청춘"을 짚어 던진 무리들 혹은 개체들은 상위 포식자가 되었다. 의사, 변호사, 변리사, 치과의사, 한의사 혹은 사업체를 갖고 있는 사장 등등, 그리고 그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똑같이 하는 한 소리는...


"우리 그때 참 힘들었어... 그렇지??"


타인들에게는 더없이 그냥 보내기 아까웠던 "청춘"이란 시간을 가혹하게 몰아붙인 그들은 이제 제2의 "청춘"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세상과 싸웠고 많은 실패를 했고, 늘 남부끄러운 눈물을 흘렸다. "청춘"은 그렇게 흘러가버렸다.




"청춘을 가만히 두라. 흘러가는 대로. 혹은 그냥 닥치는 그대로. 청춘에게 있어서만큼은 사용법이란 없다. 
중략...
주저하면 청춘이 아니다. 
청춘은 운동장이다. 눈길 줄 데가 많은 번화가이며 마음 들떠 어쩔 줄 모르는 소풍날이다.

- 이병률, 끌림


이런 글을 읽을 때면, 참 불편하다. 내가 하지 못한 것들, 비교적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청춘"이 운동장이 되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들떠 어떨 줄 모를 정도의 "청춘"의 뒤에는 무시무시한 삶의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 이 시대의 글들은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되도록 아름답게만 포장하려 노력하고 있다. 어느 "청춘"이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제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공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쩌면 가야 할 길이 많이 아프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만, 님께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치른 "청춘"의 보상은 그리 작지는 않으실 겁니다."


이 말은 그에게 하는 말이자,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도 늘 이 말을 하며 매일을 버티고 또 버틴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마냥 아름답게 포장하려 한다. 그 포장한 것들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수저" 혹은 "아빠 찬스"를 일컫는 사람들이다. 그런 것들이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청춘"이라는 소중한 보물을 인생의 전당포에 맞기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길다. 당신이 생각했던 "청춘"은 내가 살아온 후, 뒤돌아보며 생각하는 "청춘"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청춘"일 때 느꼈던 감정들도 그 시점을 지나고도 충분히 느끼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청춘"은 영원하다. 우리가 단순히 생각했던 "청춘"은 "청춘"이라는 단어의 한 "ㅊ"쯤에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때때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질 때 더 기쁘고 행복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청춘"을 쓰는 이유는 배로 돌아올 그 기쁨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


절대로 흔들리지도 않기를. 흔들리는 것은 행복한 "청춘"을 방해하는 것뿐이다. 비싸고 고급지게 포장하려 하는 누군가의 허울 좋은 말일뿐, "흔들리는" 것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다.


그리고 "청춘"이 아름답다고 방랑하지 말기를. 그 방랑의 끝에서 당신은 인생의 방랑과 절망을 만날 수도 있다. 


"청춘"은 당신만의 것이다. 이제부터 그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당신만의 것이다. 아파하되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기를, 부디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되, 그것을 밑천 삶아 방황하지 않기를. 그리고 이 글을 읽은 그대가 지나온 "청춘"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지 않기를.


인생은 너무나도 긴 "청춘"의 연속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언제든 우리 그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하며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의 조금 긴 한 숨 속 고민 끝에서 맞닿을 수 있기를.


이미지: 구글

글: HARU


최근 내 메일로 삶을 상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삶이 다른 삶의 삶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는 술을 마시는데 나는 못 마시고, 누구는 여자를 만난다는데 나는 못 만난다. "청춘"이라고 불릴 나이에 가슴 아플 법한, 그리고 부러운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삶의 "청춘"에 있어서 꽤 색다른 방향을 제시하고는 한다. 어른이 되는 과정도 나만의 방법으로 해석을 해서 들려주기도 한다. 나이 마흔넷, 아직 인턴도 시작하지 못한 예비 수의사가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만은 그들이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다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때 나는 행복함을 느낀다.


내 인생에 있어 "청춘"의 감정은 바로 이 행복감이다. 나는 세상을 조금 더 다르게 보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지나온 인생 선배들이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기 위해서 쓴 수려한 글보다, 그냥 지금 현재 자신이 닥쳐있는 현실을 보고, 그것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을 때, 마지막에 느낄 "청춘"의 행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려고 한다.


이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들에게 하는 말이자,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나도 아직은 모든 것이 편하지 않은 준비생의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행복해진다. 그런 것은 "청춘"이란 이름 아래에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수능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나에게 상담의 글을 띄웠던 그가 생각나서 글을 써본다. 그가 떨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잘 풀어내기를, 그리고 어떤 결과를 얻든지, 그의 길을 떳떳이 바라보고 자신만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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