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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Aug 10. 2023

내 가슴도 찢어졌습니다...

세월에 무뎌져가는 것들.

1986년 7월, 대한민국에는 새로운 부의 기준이 생겼다. 그라나다로 대표되는 현대의 고급차가 그 해 "그렌져"라는 새로운 자동차를 출시하면서 세상은 뒤집어졌다. 큰 차체에서 오는 위화감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렌져를 타는 사람에 대한 괜한 존경심까지 생기게 되는 차였다.


나의 주변에도 그렌져를 타는 이들이 있었다. 우선, 나의 외삼촌이 "그렌져"를 타셨고, 어릴 때부터 허세기가 등등한 나는 그런 외삼촌들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현대차 최고의 자리에서 그렌져는 그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그렌져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지만 조금 더 중후하고 멋들어진 "다이너스티"라는 승용차가 1996년 등장했다.



그렌져의 대략적인 히스토리


부의 상징이라던 그렌져는 그 뒤로 계속해서 그 가치가 낮아졌다. 다이너스티 위에 다시 에쿠스가 등장을 했고, 그렌져는 고급의 이미지를 낮추고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방편으로 3세대 그렌져인 "XG"는 프레임리스 도어(창문이 유리로만 되어있는 구조)로 젊은 층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한 껏 젊어진 그렌저는 그 이후세대에는 계속해서 타겟층을 낮춰가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4세대의 그렌져는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재벌집 자제인 현빈의 차로 등장을 했지만, 재벌집 자제분의 차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워졌다. 그 뒤로 살며시 "부"에서 "성공"으로의 이미지 변신을 통해서 "그렌져"는 조금 더 젊고 전문직인 타겟층을 고객으로 삼았다. 


그리고 현재 내가 타고 있는 그렌져 "IG"는 그렌져는 더욱 젊어진 디자인으로 인해 예전의 "그렌져"를 추억하는 "세대"에게는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렌져" 들 중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세대로 기록된다.


그 이후, 6세대, 7세대 그렌져는 아슬란과 제네시스에 밀리며 계속해서 이인자에 머물러있었지만, 최신형 그렌져 7세대는 현대차에서 분리되는 제네시스 덕분에 다시 현대자동차의 최고급 승용차가 되었다.



나와 그렌져


나에게 1세대 그렌져는 성공한 외삼촌들로 굳어져버린 "부의 상징"이었다. 만약에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을 때 그렌져를 탔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다. 아마 조금만 차를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던 학생들은 다 그런 생각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렌져의 변하는 역사에 결국 그렌져 XG가 나왔을 때는 "20대"에 그렌져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그렌져는 파격적인 변신을 한다. 물론 나는 그렌져 XG를 선택하는 대신 대한민국 1%의 렉스턴을 선택하게 되고, 그렌져와는 인연을 맺지 못하게 된다. 


그 뒤로도 삼성자동차의 매력에 한 동안 빠져서 헤어 나오지 않았고, 삼성자동차의 끝판왕 "SM7 RE35"까지 경험하고 나서도 그렌져와는 거리가 멀었다. 잠시 중고 그렌져 XG를 구입했으나 6개월 만에 다시 판매를 하고 그 뒤로는 오히려 그렌져보다 급이 높은 차들을 경험한 이유로 그렌져는 내게 있어서 그냥 그렇고 그런 승용차로 인식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운인지 4세대 그렌져 HG를 구입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운행하고 있다. 



그렌져의 장점과 단점


그렌져의 장점을 찾자면, 뚜렷한 장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보편적으로 무난 무난한 점들이 모여서 튀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외형도 무난해서 질리지 않고, 엔진 성능도 무난한 편이며, 승차감도 딱 그렌져를 타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승차감이라고 할까나. 그러니 그렌져는 어느 뛰어난 부분이 있어서 선택되는 자동차가 아니라, 달리 그렌져 외의 대안이 없어서 선택되는 차라고 생각하면 가장 어울리는 대답일지도 모른다.


단점은 잡소리가 많다. 파노라마 선루프에서 시작되는 잡소리와 안전벨트의 달그락 거림, 뒷좌석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삐걱거림, 한 치 느린 브레이크,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방향성과 딱딱함도, 부드러움도 아닌 서스펜션은 때로는 욕이 나오기 충분하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렌져다. 그렌져는 이런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렌져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만약에 그렌져를 다시 선택하게 된다면 그럴 것이다.(하지만 이제 다시 그렌져를 선택하고 싶지 않다.) 



최근


그렌져에게 새 신발을 신겨주고 새 엔진오일을 먹여주던 날, 내 그렌 쳐의 하체 교환 비용이 대략 200여만이 청구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 차에 200여만 원을 투자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고민서부터 내가 아직도 그렌져를 타고 있다는 건방진 생각까지 모든 일련의 생각은 나는 이 그렌져에 200만 원은 투자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나는 정비소 사장님과 국시가 끝나고 결정을 하자는 암묵적인 동의에 들어갔다. 다만, 정비소 사장님은

"아마 잡소리가 더 심해지기는 할 겁니다."라는 내 심장을 저격하는 총알 한 발을 더 난리셨으나, 예전 같으면 머리가 아팠을 나였지만 "차에서 잡소리 안 날 수가 없지요."라는 말로 깎듯이 맞받아치며 그런 고통쯤은 이내 감내하리라는 각오를 했다.


하지만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는 정은 어쩔 수 없는 것.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한 그렌져를 향한 나의 마음은 마치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와 같이 고각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점에서 접촉사고가 났다.



접촉사고, 그러나 마음이 아프다.


한 차를 오래 운전하다가 보면 그 차의 회전반경이라든가 차의 물리적 정도를 몸이 스스로 알게 된다. 이 것은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으로 오래된 습관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 나는 내 그랜져를 내 몸의 일부분처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던 중 내가 우회전을 해야 하는 골목 앞에 원룸 이사를 하는 트럭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에 주차금지 석이 보였다. 이 것을 보고 나는 순식간에 넉넉하게 내 그렌져가 날렵하게 통과해 줄 것으로 판단하고 조금 크게 핸들을 우측으로 트는 동시에, "쾅!! 드르륵~!! 그윽~~!!!!!"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전해졌다.


"앗~~!! ㅅㅂ~~!! 어딘가에 부딪쳤다는 것인데, 부딪칠 곳이 없었고 완벽하게 각을 재서 우회전을 한 것인데,

잠시 있는데, 옆에 있던 원룸이사 사장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제 리프트에 걸렸습니다. 잠시 다시 차를 후진해 보세요!!!"


차는 후진하는 사이 더 크게 긁혀나가는 것 같다. 드르륵!! 그르릉!!! 

'아.... 진짜 짜증 나는 소리다. '


차를 한쪽에 주차해 놓고 내려서 그랜져를 바라본다.



"아 이럴 때 어떡해야 모르겠네..."라고 상대방 아저씨는 난처해하신다. 


나는 언성을 높일 의향도 없고, 의지도 없다. 그냥 차의 옆구리가 찢어졌다. 만약 내가 세차였거나 내가 좋아하는 차라면 언성을 높였을까?? 나는 계속해서 차분하게 대처를 했다.


경찰들도 왔지만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딱히 하지는 못하겠다고 한다. 나보고 합의를 보실 생각이 없냐고 한다. 사람이라도 죽었나?? 아니면 다쳤나??? 합의 못 볼 이유가 뭣이 있겠는가. 마치 이 더운 곳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듯 보이는 똥마린 강아지 같은 경찰들을 보내버렸다.


사장님과 나만 웃으며 허허거린다.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장님께 뭐라 하고 싶지도 않다. 

"사장님 반반씩 하시죠?? 이런 일로 더운 날 언성높이는 일도 사장님도 저도 다 힘 빠지는 일이잖아요??"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현금으로 10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되실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10만 원으로 극적인 타협을 보고 서로의 갈길을 향해 멀어졌다.



'왠지 내 잘못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타협을 하고 내 길을 가는데 차가 부서진 부분에서 닿는 소리도 나고, 조금 더 부서지는 소리도 나고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혼란스럽다. 

아마도 내가 우회전을 더 신경 쓰지 않았거나, 내 차는 더 이상 새 차가 아니니까 괜찮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내 차를 긁은 잘못은 사장님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오래된 차는 주인을 무디게 만드는 어떤 마력을 갖고 있나 보다. 나도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만 했으니까.


하지만, 수리 날짜를 잡고, 수리 비용을 듣고, 다시 내 차를 보니 내 속도 찢어진다.

거의 다 정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속이 왜 찢어지는 걸까. 쓰라리기도 하고.

이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차에 대한 내 감정이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바였다.


어쩌면 내게 이런 작은 사고를 계기로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암시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왜 나는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자동차를 제일 가치 없게 생각하는 것일까. 다른 것들은 마치 다 사라질 것처럼 아껴 쓰는데...


주차를 하고 손상된 것을 한 번 더 보고 집으로 들어온다.

찢긴 곳이 험하고 보려니 불편하다.

내 마음도 찢기고 불편하다.


아직 나는 내 그랜져에 애정이 가득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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