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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블루 Mar 02. 2020

근대를 튀김옷 속에 넣은 일본

<돈가스의 탄생>을 읽고 '우리의 방식'을 생각하다 

큰 변화는 가까운 곳,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다. 변화를 시키려는 주체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변화의 객체인 우리들을 잘 깨닫지 못할 뿐이다. 단발령이 그저 억울한 일제의 간섭이라고만 생각했던 중학생 시절, 국사선생님의 “단발령은 사실 조선을 근대화시켜서 식민지 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상투 틀고 구두 신고 다닐 수 있겠니?”라는 설명이 머리를 한대 맞은듯한 충격을 받았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물건이 다름 아닌 돈가스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 놀랐다. 누가 그랬다. “네가 먹는 걸 보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라고. 동의한다. 돈가스라는 음식이 일본의 ‘3대 양식(일양절충요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의미가 깊은 음식인줄은 몰랐다. <돈가스의 탄생>을 읽어 내려가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일본인 화자를 만나 당황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우리”가 우리가 아닌 “일본”이라는 사실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일본은 675년 덴무 일왕이 불교사상에 입각해 살생금지 칙령을 발표(한반도 등에서 온 이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음)하면서 공식적으로 1200년 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일왕들이 거의 10번에 걸쳐 살생금지와 방생령을 내린다. 일본요리를 갓포요리라고 하는데 이는 ‘재료를 자르고, 익힌다’는 뜻이다. 어패류와 채소를 주재료로 사용하다보니 요리 방법도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육식의 부재를 깨뜨린 이는 메이지유신으로 유명한 메이지 일왕이다. 메이지 일왕은 1872년 육식 해금령을 내린다. 덩치가 큰 서구인들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일단 육식으로 체격적인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조선과 중국에서 일어난 동도서기론과 아주 다른 발상은 아니었다. 메이지 일왕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식생활에서도 서구화를 빨리 이뤄 서구열강에 먹히는 일을 방지하려 했다.


충격은 대단했다. 육식 해금령이 내려진 뒤 한 달 뒤에는 10명 정도의 자객이 조상들의 질서를 무너뜨린 메이지 일왕을 처단하기 위해 궁전에 잠입하기도 했다고. 이런 극적인 움직임보다 무서웠던 것은 일반인들의 무관심이었다. 메이지 일왕이 직접 육고기를 먹으며 솔선수범을 했지만, 일반인들은 고기를 다루는 것 자체를 불경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서양요리법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육식을 권장한 메이지 일왕

이런 상황에서 쇠고기를 일본식으로 조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소고기전골과 스키야키가 이때 태어났다. 그리고 나가사키로 들어온 지 300년이 지났던 빵도 화려하게 변신했다. 주식인 밥을 위협하기 보다는 간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영업 중인 도쿄의 ‘나카무라야’의 단팥이 그 예다. 단팥빵은 밥과 경쟁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나도 그 빵집에 갔었는데, 이런 사정을 모르다 보니 “맛집은 아니군”이라는 평을 내렸던 것 같다.


소고기전골과 스키야키가 육식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많이 지웠지만, 본격적인 육식의 문을 연 것은 돼지고기다. 사실은 돈가스도 처음에는 소고기에서 출발했다. 닭고기를 거쳐 돼지고기에 다다랐다. 요리방법도 달랐다. 코틀레트 일명 가쓰레스는 딥프라잉(Deep-frying) 방식이 아닌 소위 지짐 방식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은 이 방식을 쓴다. 돼지고기를 딥프라잉한 후 음식을 내기 전에 칼로 잘라 젓가락으로 집어먹을 수 있게 한 돈가스는 1929년에 태어났다.


돈가스의 탄생은 육식 해금령 이후 약 60년이 되는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이 순간은 일본인들의 새로운 음식문화가 태어난 시점일 뿐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에 가속력이 붙기 시작한 출발점이다.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근대화라는 과제를 일본인 스스로 어느 정도 요리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돈가스가 아직까지 일본에서 가장 사랑 받는 음식인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일본을 생각하면 돈가스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돈가스의 탄생은 일본의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냉정하게 “일본에는 고유한 음식문화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서양요리를 일본화시킬 수 있었다”라고 평한다. 한국과 중국도 같은 충격을 받았지만 ‘양식’이라는 장르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두 나라에는 고유한 음식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근대는 그렇게 왔다. 일본은 음식뿐 아니라 모든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일본화했다.


작지만 작지 않다. 돈가스를 만들어내면서 일본은 근대를 내면화했다. 소화했다. 우리는 광복 이후 받아 든 자유 혹은 민주주의를 ‘돈가스’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답은 만들어가는 것인데, 어딘가에 정답이 생각하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 “사회가 빠르게 변한다”라면서 항상 상황과 관련 없는 이상향만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분명한 것은 요리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누군가 만들어 준 입에 맞지 않은 요리를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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