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블루 Mar 01. 2020

3.1절 101주년, 잊지 말아야 할 ‘풋뽈 찬 사내'

우리는 우리 축구 이야기를 잊고 산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 그 자체보다는 이 운동이 지니는 의미와 문화적 자산을 좋아한다.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이 획기적인 전술을 들고 나오는 걸 보는 일도 즐겁지만, 수원삼성에서 뛰던 외국인 선수 에두가 골을 넣은 뒤 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사진을 찍던 고 신인기 수원삼성 명예 사진기자에게 달려가던 모습이 더 가슴에 남는다. 축구(혹은 스포츠)는 사회 안에 있고, 사회를 반영하고, 때로는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2020년 3월 1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아서 꺼내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뽈을 찼던 이들이다. 축구를 했던 이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축구가 지닌 특징적인 성격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 <암살>에서 속사포가 나온 학교인 신흥무관학교는 실제로 독립 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김원봉이 세운 의열단의 젖줄과도 같은 학교이기도 했다. 이 학교 교과목에도 축구가 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왜 축구를 했을까? 수많은 운동 중에서 축구가 신흥무관학교 체육 과목에 들어간 이유가 있다. 모든 운동은 저마다 어느 정도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조선에서, 축구는 위기 극복과 국권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운동이었다. 게다가 축구는 동료와 함께 해야 하는 단체 운동이다. 이렇게 당시 축구와 민족주의는 연결돼 있었다. 또한 축구는 신문물이었다. 이종성 한양대학교 교수는 "당시 축구도 새로 들어온 신문물이었다"라고 말했다.   


“국권상실의 위기의식이 팽배하던 시기에 축구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체육활동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었다.”

 

“하남길(2010)에 의하면 1906년 설립된 대한체육구락부와 1907년에 설립된 대한국민체육회, 1908년에 설립된 대한국민체육회, 1908년에 설립된 대동체육부 또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진화론적 자강론에 입각하여 체육발달을 통한 강력한 국가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한국 근대 축구의 도입과 이데올로기, 1882~1910> 장재훈 


사람들이 많이 모인 축구장은 독립군들이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제는 집회를 금지했지만 축구 경기가 열릴 때는 어느 정도 자유를 줬다. 워낙 사람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축구장에서 독립군끼리 만나 쪽지를 주고 받으며 정보를 공유했다는 자료와 구술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축구장은 여러 가지 이유로 뜨거웠다. 고증이 좀 더 잘됐거나 감독이 축구도 ‘모던하다’라고 생각했다면, <암살>에서 속사포가 테니스가 아닌 축구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안원생 선생

실제로 독립운동을 한 축구선수도 있다.  안중근 의사의 친조카 안원생 선생도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1905년생인 안원생 선생은 김구 선생의 비서 겸 통역으로도 활약했다. 그저 축구를 잘하고, 김구 선생 비서 겸 통역으로 일한 게 아니다. 중국 측에서는 학계(상해 교통대학 졸업)와 스포츠계에서 인맥을 쌓은 안원생 선생을 높이 봤다는 이야기도 학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이 인맥으로 1943년 카이로 회담(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중화민국 장제스가 모여 한 회담. 한국 독립을 결정한 회담)을 앞두고 김구 주석과 김원봉 광복군부사령이 장제스 국민당 총통을 찾았을 때 다리가 될 수 있었다. 


안원생 선생은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달리기와 농구 그리고 수영에서 모두 학교 대표 선수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축구를 잘했다. 1930년 <동아일보>는 "안원생은 체력이 매우 좋아서 한번 출장하면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매우 강하게 상대를 압박해서 상대가 중앙선을 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안원생은 공수를 겸비한 천재선수다"라고 썼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김용식 선생은 한국축구협회와 일본축구협회 모두 명예의 전당에 모신 분이다.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지금의 일왕배)에서 조선 팀들은 선전했다. 경성축구단은 1935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경성축구단 중심이었던 김용식 선생은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1936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했고, 일본이 국제대회 첫 승(스웨덴 전 3-2 승리)을 거둘 때도 주축으로 활약했다.  

일본축구협회 명예의전당에 있는 김용식 선생(왼쪽) 사진

김용식 선생 자료를 찾으러 일본축구협회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오자와 히로시 박물관 담당자는 귀한 사진을 손수 찾아줬다. 그리고 “당시 베를린 팀은 김용식 선생 없이 안되는 팀이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함께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던 손기정 선생은 “굉장한 스피드를 갖춘 선수였다. 지나치게 속도가 빨라 다른 선수들과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발에서 제외될 정도였다. 끈기가 있어 정신적으로 누구한테 밀리지 않았다. 마치 축구를 위해 태어난 남자였던 것 같다”라고 했다.  


이 외에도 군산에서 열리는 유명 유소년 대회 금석배의 정신적인 토대가 된 채금석 선생도 거론할만하다. 채금석 선생은 김용식 선생과 절친한 친구로 일본 경찰을 때려서 도망다니기도 했었다. 이름을 거론 하자면 끝이 없을 수도 있다. 식민지가 지배국의 최고 스포츠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아일랜드는 축구가 잉글랜드 운동이라고 배척했지만, 결국 축구를 받아 들였다. 일본이 지배했던 대만이 야구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한국도 야구를 좋아하지만, 일제 시대에는 조선은 축구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쉬운 점은 이런 많은 이야기가 널려 있는데도 우리가 제대로 자료를 모으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앞서 언급한대로 김용식 선생을 팀 자격(베를린 올림픽 대표팀)으로 명예의 전당에 모셨고, 이 승리를 주제로 한 책과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축구협회는 매년 과거 자료를 모으려고 7억 원 정도를 쓴다고 한다. 한국은 변변한 축구박물관조차 없다. 이야기가 힘이 되는 세상인데, 우리 현실이 이렇다.  


벌이도 변변찮은데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이유도 여기 있다. 계속해서 조금씩, 하지만 끈질기게 과거의 조각들을 모아보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축구? 빠르고 힘 세지 않아도 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