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
한국어보다 태국어를 사용하는 일이 더 많아지다 보니, 어느새 내 언어 체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끔 친구들이나 부모님과 통화할 때면 나도 모르게 한국어 속에 태국어를 섞어 말하곤 한다.
특히 한국어와 의미는 같지만, 더 짧고 발음하기 좋은 태국어 단어들이 그 자리를 금세 차지하곤 한다.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어 한국어 단어를 떠올려보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날 때도 있다.
그런 현상이 단지 발음이나 사용의 편리함 때문만은 아니다. 때로는 한국어보다 더 깊고 마음에 닿는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남는 단어가 바로 ‘귀엽다’와 비슷한 뜻을 가진 [น่ารัก : 나락]이다.
[น่า : 나]는 ‘~할 만한’, ‘~할 가치가 있는’을 뜻하고,
[รัก : 락]은 ‘사랑하다’, ‘소중히 여기다’, ‘연모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즉 태국어 사전이나 번역기로 보면 ‘나락’은 ‘귀엽다’로 번역되지만, 한국어로 옮기자면 ‘사랑스럽다’가 더 어울린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의미다.
태국에 살면서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태국 사람들은 첫 대면에서 ‘예쁘다’는 말을 참 자연스럽게 한다는 점이다.
시장에서도, 길에서도, 가게에서도 —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쑤어이(สวย)”라고 말한다.
외적인 칭찬을 주저하지 않는 태국인들의 문화 덕분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런 표현이 일상적으로 오간다.
한국에서는 이런 칭찬이 대체로 예의의 범주 안에 속하기 때문에, 처음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잠시 당황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태국어의 [สวย : 쑤어이]는 단순히 ‘너 정말 예쁘다’라는 말보다는, 상대에게 건네는 긍정의 인사, 반가움의 표현에 더 가깝다는 걸.
그런데 [น่ารัก : 나락]이라는 단어는 조금 다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어의 ‘귀엽다’나 ‘사랑스럽다’가 주로 아이들이나 연인에게 쓰이는 반면, 태국어 ‘나락’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심지어 연세가 많은 어르신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국어 ‘나락’이 가진 특별한 깊이다.
물론 귀여운 외모나 행동을 보이는 아이에게 ‘나락’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어떻게 어른에게도 그 말을 쓸 수 있을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왜 사람들은 나에게 “쑤어이”는 자주 말하면서 “나락”은 좀처럼 하지 않는 걸까?
이 궁금증에 대해 몇몇 태국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이랬다.
“‘쑤어이’는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거야.
처음 만난 사이에도 쉽게 할 수 있지.
그건 비교적 짧은 감정이야. 예쁜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하지만 ‘나락’은 달라.
외적인 귀여움뿐 아니라, 대부분 그 사람의 성품이나 행동을 보고 느껴서 하는 말이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쓸 수 있지.
상대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가 형성되야만 쓸 수 있으니까 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시간피 필요해.
조금 더 친밀해지고, 그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친절하거나 관대한 모습을 보일 때, 그의 마음과 노력에서 따뜻함을 느끼면 비로소 ‘나락’하다고 말하게 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태국어의 ‘나락’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표현이라는 걸.
상대를 지켜보며, 그가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 나오는 말.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긴 단어이기에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심지어 20대 청년이 80대 할머니에게도 쓸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얼마나 ‘나락’한 단어인지!
그래서 나는 가끔 한국의 어른들께 ‘나락’이라는 단어를 알려드리고, 조심스럽게 그 표현을 건넨다.
존경과 감사를 전하는 말도 좋지만,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지를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귀엽다’는 말이 자연스럽지만,
어른이 될수록 그런 표현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나는 말해주고 싶다.
나이 예순이 되어도, 아흔이 되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락’하다고.
여전히 사랑스럽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바란다.
나 역시 나이 예순이 되어도, 아흔이 되어도
‘나락’하다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누군가의 마음속에,
사랑할 만한 사람으로 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