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처럼 바람처럼 May 02. 2018

마흔의 임신_8

그날의 일기

책을 뽑아 읽다가, 그 날 빨래방 건너편 카페에서 끄적인 글을 발견했다.

생각이 옮겨가는 대로 두서없이 쓴 것이 느껴진다.

눈물만 흘렸던 날, 자책하고, 원망하고, 모든 사람을 미워했던 날이었다.

1월 17일 수요일, 수술 다음날

아기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지속적인 복기를 하게 된다. 너무 몸을 사리지 않았고, 너무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것 아닌가. 너무 오래 자동차를 타고 움직였고, 말 한마디에 욱했고, 입덧한다고 두 번 먹어야 할 영양제를 한 번만 먹은 적도 많았다. 그래서 좀 더 잘 버틸 수도 있었던 아기가 떠나버린 것 아닐까?

일요일 아침부터 오늘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겨우 수요일이란 것이 믿기지 않는다.
가끔씩 '만약에 유산되면...'이란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토요일 밤에 이트레이더스를 가지 말았어야 했다. 암 검사를 사전에 고지하지 않고 시행한 의사 탓도 해보고, 별의별 생각을 하다 보면 눈물이 난다.

엄마에게는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까.

컨디션이 너무 좋은 게 어이가 없다. 피도 이제 안 나고, 어지럽지도 않다. 이 정도 아픈 거였나. 머리가 멍해졌다가 혼자 있을 때는 눈물이 난다.

남편이 그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기 잘못 아니야', '내가 너무 못 도와줬어.'라고 말해 준 것이 가장 큰 위로였다. 남편도 힘들 것이다. 회사도 가야 하고, 아픈 아내도 신경 써야 하고(특히 심리상태). 지난주 나와 다툰 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아침 먹고 난 설거지는 임신 때부터 잘 해놓고 나간다. 때마다 전화를 한다.

마흔 한 살의 임신을 너무 쿨하게 지나려 했던가 보다. 절대 안정을 했어야 했나.
아니, 그냥 아픈 아기여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인연이 아닌 거라고 생각해보려 한다.

회사를 삼일 째 나가지 않고 있다. 나는 임신보다 출산휴가, 육아휴직에 더 관심이 가있었던 것은 아닌가. 지금도 회사 쉴 궁리만 한다. 이기적인 엄마였다. 아이를 기다리기보다 휴가를 기다렸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지난 한주 회사에서 열을 내고, 피곤한데도 관계 유지를 위해 약속했던 모임에 나간 것. 그것도 영향이 있었을까.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결국 나 살자고 했던 것들이 아이를 죽인 것만 같아 미안하다.

지금 이 아이를 제대로 보내기도 전에 다음 아이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은 너무 매정한 것 아닌가.

남편의 관심이 온통 자동차에 가 있는 것이 그리 서운하지 않은 것은 나와 함께 우울해하지 않기 위해서임을 알기에. 내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본인도 잊기 위해서.

나의 중력은 남과는 다르다.
나는 이렇게 슬프고 힘들지만, 남에게는 그냥 '쯧쯧'하고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일도 있단 걸 이번에 알았다. 모든 사람이 미워지는 마음.
'아기가 잘못돼서 오늘 수술해요'라는 말에 '오키'라는 문자는 심하지 않았나. 바로 근태 처리 이야기와 다음 임신은 잘 될 거라는 이야기. 그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분별력도 부족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나쁜 천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의 임신_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